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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35)화 (235/394)

235화

  

옷과 생필품을 사러 나간 박건호와 우서혁, 권정한이 포장해 온 도시락과 샌드위치로 늦은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일정을 정리하기 위해 방에 모였다.

“이곳은 아무래도 한국 강남인 것 같습니다.”

우서혁이 따로 챙겨 온 팸플릿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주변 관광지가 나와 있는 정보 팸플릿이었다.

“근처에 강남역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가져온 팸플릿입니다.”

팸플릿을 살펴보는 천사연을 향해 박건호가 입을 열었다.

“현실 세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군데군데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긴 능력자를 단 한 명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능력자가 없다고요?”

흥미로운 표정으로 팸플릿을 뒤적이던 민아린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네. 강남역이라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제법 많은데도 능력자는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능력자가 없는 세계라…….”

권정한의 대답에 하태헌이 복잡한 낯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그럼 섣불리 능력을 사용할 수는 없겠군. 쓸데없는 소란만 일으킬 테니.”

“하태헌 부마스터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최대한 조용히 지내면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 게 좋아 보입니다.”

팸플릿을 접어서 대충 테이블에 던져 놓은 천사연이 턱을 괴며 말했다.

“에드워드는 호텔에 남아서 능력으로 공간을 파악하도록. 민아린 힐러가 곁에 있어 주고.”

“다른 분들은 어제 들렀던 그 술집에 다시 가 보시는 건가요?”

“가 보는 것뿐만 아니라 최대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을 예정이다.”

“으음, 확실히 마스터 말씀대로 거기 말고는 수상해 보이는 곳이 없긴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능력으로 열심히 나갈 방법을 찾아볼게요!”

나는 민아린과 에드워드를 바라보다가 여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우야.”

피익?

테이블 위에서 팸플릿을 손으로 툭툭 치던 여우가 내 부름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에드워드 씨와 민아린 씨 곁에 남아 있어.”

픽!

능력자나 몬스터가 없는 이쪽 세상에서 아무리 투명화를 할 수 있다 해도 여우를 데리고 다니는 건 무리였다. 차라리 에드워드와 민아린에게 맡겨 놓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여우만으로는 좀 불안한데. 공격형 능력자를 한 명 두고 가는 게 어떻습니까?”

“그럼 제가 남겠습니다.”

박건호의 제안에 우서혁이 나섰다. 잠시간 여러 가능성을 따져 본 천사연이 허락했다.

그렇게 에드워드와 민아린, 우서혁, 여우는 호텔에 남고 남은 사람들은 권세현의 가게인 다이스를 다시 한번 더 가는 것으로 결정됐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먹구름이 낀 흐린 하늘이 유독 눈에 박혀 들었다.

***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다시 가게를 찾아간 우리는 마침 문 앞에 서 있는 고동주를 만날 수 있었다. 맞은편에서 당당하게 걸어오는 우리를 본 고동주가 처음에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간을 험악하게 구겼다.

“이 새끼들이 면상에 철판을 깔았나. 여기가 어디라고 또 발을 들이밀어? 안 꺼져?”

고동주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며 주먹을 쥐었다. 워낙에 덩치가 있어서 그런지 커다란 주먹이 한이결 얼굴만 했다.

‘그래 봤자…….’

그가 제 아내를 끔찍이 아끼는 심성 착한 녀석이라는 것을 아는 내게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고동주가 마치 변태를 만난 사람처럼 질색했다. 너무하네, 정말.

“여기 주인분을 만나러 왔는데 안내 좀 해 주실 수 있습니까?”

“뭐? 네깟 놈들이 감히 우리 형님을…….”

“고동주.”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고동주의 뒤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을 듣고 내려온 권세현이었다.

그의 눈 밑에 깔린 짙은 다크서클과 어제보다 거칠어진 피부를 확인한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한숨도 못 잤나 보네.’

그럴 만하지. 갑작스럽게 나타난 우리의 존재가 불안하면서도 궁금했을 테니까.

“…….”

“…….”

나와 마찬가지로 내 모습을 살핀 권세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서로를 마주 보는 상태로 잠깐 동안 시선을 맞춘 우리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들어오십시오.”

“예? 혀, 형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홀 정리 마저 하고 있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권세현을 바라보는 고동주를 뒤로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권세현의 뒤를 쫓아 3층으로 올라갔다.

와인바와 오픈형 테이블이 배치된 1층, 룸이 주를 이루는 2층과는 달리 3층은 개인 사무실과 응접실이 마련되어 있다.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한 권세현이 정장 재킷 단추를 풀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앉으시죠.”

나는 일부러 중앙 자리는 천사연에게 넘겨주고 가장 끝에 앉았다. 불편함이 느껴지는 낯으로 우리를 둘러본 권세현이 먼저 침묵을 끊어 냈다.

“여길 다시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곧장 본론으로 넘어가는 권세현의 태도에 천사연이 입꼬리를 가볍게 끌어 올렸다.

“자기소개할 틈도 안 주는 건가?”

“거짓 없이 솔직하게 소개할 것 같지 않은데요.”

