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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39)화 (239/394)

239화

 밤이 늦어지자 어제만큼 많은 수의 손님이 다이스를 찾아왔다. 어제 왔던 사람이 또 찾아오기도 했다.

‘왜 손님이 모이는지 이해는 충분히 간다만.’

조명 아래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천사연과 우서혁, 권정한의 외모를 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결국 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서빙을 해야 했다. 7번 테이블로 술 서빙을 끝내고 혼잡한 1층 홀을 둘러봤다.

“와… 진짜 연예인 아니에요?”

“아깝다! 연예인 하면 떼돈 벌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여자 손님들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칭찬하자 천사연이 살짝 웃으며 들고 있던 안주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내가 살다 살다 천사연이 서빙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게다가 의외로 잘한단 말이지.’

그야 SS급이니까 서빙하다가 죄다 엎거나 접시를 깨 먹지는 않겠지만, 저 정도로 완벽하게 해낼 줄 예상도 못 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듣기로 팬서비스 같은 것도 제법 잘해 준다고 하던데. 비슷한 느낌인 건가?

서빙을 끝낸 천사연이 굽혔던 상체를 펴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넋 놓고 천사연만 보고 있던 나는 뒤늦게 고개를 휙 돌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리 바쁘게 움직이면서 일을 해도 집중이 조금도 되지 않았다. 내 신경은 온통 천사연과 권세현에게로 쏠려 있었다.

‘…무슨 대화를 하려는 걸까.’

권세현이 혹시라도 천사연한테 이름을 언급한다면… 아니, 미리 하지 말라고 해 뒀으니까 괜찮겠지만…….

이제껏 천사연 앞에서 ‘권세현’이라는 이름을 꺼낸 적 없긴 하지만, 박건호와 우서혁은 클럽 사건으로 이미 알고 있으니 안심할 수는 없었다. 특히 우서혁이 클럽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면서 가명으로 썼던 이름을 말했을 수도 있으니까.

천사연이 권세현에게 이름을 듣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다른 그 누구보다 천사연이 제일 위험했다. 그는 내가 한이결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일하게 눈치챈 사람이니까.

영업이 끝나 갈 때까지 계속해서 마음을 놓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재빨리 3층으로 올라갔다. 천사연이 곧 권세현을 찾아갈 테니 그 전에 당부라도 한 번 더 하기 위해서였다.

잔뜩 피곤한 얼굴을 하고 서류를 보고 있던 권세현이 사무실에 들어서는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뭐지?”

“그…….”

더는 버틸 수 없어서 올라왔지만 막상 권세현을 마주하자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입만 몇 번이고 벙긋거리던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진짜로… 천사연 만나실 겁니까?”

“만나겠다고 했으니 그래야지.”

“사장님, 그때 밤에도 설명했지만 이름은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기억하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하고 사장님 소리나 어떻게 하지?”

권세현의 무심한 목소리에도 불안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실 권세현보다는 천사연이 더 문제였다. 하필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천사연이라니.

“…알겠습니다. 절대로 저와의 거래를 잊지 마세요.”

뭐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는 권세현을 닦달해 봤자 상황이 좋아질 리 없다. 기세가 한풀 꺾인 채로 덧붙여 말하자 권세현이 눈가를 좁혔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미래에 대한 정보 지금 얘기해. 다시 올라오지 말고 바로 퇴근하면 되잖아.”

“…….”

여기 다시 오지 말라고? 나를 신경 써서 하는 소리라는 것을 머리로는 아는데도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가슴에 차올랐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참아 내며 미리 생각해 뒀던 정보를 뱉어 냈다.

“내일 고동주 씨, 출근하다가 넘어져서 가벼운 찰과상을 입을 겁니다. 비가 많이 올 거거든요.”

“뭐?”

“그게 다입니다. 조심하라고 전달 좀 해 주세요.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당황한 권세현을 내버려 두고 곧장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때마침 3층으로 올라오고 있는 천사연이 계단 아래로 보였다. 나는 닫힌 문을 등진 채로 천사연을 정면에서 마주했다.

내 앞에서 멈춰 선 천사연이 평소와 같은 태도로 입을 열었다.

“올라와 있었군. 우서혁 비서가 널 찾던데.”

“우서혁 씨가?”

“그래. 내려가 봐.”

“…….”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춤 물러섰다. 어쩐지 당장 문 앞에서 비키라는 듯이 들렸다. 아닌가? 이것도 그저 내 착각인가?

내가 못 박힌 듯 서서 비키지 않자 천사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대놓고 만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수십 번을 고민한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내가 생각하기에… 가게 주인은 만나지 않는 게 나아 보이는데.”

“어째서지? 저 남자에게서 이 공간을 빠져나갈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넌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서 저 사람을 만나려는 게 아니잖아.”

혹시 잘하면 천사연을 설득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가 가진 오해만 풀어낸다면 권세현에게 관심을 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나는 급히 덧붙였다.

“천사연, 여긴 어차피 만들어진 공간이잖아.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을 만나 봤자 아무 의미 없어.”

“흠.”

천사연이 묘한 표정으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만들어진 공간이라… 뭐, 그렇긴 하지.”

