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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37)화 (237/394)
  • 237화

    60. 탐색전

    “사 왔습니다.”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채로 커피를 내밀자 권세현이 찝찝한 기색으로 받아 들었다.

    “하실 말씀 있습니까?”

    “아니.”

    모른 척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그럼 그렇지, 하고 보다가 빨대를 문 권세현이 얼마 가지 않아 얼굴을 확 찌푸리며 급히 입에서 떼어 냈다.

    “윽, 뭐야?”

    “무슨 문제라도?”

    “왜 이렇게 써?”

    “피곤해 보이셔서 아메리카노에 샷 세 번 추가했습니다.”

    “세 번 추가? 이 미친…….”

    한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질색하던 권세현이 내 손에 들려 있는 다른 커피를 발견했다.

    “그건 뭐지?”

    “아, 이거요? 제가 마실 바닐라 라테입니다. 마시고 싶어져서 사장님 카드로 주문했습니다. 괜찮으시죠?”

    “하…….”

    일부러 천진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권세현이 이마를 짚으며 실소를 흘렸다.

    “골 때리는 새끼네, 이거…….”

    “왜 욕을 하고 그러세요, 사장님.”

    “사장님이라고 부르지 마.”

    사장님 소리 싫어하는 거 다 알고 부르는 거다.

    “…고동주 불러와.”

    “예.”

    고동주는 아마 지금쯤이면 2층 룸 정리를 하고 있을 거다. 2층으로 내려가자 내 짐작대로 동생들과 함께 열심히 일하고 있는 고동주가 보였다.

    “사장님이 부르십니다.”

    “사장님? 아, 형님?”

    바닐라 라테를 쪽쪽 빨며 다가오는 나를 떨리는 눈동자로 응시하던 고동주가 내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근데 지금 뭘 마시고 있는 거냐?”

    “커피요.”

    “뭐? 누구 마음대로?”

    “사장님이 사 주신 겁니다.”

    “형님이 사 줬다고?”

    뻔뻔하게 대꾸하자 머쓱한 표정으로 쩝, 입맛을 다신 고동주가 3층으로 향했다.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이것 좀 마셔라.”

    “예?”

    고동주를 데리고 돌아오자 그새 몇 모금 더 마셨는지 권세현이 한층 더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는 아메리카노를 고동주에게 넘겼다. 감동한 것처럼 두 손으로 아메리카노를 건네받은 고동주가 빨대를 힘차게 쭉 빨았다.

    “우웩! 퉤퉤, 뭔데 이렇게 씁니까?”

    “샷을 세 번 추가했단다.”

    “세 번이요? 형님 쓴 거 마시지 않은 지 한참 되신 거 아니었습니까?”

    “몰라… 네가 다 마셔라.”

    나는 고동주에게 아메리카노를 넘기는 권세현을 구경하면서 달달한 바닐라 라테를 바닥까지 빨아 마셨다.

    기가 막힌다는 권세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싹 무시했다. 그러게 누가 나한테 커피 심부름시키래?

    ***

    밤 8시를 넘어가자 가게 내부에 사람이 제법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이, 신입. 이거 8번 테이블. 그리고 이건 11번.”

    서빙을 끝내고 바로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서빙거리가 밀려들었다. 별다른 불평 없이 칵테일을 트레이에 옮기던 하태헌은 어느새 주방에서 빠져나와 바 테이블에서 칵테일을 만들고 있는 김우진을 발견했다.

    “이야, 진짜 잘하네. 다음에는 이거도 만들어 보자.”

    옆에 찰싹 붙은 바텐더의 말에 김우진이 묵묵히 손을 움직였다. 짚어 내는 것마다 척척 만들어 내는 김우진이 제법 예뻐 보이는지 바텐더는 만면에 미소가 한가득했다.

    “칵테일 처음 만들어 보는 게 진짜야? 요리 좀 잘한다고 이것까지 잘하기 쉽지 않은데.”

    “…….”

    입 한 번 열지 않는 김우진의 모습에도 바텐더는 신경 쓰지 않고 꿋꿋하게 질문을 던져 댔다. 일 못해서 한 소리 듣는 것보다는 나은 거겠지. 하태헌은 서빙을 마저 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까부터 봤는데… 혹시 여자 친구 있어요?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있습니다.”

