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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40)화 (240/394)
  • 240화

     눈을 뜨자 빗물에 잔뜩 젖어 있는 호텔 창문이 보였다. 쿠르릉, 천둥소리와 빗소리가 한데 뒤엉켜 천지를 가득 울렸다.

    이 공간에 들어온 지 벌써 일주일이 훌쩍 넘었고, 비는 사흘째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된 것이다.

    피이익, 피익! 픽!

    불안한 울음소리를 흘리며 낑낑거리던 여우가 내 볼을 핥아 왔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지각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제보다 훨씬 더 늦은 때였다. 왜 아무도 안 깨운 거지?

    침대에 걸터앉자 머리 뒤쪽에 묵직한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두통뿐만 아니라 몸 자체가 축축 처지는 게 상태가 영 좋지 않다는 게 바로 느껴졌다.

    “한이결. 일어났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는데, 김우진이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곧장 내게 걸어와 근심 어린 눈빛으로 여기저기 살핀 녀석이 입을 열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더 잘래?”

    “아니, 잘 만큼 잤어. 다른 사람들은?”

    “건너편 방에 모여 있어. 나는 너 깨우러 온 거고…….”

    “씻고 그쪽으로 가야겠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어서자 김우진이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벌써 나흘이나 쉬지 않고 일하러 나갔잖아. 우리는 하루걸러 하루 쉬는데 넌 쉬지도 못하고.”

    “모레에는 쉴 수 있으니까 괜찮아.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매주 화요일은 다이스의 휴무일이었다. 수요일부터 일을 시작했으니 이번 화요일이 우리의 첫 휴일인 셈이었다.

    김우진을 뒤로하고 욕실로 들어간 나는 찬물로 샤워를 했다. 열을 식히니 몸이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울에 보이는 모습도 평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여우를 안은 채로 김우진과 함께 맞은편 방으로 이동하자 에드워드가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반겼다.

    “드디어 단서를 발견했어요!”

    “그게 정말입니까?”

    일주일 만에 얻어 낸 희소식이었다. 설명을 듣기 위해 소파에 앉자 우서혁이 내 몫의 도시락을 앞에 놔 주었다. 나 혼자만 늦잠을 잔 터라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먹고 치운 모양이다.

    “이 공간은 수많은 선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저는 능력으로 그 선을 볼 수 있고요.”

    “선이요?”

    “네. 이런 만들어진 공간이나 정신계 능력처럼… 상대방과 상호 작용이 주를 이루는 능력의 경우에는 선을 볼 수가 있어요.”

    에드워드가 종이와 펜을 꺼내서 간단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검은 펜으로 사람 둘을 그린 에드워드가 붉은 펜으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 선을 하나 쭉 그었다.

    “정신계 능력을 예로 들자면 이런 식이에요.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정신계 능력을 쓴다면 이런 선 하나가 연결되는 거죠. 실제로는 기운의 흐름이지만… 선으로 표현하는 게 가장 비슷해요.”

    “이 공간이 저런 선과 비슷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죠. 우리와 이 공간이 상호 작용을 하고 있으니까요. 한이결 씨가 앉아 있는 의자도 능력을 사용한 제 눈에는 모두 선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셀 수 없이 많은 검은 선으로요.”

    이런 얘기는 처음이라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나와 비슷했다.

    “그럼 그 선을 없애면 되는 건가요?”

    “아뇨. 다른 색의 선을 찾아야 해요.”

    권정한의 질문에 고개를 저은 에드워드가 이어 말했다.

    “제가 일주일 동안 찾은 게 그 선이에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 드디어 색이 살짝 옅은 회색 선을 발견했어요. 검은 선이 워낙에 많아서 알아채는 게 늦었네요.”

    살짝 미소 짓는 에드워드의 얼굴은 어제보다 훨씬 편해 보였다. 일주일 동안 마음에 쌓아 놨던 부담감이 조금은 줄어든 것 같아 다행이었다.

    “회색 선을 따라가다 보면 공간의 근원이 되는 곳을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것만 파괴하면 이 공간도 빠져나갈 수 있고요.”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호텔부터 차근차근 짚어 봐야 해서… 최소한 열흘 이상은 필요해요. 사실 저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서 정확히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으니 상황은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아마 다음 주 정도면 호텔은 확인이 끝날 것 같아서… 회색 선을 따라 밖으로 나가야 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괜찮나요?”

    에드워드가 조심스럽게 묻자 팔짱을 낀 채로 듣고 있던 천사연이 대답했다.

    “그런 문제라면 당연히 괜찮다. 혼자 나가는 건 위험할 테니 반드시 공격형 능력자와 함께하도록.”

    “그럴게요.”

    입맛이 영 생기지 않아서 도시락에 담긴 반찬 몇 개만 대충 입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어차피 이제는 일하러 갈 시간이었다.

    밖은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기분은 어제보다 훨씬 나았다. 이 공간에서 나갈 수 있다. 그것만이 내 희망이었다.

    ***

    밤이 늦어지자 빗발이 더욱 강해졌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빗줄기 덕분에 손님은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콜록.”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작게 기침을 뱉은 나는 다른 사람 모르게 맥주 캔을 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을 열자 비바람이 얼굴을 강타하며 야경이 나타났다.

    “콜록, 콜록.”

    바람 능력으로 비를 막아 내며 맥주 캔을 땄다. 시야를 가리는 빗줄기 너머로 저 멀리 새하얀 건물 빛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것을 바라보며 맥주 한 캔을 비워 낸 나는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옅은 바람으로는 비를 아예 막아 낼 수 없었는지 몸이 조금 젖었다.