“이름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용건부터 듣겠습니다. 소개는 그다음 문제고.”

개수작을 깔끔하게 쳐 낸 권세현을 미소를 지은 채로 응시하던 천사연이 곧 대답했다.

“우리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하는데.”

“이곳이라면… 여기 다이스 말입니까?”

“찾아야 하는 게 있어서. 최대한 피해는 안 가게 하지.”

다소 뻔뻔하게 느껴지는 제안을 들은 권세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뜻인지?”

“말 그대로다. 뭘 시키든 상관없으니 이곳에 있게 해 주면 좋겠군.”

“…….”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이 미친놈은 뭐야?’ 하는 표정을 짓는 권세현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방법을 선택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명을 왜 저렇게 이상하게 하는 거지? 오늘따라 천사연의 상태도 영 좋지 않은 것 같다.

어젯밤에 권세현과 미리 거래해 놔서 천만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다.

“흐음…….”

눈가를 찌푸린 채로 소파에 등을 기댄 권세현이 팔짱을 꼈다. 복잡한 얼굴로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알겠습니다. 그쪽이 말한 대로 여기서 일하십시오. 하지만 대신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뭐지?”

“당신들이 원했으니 일을 한다 해도 제가 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당신들의 기본 정보를 알려 주십시오.”

“나쁘지 않군.”

“마지막으로 나이가 어떻든 당신들은 신입이니, 우리 직원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든 저는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소란이 생기거나 직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오면 그 사람은 바로 출입을 금지할 거고.”

설명을 끝낸 권세현이 턱을 살짝 치켜든 채로 천사연을 쳐다봤다.

“이래도 하실 겁니까?”

“그 정도 조건이라면 당연히 해야지. 여기 주인은 마음씨가 참 착하군.”

“…….”

천연덕스러운 천사연을 향해 권세현이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지켜보던 나는 갈수록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나도 이제껏 천사연이랑 대화할 때마다 생각이 저렇게 얼굴에 다 드러났나?’

지금 눈앞에 있는 권세현이 내 과거나 마찬가지라서 더 신경 쓰였다. 앞으로는 표정 관리 좀 해야겠다.

“일은 내일부터 시작하십시오. 직원들에게 미리 설명도 해 놔야 하니까. 그리고 사람 수는 네 명이면 충분합니다.”

“네 명이라. 그럼 돌아가면서 일해야겠군.”

“뭐… 세 명은 알아서들 하시고.”

심드렁히 대꾸한 권세현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응접실에 들어와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나를 바라보는 그 행동에 불길한 예감이 느껴졌다.

“그쪽은 고정으로 매일 나오시죠.”

나를 겨냥한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나와 권세현에게로 모여들었다. 그 상황에서 권세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음을 지었다.

‘이 새끼가…….’

최대한 엮이고 싶지 않다는 내 생각을 알아채고 고의로 저딴 제안을 꺼낸 게 틀림없었다.

다른 상대였으면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무시했겠지만, 권세현이라 그런지 그 어느 때보다 불쾌한 감정과 짜증이 확 치솟았다.

“잠깐, 한 명이 고정으로 필요한 거라면 내가…….”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나를 보호하려는 하태헌의 말을 중간에 끊어 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굳이 저를 지목하신 이유가 있으시겠죠. 조건을 받아들인 건 저희니까 불만 없이 따르겠습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는데도 울컥거리는 속을 삼켜 내기가 쉽지 않았다.

뾰족한 가시가 돋아난 내 얘기에 권세현도 미소를 띤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 일을 도와줄 보조 한 명이 필요했는데 당신이 제격으로 보여서 말입니다. 불만 없이 따르겠다는 각오도 마음에 듭니다.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할지 기대되네요.”

“저야말로 과연 무슨 일을 시키실지 벌써 궁금합니다. 내일부터라고 했습니까? 당장 오늘이라도 할 수 있는데 아쉽게 됐네요.”

“아쉽다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을 시작하면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게 해 줄 테니까.”

권세현과 말을 주고받으면 받을수록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권세현도 딱히 사정이 다르지는 않은지 입은 웃고 있어도 검은 눈동자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기분 나쁜 새끼. 과거에 사는 멍청한 가짜 주제에 쓸데없이 자존심만 세우는 놈. 권세현을 향한 짙은 혐오감이 가득히 차올랐다.

‘…역시 하루라도 빨리 이 공간을 빠져나가야겠어.’

이성을 잃고 감정을 쏟아 낸 결과는 지독한 피로와 두통으로 돌아왔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겨우 삼켜 낸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무시하자 옅은 숨을 내쉰 권세현이 아까보다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인 정보를 적을 서류를 바로 준비하도록 하죠. 일할 때 필요한 유니폼을 준비해야 하니 옷 사이즈도 추가로 적으십시오.”

묘한 눈으로 나를 보던 천사연이 권세현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러지.”

그 외에도 자잘한 사항을 정하기 위해 대화를 나누는 천사연과 권세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가고 싶어…….’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감각에 집중하니 불안한 감정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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