    “아쉬워라. 그래도 저 꽤 괜찮지 않아요? 혹시 나중에라도 마음 바뀌면 편하게 연락해요.”

    여자가 내미는 명함을 받아 챙긴 하태헌은 등을 돌리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명함은 나중에 버릴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도 오랜만이군.’

    능력자로 각성하기 전에는 자주 겪었던 일이다. 그러고 보면 서빙 자체가 굉장히 간만이었다.

    능력자도 게이트도 없는 세상이라. 새삼 이곳이 낯설게 느껴졌다.

    “크흠. 저…….”

    서빙을 마치고 돌아온 하태헌에게로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 가게의 주인 남자였다. 뒤에는 한이결도 함께였다.

    하태헌이 돌아보자 남자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일은 좀 어떻습니까? 할 만합니까?”

    평소라면 그대로 무시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그는 무뚝뚝하게나마 대답했다.

    “할 만합니다.”

    “아, 음.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설마 이런 소리를 할 거라고는 예상 못 한 하태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을 편하게 하라니.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반말을 원한다고?

    하태헌이 대답 없이 바라만 보자 남자가 살짝 당황하며 말을 덧붙였다.

    “그…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어차피 하태헌 씨… 는 평범하게 고용된 분이 아니니 저를 편하게 대해도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존대도 편하니 이대로 하겠습니다.”

    깔끔한 거절에 남자가 머쓱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

    그 모습을 본 하태헌은 어딘가 기시감을 느꼈지만 이내 관심을 남자 뒤에 서 있는 한이결에게로 옮겼다. 생판 남한테서 기시감이 느껴지든 말든, 그보다는 창백한 안색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한이결이 더 중요했다.

    “한이결, 어디 아픈가?”

    “예?”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안색이 저렇게 삽시간에 나빠진 걸 보면 아파도 단단히 아픈 게 틀림없었다. 놀란 권세현을 지나쳐서 한이결에게 성큼 다가간 하태헌이 이마에 손을 올렸다.

    “감기 기운인가? 열은 없군.”

    “아뇨, 저 괜찮…….”

    “한이결, 아파?”

    이 먼 거리에서 어떻게 들었는지 김우진이 후다닥 뛰어왔다. 마침 서빙을 하고 돌아온 박건호도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한이결이 아프다고?”

    “아닙니다. 저 괜찮습니다.”

    “안색이 안 좋다.”

    “흠, 확실히 평소보다 더 하얗긴 하군.”

    “약 사 올까?”

    “아니, 됐어. 저 괜찮다고요.”

    그들의 말처럼 권세현의 눈에도 한이결의 안색은 나빠 보였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뻗어 오는 손들을 파바박 쳐 낸 한이결이 시들시들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명 때문에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그보다 일하는 와중에 이렇게 농땡이를 부리면 어떡해요?”

    “농땡이라니? 그냥 잠깐 쉬는 거지. 아니, 사장님 아닙니까?”

    장난스럽게 대답한 박건호가 뒤늦게 권세현을 발견한 척 능청스러운 인사를 보내왔다. 얼떨결에 그 악수를 받아 낸 권세현이 급히 손을 떼어 내며 말문을 열었다.

    “사장님보다는 관리인으로 불러 주십시오. 휴식이 필요하면 지금 쉬시면 됩니다. 이따 새벽에는 사람이 많아서 더 바쁠 테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 우리 이결이 10분 정도만 빌려 가겠습니다.”

    “예? 잠깐만……!”

    씩 웃은 박건호가 한이결을 데리고 탈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김우진과 하태헌이 간식에 홀린 강아지처럼 졸졸 쫓았다.

    그 웃지 못할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는 권세현의 곁으로 고동주가 걸어왔다.

    “형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이번에 들어온 신입들 쉬라고 했으니까 10분 정도 뒤에 복귀시켜.”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따 새벽까지 버티려면 애들 다 휴식이 필요하던 참이었습니다. 다른 때보다 손님이 좀 많아서요.”

    “얼마나 많은데?”

    “대충 1.5배 정도입니다. 동생 놈들한테 물어보니까 SNS에 소문이 퍼졌다고 하더군요. 새벽에는 더 몰릴 것 같습니다.”

    “술 부족하지 않게 미리 준비해 놔.”

    “예.”

