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어제 저희끼리 먼저 얘기를 나눠 봤습니다만, 의견은 모두 같습니다. 수상한 점은 전혀 없었습니다.”
나갈 준비를 마친 천사연이 박건호의 보고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럼 정말로 일만 하다 온 건가?”
“장난 아니게 바쁘더라고요.”
능청스러운 대꾸에 천사연이 픽 웃었다.
어제는 하태헌과 박건호, 김우진과 함께 갔으니 오늘은 천사연과 우서혁, 권정한 차례였다. 출발을 앞둔 우리들을 지켜보던 에드워드가 미안한 얼굴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제가 빨리 나갈 방법을 발견해야 하는데…….”
“부담 갖지 마세요.”
이 공간이 얼마나 크고 복잡한지는 제작자가 아닌 우리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 곳을 공간 제어 능력자도 아닌 에드워드가 혼자서 파악해야 하는 상황이니 그가 미안해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계속 알아봐 주세요. 그거로도 충분합니다.”
“대화 끝났으면 바로 출발하지.”
나는 옆에 찰싹 달라붙은 채로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김우진의 머리를 두어 번 토닥이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박건호가 천사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스터.”
“말해.”
“한이결은 어제부터 상태가 불안하니 일하는 중간마다 확인이 필요할 듯합니다.”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나는 박건호를 돌아봤다. 설마 박건호가 저런 소리를 할 줄이야. 천사연도 나와 마찬가지로 꽤 의외였는지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이결 능력자를 그만큼 신경 쓰는 줄은 몰랐는데, 박건호 팀장.”
“뭐, 워낙 허약하니까요.”
박건호가 대답과 함께 보란 듯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그냥 놀리는 거였군.
“허약하지 않습니다. 어제는 그리고… 그냥 잠깐 피곤했던 거고요.”
하여튼 다들 눈치가 너무 빠르다. 표정 관리에 한 번 실패했다고 이렇게 계속 말이 나오는 걸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왔다.
어제… 하태헌과 대화하는 권세현의 모습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불편하게 느껴져서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하태헌을 보며 권세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던 터라 더 힘들었다.
“내 의견도 같다. 생각 같아선 호텔에서 쉬게 하고 싶다만.”
“한이결. 그냥 내가 하루 더 나갈게. 여기서 쉬어. 응?”
결국 하태헌과 김우진도 끼어들어서 한마디씩 얹기 시작했다. 이거 더 놔두다간 정말로 일하러 못 가겠는데. 나는 급히 천사연의 등을 꾹꾹 밀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보냈다.
“진짜 괜찮습니다. 다녀올 테니 다들 쉬고 계세요.”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걱정을 줄줄 읊어 낼 기세인 사람들을 뒤로하고 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내가 미는 대로 순순히 밀려난 우서혁이 입을 열었다.
“한이결 씨, 어딘가 아프면 꼭 말씀하셔야 합니다. 숨기면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럼요. 잘 알고 있습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는데도 우서혁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근심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다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웠지만 오늘만큼은 어쩔 수 없다. 천사연이 일하면서 권세현과 하루 종일 부딪힐 텐데, 그걸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내가 없는 자리에서 둘이 대화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오싹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 티 내지 말아야겠다.’
오늘 내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천사연과 권세현을 최대한 만나지 않도록 방해하는 것. 두 번째, 내가 권세현이라는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막는 것.
아무리 권세현이 만들어진 가짜라 해도… 당장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이상, 내 정체를 숨겨야 하는 건 당연했다. 두 가지 다 중요하니 조금이라도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다이스로 향했다.
***
“거참…….”
어제와 마찬가지로 옷을 갈아입은 우리 네 명이 줄지어 홀로 나오자 고동주가 복잡한 표정을 하고는 입가를 매만졌다.
“오늘도 겁나게 바쁘겠구만.”
“예?”
“별거 아니다. 일단 한이결… 이라고 했지? 넌 형님 만나러 3층 올라가고. 나머지 세 명은 어제 놈들과 같은 위치에서 일하면 될 것 같군.”
“오늘은 그 빨간 친구 안 오는 거야?”
환한 주황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목에 세모 모양의 타투를 새긴 남자가 고동주 뒤에서 불쑥 끼어들었다. 바텐더 중 한 명인 박주원이었다.
‘김우진이랑 좀 친해졌나?’
그렇지 않아도 어제 보니까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박주원은 27살이니까 김우진하고 어느 정도 말도 통할 나이였다. 그럼 친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긴 하지. 이 공간이 실제였다면 김우진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에 두 손 들고 환영했을 텐데, 아쉽네.
“김우진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럼 이 중에서는 칵테일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없는 거?”
그렇다고 대답하려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우서혁을 돌아봤다.
“우서혁 씨, 혹시 칵테일 만들 줄 아십니까?”
“커피는 만들 줄 압니다만, 칵테일은 다뤄 본 적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 넷 중에서는 우서혁이 바를 맡아 주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다. 천사연은 말할 것도 없고, 권정한도 워낙 도련님이라 이런 곳에서 일해 보는 건 처음일 테니까.
“오, 커피 좀 만져 봤으면 간단한 건 충분히 하겠네. 어차피 한 명은 우리 쪽 와 줘야 해. 어제처럼 밤에 손님 넘쳐 날 텐데, 우리 셋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거든.”
나와 같은 의견인 박주원이 눈을 반짝 빛내고는 우서혁의 어깨를 턱 잡으며 웃었다.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고 웃을 때마다 보이는 뾰족한 송곳니 때문에 유독 고양이 같은 인상이 들었다.
