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43)화 (243/394)

243화

 그 말을 들은 고동주가 당혹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태식아, 가서 애들 다 데려와라. 바텐더랑 신입 빼고.”

“예!”

고동주의 명령에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직원이 재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직원이 미처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문신한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이 새끼들이 뭐라 지껄이는 거야? 야!”

남자가 휘두르는 주먹을 본 권세현이 직원의 팔을 잡아당겨서 제 등 뒤로 보냈다. 타격음과 함께 직원 대신 권세현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혀, 형님!”

“형님!”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직원과 고동주가 희게 질린 상태로 소리를 내질렀다. 빗맞아서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지켜보던 이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저 시발…!”

“고동주, 흥분하지 말고 아까 말한 대로 조용히 내쫓아.”

맞은 왼쪽 볼을 대충 손으로 훑은 권세현이 눈짓으로 문 위에 달린 작은 CCTV를 가리켰다. 상대가 먼저 폭행을 가했으니 만약에 일이 복잡해진다 해도 말할 거리는 충분할 것이다.

‘어차피 상대도 섣불리 신고 못 하겠지만.’

딱 봐도 경성에게 고용된 놈들이라는 게 티가 났다. 이런 식으로 매일같이 압박을 넣겠다는 계획이겠지.

살짝 삐뚤어진 넥타이를 매만지며 권세현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오픈 준비를 하던 직원들이 굳은 표정을 하고는 우르르 몰려나왔다. 쫓아내라고 말해 놨으니 뒤는 고동주가 책임지고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그 모든 일을 구경하고 있던 권정한이 소리 낮춰 말했다.

“생각보다 평화적으로 해결하네요. 무기를 꺼내지도 않고…….”

“여긴 능력자가 없는 세상이니 무기 같은 건 아무래도 잘 꺼내지 않을 것 같긴 하군.”

유리 너머로 고동주의 주먹 한 번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상대 남자들을 보던 박건호가 천사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잠깐, 눈 밑에…….”

바싹 붙어 선 천사연이 손을 뻗자 권세현이 주춤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뭡니까?”

“쓸린 흔적이 남아 있는데. 치료해야 하지 않나?”

“이 정도 긁힌 상처는 내버려 두면 알아서 낫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건들지 마시죠.”

“약은 바르는 게 좋아 보이는군.”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일이나 하세요.”

자꾸만 거리를 좁혀 오는 천사연이 짜증 났는지 까칠하게 대꾸한 권세현이 대답도 듣지 않고 등을 돌렸다. 천사연은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할 뿐, 붙잡지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본 박건호는 복잡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다이스는 큰 문제 없이 영업을 재개했다. 일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온 네 명은 곧장 한이결이 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웬일로 민아린이 아닌 김우진이 그들을 맞이했다. 김우진의 얼굴은 한이결의 걱정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해서 그런지 굉장히 거칠었다.

“한이결과 민아린 힐러는?”

“둘 다 자고 있습니다. 민아린 힐러는 에드워드 제작자의 방에서.”

김우진의 대답에 천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7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다. 아직 감기 기운이 남아 있는 한이결과 간호로 고생했을 민아린은 잠들어 있을 만했다.

“한이결의 상태는 좀 어떻지?”

“미열이 남아 있긴 하지만 기침은 확실히 줄어들었습니다. 식사와 약도 잘 챙겨 먹었고요.”

“그나마 다행이군. 그럼 깨우지 않고…….”

“아뇨.”

김우진의 뒤에서 한이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깼는지 침대에서 내려온 한이결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방금 돌아오신 겁니까?”

“그래. 더 자도 된다.”

“괜찮습니다. 다들 피곤하지 않다면 얘기 좀 할 수 있습니까? 금방 씻고 나오겠습니다.”

콜록, 한이결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하며 기침을 짧게 했다. 고통스러워할 정도로 격하게 기침하던 어제보다는 확실히 상태가 좋아 보였다. 그걸 알아챈 모두가 속으로 조금은 안도했다.

“무리하는 것 아닌가?”

“무리는 무슨… 씻고 나오겠습니다.”

천사연이 가볍게 장난을 걸자 한이결이 애써 시선을 피하며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갔다.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로 천사연이 김우진에게 물었다.

“하태헌 부마스터는 어디에 있지?”

“건너편 방에 있습니다.”

“불러와. 자고 있진 않을 거다.”

“예.”

김우진이 방을 나가는 것을 확인한 천사연은 이어서 박건호와 우서혁, 권정한에게 입을 열었다.

“한이결이 말한 대로 얘기 좀 하지.”

“상관없습니다.”

일반인과 체력이 큰 차이 없는 권정한도 흔쾌히 동의했다. 김우진과 함께 하태헌이 방에 도착한 지 얼마 가지 않아 한이결이 욕실에서 나왔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신경 쓰였는지 머리가 젖은 채로 나온 그는 아직 약 기운이 남아 있는지 조금 피로해 보였다.

***

다이스로 일하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올 타이밍에 맞춰서 겨우 깨어났지만, 의식 한쪽은 여전히 몽롱했다. 독한 감기약을 먹어서 그런가?

그래도 샤워를 끝내고 나니 흐렸던 정신이 조금은 돌아왔다. 욕실 내부에 비치된 드라이어로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리고 나가자 다른 방에서 쉬고 있던 하태헌도 돌아와 있었다.