    아까까지 한이결이 서 있던 부근을 잠시간 응시하던 권세현이 곧 몸을 돌렸다. 정신없이 바쁜 밤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생각보다 힘들군.”

    “이거라도 좀 마시세요.”

    새벽 5시가 넘어간 늦은 시각, 가득 들어차 있던 손님이 빠져나간 가게 내부는 아직 식지 않은 열기가 감돌았다. 나는 고동주가 마시라고 꺼내 준 탄산수 한 병을 박건호에게 넘겨주며 어수선한 홀을 살폈다.

    ‘원래 이렇게 많지는 않은데. 뭐지?’

    내 기억보다 적어도 2배는 많은 숫자라 좀 놀랐다. 나중에 가서는 일손이 너무 부족해서 나도 껴서 서빙해야 할 정도였다.

    “한이결…….”

    “고생했어.”

    지친 기색이 가득한 채로 걸어오는 김우진을 반기며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줬다.

    “단순히 힘쓰는 일이면 이 정도로 피곤하진 않을 것 같은데.”

    “어느 정도는 사람을 상대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런 일 처음 아닙니까? 힘드실 만하죠.”

    첫날이라 안 그래도 힘들 텐데 손님까지 어마어마하게 많았으니 아무리 능력자라 해도 정신적으로 지칠 만했다. 특히 주방에서 바로 끌려 나와 바텐더의 조수로 일했던 김우진은 더 힘들었을 거고.

    “신입들, 첫날부터 욕봤다.”

    차가운 탄산수를 더 꺼내 와서 하태헌에게 내민 고동주가 아까보다 훨씬 유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쟁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나니 경계심이 조금은 옅어진 모양이다.

    “이제 뒷정리만 하면 끝이니 조금만 더 힘내고. 거기 쪼그만 놈은 형님이 찾으니 3층으로 가 봐라.”

    쪼그만 놈이래…. 이 중에서 키가 제일 작은 나는 반박 한 번 못 해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지고 보면 한이결도 그렇게 작은 건 아닌데. 다른 놈들이 쓸데없이 큰 거잖아.

    속으로 한탄을 늘어놓으며 사무실로 들어가자 창문 앞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권세현의 모습이 눈에 박혀 들어왔다. 팔짱을 낀 채로 서 있는 권세현의 얼굴 위로 새파란 새벽빛이 옅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걸어가 곁에 멈춰 섰다.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천천히 시선을 내게로 돌린 권세현이 날 향해 입을 열었다.

    “그때 옥상에서 보여 준 하늘을 나는 힘… 그게 바람 능력인가?”

    그것만으로도 권세현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바람 능력 맞습니다.”

    “아무 제한 없이 쓸 수 있는 건가?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바로 날아간다거나.”

    “예. 가능합니다.”

    깔끔한 답변에 쓰게 웃은 권세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부럽네…….”

    그걸 듣자마자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차마 뱉어 내지 못하고 힘겹게 목구멍 너머로 삼켜 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권세현이 이어 얘기했다.

    “영업시간도 끝났으니 오늘 치 거래도 마무리 짓지.”

    “…….”

    “미래에 대한 정보 한 가지. 지금 말해.”

    충분히 각오했는데도 막상 이 순간이 닥쳐오니 망설임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다.

    느리게 고개를 든 나는 곧 답을 꺼냈다.

    “고동주는 배신하지 않습니다.”

    새벽 그림자에 물들어 더욱 새까매진 권세현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당신이 찾는 배신자는 고동주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아랫놈들 이름을 매일같이 하나씩 뱉어 내려고?”

    “설마요.”

    쓸데없이 떠보기는. 나를 의심하는 거야 충분히 이해되기는 하다만. 나는 비죽 튀어나오는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쪽이 생각하고 있는 네 명 중에서 한 명을 짚어 준 겁니다.”

    “…내가 생각한 네 명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고? 이것도 ‘미래의 정보’에 포함되는 내용인 건가?”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오늘 치 정보는 이게 끝입니다.”

    딱 잘라 선을 긋자 권세현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제 곁에 남아 준 고동주가 배신자가 아니라는 기쁨과 남은 세 명이 배신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구잡이로 뒤섞이고 있겠지.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권세현도 떠나가는 나를 그저 바라볼 뿐, 붙잡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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