    캔 수거함에 빈 맥주 캔을 버리자마자 김우진이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어왔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

    “나갔다 왔어? 머리가 좀 젖었는데.”

    “응. 밖에 있는 맥주병 상자 좀 옮겨 달래서 도와줬어.”

    “나 부르지 그랬어.”

    “너는 칵테일 만들어야 하잖아.”

    지난 한 주간 칵테일 만드는 실력이 엄청나게 좋아진 김우진은 이제 바텐더 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칵테일도 잘 만들고 얼굴도 예쁘니, 누군들 싫어하겠냐만.

    “오늘은 뭐 배웠어?”

    “블루 사파이어.”

    “나도 만들어 줄 수 있어?”

    칭찬이 부끄러운 듯 수줍게 웃은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지금 만들어 줄까?”

    “나야 좋지.”

    바로 향하는 김우진의 뒤를 졸졸 쫓았다. 내가 앉은 자리 맞은편에서 남은 재료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한 김우진은 금세 블루 사파이어를 완성해서 앞에 놔 주었다. 바 위에 달린 색색의 조명에 새파란 칵테일이 아름답게 빛났다.

    나는 근처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소리 낮춰 입을 열었다.

    “와, 이젠 진짜 전문가 같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자격증 도전해 보는 건 어때?”

    “자격증 없어도 말하면 언제든 만들어 줄 수 있어.”

    그것도 그렇지.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용품이나 재료도 준비해 놔야겠지만.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자 입 안에 탄산과 함께 청량한 라임 맛이 확 퍼졌다. 만족스러운 칵테일의 맛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맛있네.”

    “그, 그래?”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김우진이 그 한마디에 활짝 웃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칵테일을 마저 마시는데, 2층에서 내려온 고동주가 우리를 발견했다.

    “뭐야, 쪼끄만 놈. 또 술 마시냐?”

    한이결이라는 이름 대신 나를 ‘쪼그만 놈’이라고 부르는 고동주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술도 못하게 생긴 게 며칠째 이러네. 어제는 맥주도 훔쳐 마시더니… 아주 맛 들였구만.”

    “고작 칵테일 한 잔인데요.”

    “칵테일은 술 아니냐? 게다가 그거 블루 사파이어잖아. 우리 가게는 도수를 좀 높게 만드는데… 적당히 마셔라. 엉?”

    며칠간 함께 일하면서 내가 좀 익숙해졌는지 잔소리를 줄줄 쏟아 낸 고동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형님 예전 모습 보는 것 같네.”

    대놓고 한숨을 푹 내쉬며 지나가는 고동주의 뒷모습을 어이없어서 쳐다보는데, 손에 들린 칵테일 잔이 갑자기 휙 사라졌다.

    “김우진?”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칵테일 잔을 뺏어 든 김우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며칠째 이랬다고? 한이결, 설마 어제도 마셨어?”

    “그게…….”

    마시긴 했다. 우서혁이 만들어 준 칵테일을.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김우진의 표정이 점점 무섭게 일그러졌다. 친해진 이후로 녀석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틀 전에도 내가 만들어 준 거 마셨잖아. 근데 어제도 마셨다고? 맥주까지?”

    “아니, 그건…….”

    들킨다 해도 이만큼 날카롭게 반응할 줄은 몰랐던 터라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말만 들으면 내가 무슨 소주를 매일같이 병나발로 분 줄 알겠다. 고작 칵테일 한 잔과 맥주 캔일 뿐인데.

    “오늘은 그만 마셔.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만들어 주지 않을 거야.”

    “잠깐, 김우진. 너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야. 원래 다른 사람들도 일 끝나면 맥주 정도는 간단하게…….”

    “매일 마셨잖아.”

    김우진이 내 설득을 냉정하게 막았다.

    “그리고 매일 술을 마신 지 삼 일보다 더 된 거 같은데.”

    “음…….”

    “한이결…….”

    정곡을 찌르는 말에 대답 못 하고 시선을 피하자 김우진이 조금은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술 마시면서 억지로 참아 내는 게 아니라…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 주면 안 돼?”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제발 힘들면 힘들다고 말 좀 해 줘.”

    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빈손을 김우진이 보지 못하도록 테이블 아래로 내리며 강하게 움켜쥐었다.

    “나 안 힘들어, 김우진.”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힘들지 않았다. 이제는 권세현의 곁에 있어도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천사연이 권세현에게 유독 관심을 보이는 모습도 여전했지만… 이름만 들키지 않는다면 둘이 친해진다 해도 나와는 상관없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일부러 가볍게 대답했지만 김우진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이것 참, 이 정도로 신뢰가 없었다니. 좀 슬프네.

    “알았어. 네 말대로 이제 술은 그만 마실게. 그러니까 걱정은 그만하고… 콜록!”

    갑자기 터져 나온 기침에 김우진을 달래려던 말이 뚝 끊겼다. 콜록, 콜록! 쉬지 않고 터져 나오는 기침에 바 테이블을 손으로 짚은 채로 상체를 숙였다.

    “한이결!”

    숨 돌릴 틈도 없이 계속해서 기침이 나오자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져 왔다. 그제야 술기운에 가려졌던 오한이 온몸에 느껴졌다.

    “콜록, 으…….”

    “하, 한이결. 괜찮아? 많이 아파?”

    기침이 겨우 멎자 곧바로 현기증이 밀려왔다. 숙였던 상체를 세우지 못하는 내 모습에 새하얗게 질린 김우진이 급히 다가왔다.

    ‘차가워…….’

    이마에 닿아 오는 김우진의 손바닥이 너무나도 차가웠다. 아니, 내가 뜨거운 건가?

    나는 밀려오는 두통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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