딱 봐도 우서혁이 한참 연상인데 반말이 참 자연스럽구나. 예전에도 느꼈지만, 박주원 저 자식은 내 위치가 더 높지 않았으면 나한테도 똑같이 반말했을 거다.
“그럼 이쪽 형씨는 주원이 따라서 가고. 나머지 두 명은 어제처럼 서빙이나 해라.”
심드렁한 말투로 명령한 고동주가 내게 자꾸만 위쪽을 가리키는 눈짓을 보냈다. 빨리 일하러 3층으로 올라가라는 뜻이었다.
간다, 간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오늘도 권세현 옆에 붙어 다녀야 한다니. 물론 좋은 점도 있지만,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무실 문을 두어 번 노크한 후에 안으로 들어가니 소파에 앉아서 테이블에 뭔가를 올려 두고 있는 권세현이 바로 보였다.
“마침 잘 왔네. 와서 앉아.”
“……?”
뭐지? 인사를 생략하고 맞은편 소파에 앉자 권세현이 그 앞으로 들고 있던 것을 쭉 밀어 줬다. 도시락이었다.
“먹어.”
“갑자기 웬 도시락입니까?”
“밥을 못 먹고 급하게 나와서 따로 배달시킨 건데, 다른 놈들은 다 먹었다잖아. 남은 거니까 네가 먹어.”
유난히 지친 목소리로 설명한 권세현이 젓가락을 들었다. 도시락을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피곤이 짙게 담겨 있었다.
그제야 어제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올랐다. 고동주가 배신자가 아니라는 내 말이 잠도 못 잘 정도로 혼란을 준 건가.
‘뭐… 이때의 나라면 그럴 만하지.’
그 마음이 이해가 가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나도 젓가락을 들었다. 도시락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편의점 도시락이었다.
그렇게 나와 권세현은 마주 앉아서 한마디 대화 없이 도시락을 먹었다. 계란말이를 입에 넣으며 식사를 하는 권세현의 모습을 살폈다.
요 며칠 사이에 이전보다 더 수척해진 권세현은 별로 입맛이 없는지 도시락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일 뿐, 맛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와 권세현은 비슷하게 도시락을 남겼다. 다만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모두와 함께 점심을 먹은 상태였으니 권세현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더 안 먹습니까?”
“됐어. 다 먹었으면 일어나.”
내 도시락까지 가져가서 봉지에 척척 넣어서 치운 권세현이 몸을 일으켰다.
“커피 사러 가자…….”
어제 내가 사 온 샷 세 번 추가한 아메리카노의 타격이 크긴 컸나 보다. 그는 피곤으로 살짝 처진 어깨를 하고선 1층으로 내려갔다.
“어? 형님, 어디 가십니까?”
“커피 사러.”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잠 좀 깰 겸 내가 갈게.”
깔끔한 거절에 쩝, 입맛을 다신 고동주가 권세현 몰래 나를 노려봤다. 따라가서 잘 도우라는 뜻이었다.
‘참, 저렇게 권세현을 좋아하는데…….’
그때는 그걸 알면서도 마음 편하게 믿기가 쉽지 않았다. 불면증과 함께 여러 불안 증세도 있었으니까…….
권세현도 지금은 혼란스럽겠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오히려 편해질 것이다. 자신의 곁에서 머무는 동생이 배신자가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으니 말이다.
고동주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권세현의 뒤를 쫓아 다이스를 나가려던 나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천사연을 발견했다.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는 내가 아닌 권세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
그걸 알아챈 순간, 마치 바늘에 찔린 것처럼 심장에 따끔한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워낙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이유조차 알 수가 없었다.
‘뭐지?’
고통이 있었던 가슴을 매만지며 권세현과 함께 어제 들렀던 카페로 향했다. 그때 봤던 직원이 웃음과 함께 인사를 보내왔다.
“어서 오세요.”
“바닐라 라테 둘 테이크아웃이요.”
당연히 본인 마실 것만 시킬 줄 알았던 나는 놀라서 카드를 꺼내는 권세현의 팔을 붙잡았다.
“저는 괜찮은데요.”
“왜? 어제는 잘만 마시더니.”
내게 잡힌 팔을 잠시간 내려다보던 권세현이 픽 웃고는 결제를 했다.
기어코 내 손에 바닐라 라테를 쥐여 준 권세현이 빨대를 물며 카페를 나섰다. 달달한 게 입에 들어오자 피로가 좀 가시는지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반대로 나는 갈수록 심란해져서 도저히 커피를 마실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이스로 돌아온 우리를 맞이한 건 천사연이었다. 아까 나갈 때부터 아예 기다리고 있었는지 홀 소파에 앉아 있던 천사연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권세현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다가왔다.
제 앞을 막아선 천사연의 행동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 권세현이 고개를 들었다.
“뭡니까?”
“잠깐 대화 좀 할 수 있나 해서. 둘이서만 따로.”
“대화는 무슨… 곧 오픈인데 일 안 합니까?”
성가신 기색이 잔뜩 담겨 있는 대답에도 천사연은 불쾌해하지 않으며 재차 물었다.
“그럼 영업 끝나고 나서는 시간 내줄 건가?”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 전까지 계속 치근덕거릴 기세에 권세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시간 목덜미를 쓸며 고민하던 그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10분 정도라면.”
“그 정도면 충분하군.”
권세현의 허락이 제법 기쁜지 천사연이 눈꼬리를 휘며 화사하게 웃었다.
“…….”
뒤에서 그걸 지켜보던 나는 심장 부근에서 또다시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에 멍하니 가슴을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