“그럼…….”

“하지만 그것 외에도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다. 아무리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이렇게 만나게 된 이상 현실과 다른 바 없는 것 같군.”

“…….”

“나로서도 이번 기회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터라.”

만들어진 가짜 권세현이라도… 실제로 만났으니 현실과 마찬가지라니.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천사연이 살짝 웃었다.

“왜. 질투라도 하나?”

질투. 그 단어가 심장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질투라고…….’

내가 권세현을…….

온몸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약한 현기증이 돌면서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토해 낼 것처럼 속이 심하게 매슥거렸다.

“한이결?”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챈 천사연이 내게 팔을 뻗었다. 손목을 잡아 오는 그 감각에 소름이 확 끼친 나는 진저리를 치며 천사연의 손을 뿌리쳤다.

“아… 이건, 그러니까…….”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식은땀이 흘렀다. 미간을 찌푸린 천사연의 얼굴이 마치 내 이상 행동을 의심하고 추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좀 놀라서…….”

안 돼… 이러면 안 된다. 별일 아니라는 의미를 담아서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얘기하고 와. 난 내려가서 우서혁 씨를 만날 테니까…….”

“한이결.”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뒷걸음질로 천사연과 거리를 벌린 나는 부름에 답하지 않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힘이 빠져서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1층까지 내려오자 뒷정리를 하고 있는 홀이 보였다. 뒤따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힘들다…….’

지나친 긴장으로 바싹 굳어 있던 어깨에서 옅은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몽롱한 정신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서혁 씨.”

바 테이블로 다가가자 깨끗하게 닦은 와인 잔을 진열하던 우서혁이 고개를 들었다. 김우진이 그랬듯, 우서혁도 밀려오는 손님을 감당하지 못한 박주원의 부탁에 주방을 빠져나와 바에서 일해야 했다.

김우진만큼 다양한 칵테일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박주원이 좋아했다.

“고생하셨어요. 권정한은 어디 갔나요?”

방금 있었던 일을 억지로 머리 한구석에 밀어내며 묻자 우서혁이 잠시간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2층 정리를 도우러 갔습니다.”

“그렇군요.”

내가 바 의자에 앉자 이번에는 우서혁이 질문을 건네 왔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좀 피곤하네요. 오늘 워낙 바빴잖아요.”

“확실히 손님이 많더군요.”

턱을 괴며 적당히 대답하자 우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뒤쪽에 따로 빼놨던 칵테일 잔을 내 앞에 놔 주었다.

“이건…….”

“일이 끝나고 나서 따로 만든 칵테일입니다. 맛보시겠습니까?”

다홍색으로 빛나는 칵테일은 과일 향이 희미하게 풍겼다. 어떤 칵테일인지 바로 알아챈 나는 잔을 들며 말했다.

“코스모폴리탄 칵테일 맞나요?”

“맞습니다.”

오늘 처음 만들었을 텐데 색이나 향이 완벽했다. 역시 우서혁인가?

“도수가 좀 높으니 무리해서 드실 필요는 없습니다.”

“겨우 한 잔인데요.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칵테일을 마시자 달콤한 액체가 혀에 닿아 왔다. 내가 편하게 마실 수 있도록 우서혁은 어떤 말도 걸지 않고 조용히 와인 잔을 정리했다.

차가운 술이 들어오니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던 머릿속이 조금은 맑아졌다. 이제야 객관적으로 상황을 따져 볼 수 있게 됐다. 나는 반절 정도 남은 칵테일 잔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사실… 천사연은 아무 문제 없다. 저런 장난을 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그건 권세현도 마찬가지였다.

문제가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정말 한심하네.’

휘둘리지 말자고 각오하고 왔는데도 결국 이 꼴이다. 뭐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조소가 절로 나왔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권세현을 우습게 여긴 건지.

이 공간에서 지낸 지 이제 고작 나흘이었다. 나는 고작 그 나흘 만에 밑바닥이 드러났다.

에드워드가 이 공간을 모두 파악하고 나갈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버틸 자신이 없었다. 나흘 만에 이 꼴이 됐는데, 한 달 뒤에는 대체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도…….’

버텨야겠지. 나 하나만 버티면 모두가 안전하게 나갈 수 있으니.

반절 정도 남은 칵테일을 모조리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번에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어느새 정리를 끝낸 우서혁이 내게 물었다. 나를 향한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럼요. 한 잔 정도는 괜찮다니까요.”

“…….”

빈 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 호텔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권세현을 만나고 있을 천사연도 대화가 끝나는 대로 내려올 테니 미리 옷을 갈아입고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두 분 다 일 끝나셨어요?”

마침 2층에 올라가 있던 권정한도 타이밍 좋게 내려왔다. 나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한 권정한이 이내 평소처럼 웃었다.

“이결 형, 오늘 힘드셨나 봐요.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그래?”

“하긴, 사람이 장난 아니게 많긴 하더라고요. 내일도 나오셔야 하는데 정말 괜찮겠어요?”

“당연히 괜찮지.”

목을 죄는 넥타이를 잡아 풀며 권정한에게 마주 웃어 줬다.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건지. 그래도 아까보다는 훨씬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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