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61. 낡은 꿈
민아린이 굳은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한이결이 잠들어 있는 호텔 방 바로 맞은편, 그곳에서 민아린을 기다리고 있던 모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떻습니까?”
우서혁의 물음에 민아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열이 너무 높아요.”
이 공간에 들어온 지 8일이 지났다. 다이스의 영업이 끝나는 아침 5시경, 치솟는 열을 버티지 못하고 기절하듯 쓰러진 한이결을 둘러업고 호텔로 들어온 지 2시간이 지났다.
이 상태로는 최소 사나흘은 휴식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내일은 휴무일이긴 했지만, 이틀 후부터는 누군가 한 명이 한이결의 자리를 채워 줘야 할 것이다.
“해열제를 먹기는 했지만 금방 떨어질 것 같지가 않네요.”
“만약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죠. 여기서는 병원을 갈 수 없으니까요.”
능력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한이결을 포함한 모두가 이곳에서는 신원 증명도 안 되는 상태이니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는다거나 입원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일단은 지켜보는 게 좋겠어요. 해열제가 잘 들어서 열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리 힐러라 해도 감기를 없애 줄 수는 없다. 그 서글픈 현실에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민아린이 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이번에 열이 내리고 한이결 씨가 정신을 차린다고 해도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상태는 계속 나쁠 겁니다.”
박건호가 복잡한 낯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원인 해결이라.”
8일.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한이결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다. 마치 햇빛을 받지 못한 식물처럼 바싹바싹 말라 가는 모습에 주변인들의 가슴도 타들어 갔다.
“우진 씨가 알려 준 대로 알코올 의존도도 여기서 더 높아진다면 너무 위험해요.”
한이결은 우서혁이 칵테일을 준 이후부터 하루도 빼먹지 않고 술을 마셨다. 우서혁과 김우진이 만들어 주는 칵테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몰래 맥주 캔까지 가져가서 마실 정도라 어느 정도 신경을 써야 하는 수준인 건 확실했다.
“지금으로서 원인 해결이라면 이 공간을 나가는 것 말고는 없어 보입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이결 형에게 문제가 뭔지 묻는 게 낫지 않나요?”
하태헌이 한 말에 권정한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박건호가 곧장 고개를 저어 왔다.
“글쎄. 별로 좋은 방법 같지는 않군. 자칫하면 그 질문 자체가 부담이 될 거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우리에게 들키지 않도록 신경 쓰느라 더 예민해진 것도 있으니까요.”
“반대로 그만큼 숨기고 싶은 부분인 거지. 우리는 그저 이대로 모른 척하면 돼. 한이결 본인이 결론을 내릴 때까지.”
박건호의 얘기에 김우진이 입술을 다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김우진을 포함해서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한이결이 숨기는 것이 무엇인지는 상관없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한이결이 건강을 되찾고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덜 받는 것이었다.
“한이결 씨가 방법을 찾을 때까지 버텨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제 정말 시간이 조금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한 에드워드가 안타까운 기색으로 속삭였다.
“버틸 수 있을 거다.”
지금껏 조용히 대화를 듣기만 하던 천사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일은 쉬는 날이니 에드워드는 박건호 팀장과 우서혁 비서와 함께 공간을 빠져나갈 단서를 찾아보고, 민아린 힐러는 한이결 간호를 계속하도록. 김우진은 이따 나가서 약과 죽을 사 와.”
“예.”
“알겠습니다.”
한이결이 걱정된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태헌의 말처럼 하루라도 빨리 이 공간을 빠져나가야만 한이결이 괜찮아질 것이다.
역할을 정하는 레퀴엠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하태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이결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한이결이 조금이라도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창문마다 커튼을 쳐 놔서 그런지 방 안은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한이결의 곁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워 있던 여우가 인기척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하태헌을 확인하고는 안심했는지 꼬리만 몇 번 살랑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새액, 색. 약간 거친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들어 있는 한이결의 이마에는 열을 낮추기 위한 해열 시트가 붙어 있었다. 그의 살짝 찌푸린 미간을 응시하던 하태헌이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볼을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아 오는 체온은 여전히 뜨거웠다.
어둠이 덮인 한이결의 자그마한 얼굴 위로 권세현의 얼굴이 옅게 겹쳐졌다. 자신을 어색하게 바라보는 그 눈빛과 목덜미를 쓸어 만지는 그 행동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숨기고 있든 한이결은 한이결이었다.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제 몸을 조금이라도 더 돌봤으면 하는 마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으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한이결이 작게 뒤척였다. 볼에서 손을 뗀 하태헌은 작게 들썩이는 그의 가슴을 천천히 토닥거렸다.