“더 안 자도 괜찮은가?”

“그럼요. 멀쩡합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걱정이 담긴 말을 건네 오는 하태헌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다른 방에서 자는 민아린과 에드워드를 제외하고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천사연이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김우진이 가져다준 따듯한 물이 담긴 잔을 받아 들었다. 내 무릎 위로 날아온 여우가 꼬리를 살랑이며 발라당 누웠다.

‘경성이라…….’

그래. 그 시기가 벌써 왔구나. 경성 쪽에 고용된 놈들이 처음 가게에 왔던 날은 아직 기억에 남아 있긴 했다. 가벼운 몸싸움이 일어났던 것도.

아마 이제부터 틈만 나면 찾아와서 깽판을 칠 거다. 경성이 노리는 것은 다이스 가게 그 자체이니 거슬릴 만한 행동을 최대한 할 것이다.

‘그럼… 여기 계속 있다 보면 그 남자도 만나게 되는 건가.’

이 상황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처음 다이스에 떨어졌을 때부터 진작 각오는 했지만…….

“전부터 생각한 건데…….”

이전에 우서혁이 챙겨 왔던 팸플릿을 무성의하게 넘겨 보던 권정한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만들어진 공간이라지만 마주하는 사람들이 너무 현실감이 강해요.”

“무슨 뜻이지?”

“저희가 마주치는 사람도 공간과 마찬가지로 만들어진… 실제 생명은 없는 존재일 텐데, 그렇게 여기기엔 지나치게 생생하다는 뜻이에요. 착각하기 딱 좋게요.”

나는 조용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권정한의 의문은 제법 날카로웠다. 무엇보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곳은 내 과거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가상 공간이다. 권세현은 물론이고 고동주나 다이스 직원들, 경성에 고용된 놈들 모두 살아 있지 않은 존재였다.

그렇다면 이 공간에서 권세현과 엮이지 않은 타인들은 대체 뭘까? 이를테면 다이스를 찾아오는 손님이나, 강남 거리를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 말이다.

나는 그들에 대한 기억이 조금도 없을 텐데. 무엇을 토대로 만들어져서 행동하고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애초에 이 공간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오싹한 소름이 스쳐 지나갔다.

에드워드는 이 공간을 이루는 모든 것에 선이 잔뜩 이어져 있다고 알려 줬었다. 에드워드가 능력을 쓴 눈으로 봤을 때, 권세현도 그렇게 선으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이 공간을 현실로 여기지 않고 누군가의 제작물이라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에드워드 한 명뿐일지도. 나를 포함해서 다이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우리는 이미 혼동을 겪고 있으니까.

“…그러니 더욱 마음을 다잡고 휘둘리지 말아야겠지. 이곳에서 만나는 낯선 이들은 모두 꿈이나 다름없는 허상이다.”

드물게 딱딱한 말투로 말한 박건호의 시선은 웬일로 천사연을 향해 있었다. 천사연도 그걸 뻔히 알면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설명하지 않은 뭔가가 있었나 보다. 뭐, 무슨 문제인지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지만.

‘생각해 보면 박건호는 이번에 처음 봤겠구나.’

권세현에게 유독 무르게 대하는 천사연의 모습을. 나야 매일같이 일을 나갔으니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더는 둘 사이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막아 보려고 어설프게 나섰다가 된통 당하기도 했고.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오른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말을 꺼냈다.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으니 이따 오후부터는 저도 다시 일하러 가겠습니다. 이전에 하던 대로 번갈아 가면서 하죠.”

“무리하지 말고 더 쉬는 게 나을 텐데.”

“아뇨, 하루 종일 누워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더는 못 버티겠습니다. 그보다 박건호 팀장님, 오늘 고생해 주셨는데 오후에 또 출근하셔야겠네요.”

나름 미안함을 담아서 얘기하자 박건호가 대답 대신 짙은 미소를 지었다. 엄청나게 재수 없네. 괜히 말했다.

“낯선 사람들이 찾아온 것 말고는 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가게 주인이 전달한 사항이 있다거나.”

“전달 사항이라… 그러고 보니 가게 주인이 한이결, 널 걱정하던데.”

“저를 걱정했다고요? 가게 주인이요?”

“그래. 가까운 거리에 큰 병원이 있으니 가 보라는 말도 덧붙여서 하더군. 그사이 꽤 친해졌나?”

“병원…….”

가까운 거리에 있는 큰 병원이라면 내가 지금 떠올린 그곳이 맞겠지. 설마 권세현이 스스로 그 병원을 입에 올릴 줄이야…….

생각지 못한 사실을 전해 들은 대가는 싸한 통증으로 되돌아왔다. 지끈거리는 가슴 부근을 느끼며 나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결국 예상했던 대로 이곳도 변하는군.’

우리가, 정확히는 내가 권세현의 삶에 개입하면서 이 공간은 과거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소하지만 분명하게.

창밖의 먹구름이 잔뜩 껴서 흐린 아침 하늘을 응시했다. 권세현이 어떤 기분으로 병원에 대해서 말을 했는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미련하기만 했던 나보다는 조금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가요. 나중에 만나면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해야겠습니다.”

송곳처럼 날카롭게 솟구치는 과거의 기억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담담히 답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