너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꿈속에서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온통 새하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어서 주변만 두리번거리던 나는 어딘가에서 불어온 미풍을 느꼈다.
‘따듯해…….’
앞머리를 살랑이는 가벼운 바람은 따듯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하늘 저편에서 내려오는 햇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노랗게 반짝이는 빛 무리에 홀린 듯이 그곳으로 움직였다. 햇살이 들어오는 자리는 무척이나 따스했다.
그렇게 얼마간 햇살을 받으며 서 있자 다시 바람이 불어오며 이번에는 연분홍색 꽃잎이 팔랑이며 날아왔다. 벚꽃잎이었다.
꽃잎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흰 셔츠를 입은 남자 한 명이 보였다. 환한 금발 아래로 보이는 입술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연선우?”
내 부름을 들은 연선우가 천천히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급히 쫓으며 소리 높여 외쳤다.
“연선우, 기다려!”
망설이지 않고 힘차게 뛰어가는 연선우의 넓은 등이 쭉 뻗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갈수록 강해지고 흩날리는 벚꽃잎이 많아져서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잠깐만, 연선우! 선우야…!”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멈춰 서지 않는 연선우의 모습에 초조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분명 온 힘을 다해서 뛰는데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그를 놓쳐 버릴까 봐 무서웠다.
시야에 보이는 한이결의 깨끗한 손이 점차 커지고 울퉁불퉁해졌다. 흉터가 가득한 그 손. 나는 어느샌가 권세현이 되어 있었다.
“연선우!”
그제야 연선우의 팔을 붙잡을 수 있었다. 혹시라도 나를 뿌리치고 멀어질까 두려워 그의 팔을 움켜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형님.”
나를 돌아본 연선우가 화사하게 웃으며 나를 불렀다. 안도의 숨이 절로 나왔다.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
“형님 찾고 있었어요.”
“나 뒤에 있었는데…….”
“그래요? 몰랐네요.”
다행이다. 내게서 벗어나려던 게 아니었구나.
묘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나를 내려다보던 연선우가 천천히 손을 잡아 왔다.
“형.”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품 안으로 파고드는 체온이 느껴졌다.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내게 안기는 연선우의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연선우?”
“형, 저…….”
바람과 함께 엄청나게 많은 벚꽃잎이 쏟아져 내렸다. 내게 안겨 있는 연선우의 몸이 빠르게 무거워졌다.
“너무 아파요…….”
문득 질척한 느낌이 배 근처에서 느껴졌다. 주룩, 아래로 미끄러지듯 쓰러지는 연선우를 쫓아 무릎을 꿇어앉았다.
“서, 선우야.”
그가 입고 있는 상의가 빠르게 젖어 갔다. 비릿한 피 냄새가 가득 퍼져 나갔다.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린 연선우가 기침과 함께 붉은 피를 토해 냈다.
“아, 안 돼. 안 돼…….”
온몸이 덜덜 떨렸다. 차갑게 식어 가는 녀석의 몸을 허겁지겁 끌어안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잎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형님…….”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연선우가 거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왜… 나를… 지켜 주지, 않…….”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연선우의 몸이 사라졌다. 품에 안은 흰 셔츠 아래로 낡은 뼈가 툭툭 떨어졌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아아악……!”
허억, 헉, 목이 졸리는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내가 내뱉는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가득 울려 퍼졌다.
“으… 윽…….”
셔츠를 끌어안은 채로 헐떡거리는 내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벚꽃잎이 가득 쌓여 있는 하얀 바닥을 밟고 선 상대방이 고개를 숙이자 어깨를 넘는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너 하나가 모든 것을 망쳤어.”
“…….”
“염치도 없는 새끼…….”
삐이이이, 귀를 찌르는 이명과 동시에 어딘가에서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투둑, 벚꽃잎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심장을 찌르는 통증을 버티지 못하고 몸을 깊게 숙이자 등 위로 낯선 음성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이 모든 건 너 때문이다.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난 벌을 받은 거다. 너만 없었으면 모두가 행복했을 텐데.
너만 없었으면…….
“아…….”
나는 고개를 들고 웃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선우야, 나는 이제 정말로…….’
죽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