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권세현의 가게, 다이스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호텔로 들어온 우리는 2인실 셋과 3인실 하나를 빌렸다.
천사연과 우서혁, 권정한과 박건호가 같은 방을 쓰고 나와 김우진, 하태헌이 3인실을 쓰게 됐다. 민아린은 에드워드와 같은 방을 쓰는 대신에 위험할 수도 있으니 여우를 함께 보내기로 했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어쩔 수 없지만, 내일부터는 뭐라도 해야 할 텐데. 일이 복잡하게 됐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우리는 그나마 가장 큰 3인실 방으로 다 같이 모였다. 박건호의 말에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권정한이 시선을 들었다.
“핸드폰을 포함해서 모든 전자 기기가 먹통입니다. 마치 게이트 내부로 들어온 것 같아요.”
“그래도 능력은 제대로 쓸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능력까지 쓸 수 없었으면 훨씬 더 위험했을 테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에드워드를 바라봤다. 초점 없이 빛 가루가 가득한 눈동자를 하고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던 에드워드가 이내 능력을 중단했다.
“일단 정신만 건드리는 환각 종류는 아니에요.”
“그럼 이 호텔이나… 밖에 보이는 모든 게 다 실체가 있는 겁니까?”
“그렇죠. 현실과 큰 차이점은 없어요. 하지만 만들어진 공간이니까 바깥과 시간의 흐름은 분명 다를 거예요. 쉽게 말하자면… 이곳에서 하루가 바깥은 1시간일 수도 있어요.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고요.”
설명을 들은 하태헌이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현실 시간보다 빠르게 흐른다면 상관없지만 반대라면 일이 복잡해지겠군.”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일단 처음 왔던 장소로 다시 가 보는 게 좋아 보이는군.”
“아까 그 술집 말입니까?”
“그래. 처음부터 그곳에 도착한 이유가 있을 테니.”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나온 제안에 나는 가만히 천사연을 바라봤다. 그야 어떠한 단서도 없는 이 상황에서는 처음 도착한 장소부터 살펴봐야 하는 건 맞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네.’
천사연은 지금 권세현을 다시 한번 더 만나 보고 싶은 게 분명했다. 그래 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텐데.
나는… 권세현은 천사연을 모른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의 천사연은 모른다. 그가 아는 건 ‘어비스’ 안에 살아가는 천사연밖에 없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천사연이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건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천사연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이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권세현을 만나야 한다. 내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까 그렇게 쫓겨났는데 찾아간다 해도 반겨 줄지 모르겠네요.”
“흐음, 잘 구슬리면 들여보내 줄지도?”
“그럼 팀장님만 믿겠습니다.”
“우서혁. 내일 아침에 근처 가게로 가서 옷과 간단한 생필품을 사 오도록. 혼자서는 위험할 수 있으니 지금 떠드는 박건호와 권정한과 함께 다녀오면 되겠군.”
“알겠습니다.”
일정을 정리하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앉아 있는 내게 여우가 날아와 안겼다. 피익, 내 눈치를 살피는 여우의 등을 쓰다듬어 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밤을 밝히는 야경 불빛이 곳곳에 반짝거렸다. 그걸 내려다보는 내 기분은 끝도 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
적막이 내려앉은 방 안에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뜬 나는 협탁 위에 놓여 있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3시를 훌쩍 넘긴 새벽이었다.
조용히 상체를 일으켜서 옆을 돌아봤다. 오른편 침대에는 김우진이, 왼편 침대에는 하태헌이 평온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어제 여러 일이 있었던 데다가 시간도 늦었으니 둘 다 푹 잠들었을 거다.
최대한 소음이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겉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호텔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바로 옆 골목으로 가서 기운을 끌어 올려 높게 날아올랐다.
김우진이나 하태헌이 내 부재를 알아채기 전에 일을 해결하고 돌아가야 한다. 바람의 강도를 키워서 속도를 높이자 다이스에 금방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니…….’
건물 옥상 난간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권세현이 옥상에 올라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영업은 아침까지 계속할 테니 그사이에 한 번쯤은 오겠지.
약간 서늘함이 깃든 밤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들자 새하얀 초승달이 떠 있는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 보면 여기서 야경을 바라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예전에는 하루에 몇 번이고 올라와서 구경하고는 했는데. 문득 떠오른 과거에 씁쓸한 미소가 나왔다.
“……닙니다. 예.”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옥상 문 너머에서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인기척과 함께 권세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컹. 문이 열리며 옥상으로 막 들어선 권세현이 시선을 들었다. 난간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그가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이내 찌푸린다.
“…아뇨, 아닙니다. 예. 끊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정장 안주머니에 넣는 권세현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
천연스럽게 나온 인사에 권세현이 아무 답 없이 나를 노려봤다. 내 곁으로 조금도 다가오지 않고 못 박힌 듯 서 있는 모습에서 경계심이 짙게 흘러나왔다.
“그렇게 보지 말지. 날 알고 있잖아. 아까 만나기도 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였다. 픽 웃으며 한 말에 권세현이 낮은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올라온 거지?”
“옥상 올라오는 것쯤이야 쉽지.”
나는 다시 한번 더 기운을 끌어 올렸다. 후웅, 바람이 몸을 휘감으며 가볍게 공중으로 띄웠다. 내가 위로 날아오르자 권세현이 놀란 얼굴을 하고선 뒤로 주춤 물러섰다.
“권세현.”
그런 권세현을 향해 빠르게 날아간 나는 거리를 바싹 좁히며 입을 열었다.
“나와 거래를 하나 하지.”
“……거래?”
바람을 없애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자 나보다 훌쩍 큰 권세현의 체격이 느껴졌다. 하긴, 한이결보다 6cm는 크니까 이 정도 차이는 나겠네.
권세현을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불쾌감과 어찌할 수 없는 질투심에 기분이 복잡하게 엉켰다. 나로서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아까 만났던 사람들 기억하나? 이따가 날이 밝으면 당신을 찾아올 거야. 물론 나도 함께.”
“…….”
“권세현이라는 이름을 숨기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줬으면 해.”
“원하는 것을 들어 달라고?”
“그래. 아마 그건…….”
나는 목소리를 조금 낮춰서 권세현에게 내일 벌어질 일을 미리 설명해 줬다. 침착하게 내 얘기를 들은 그가 잠시간의 침묵 끝에 말문을 열었다.
“거래라고 했으니.”
차분하게 내 제안을 듣던 권세현이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게 줘야 할 텐데. 그쪽이 내게 뭘 줄 수 있다는 거지?”
얼핏 들으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도 어느 정도 내 제안에 흥미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반응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정보.”
“정보?”
“그쪽이 필요한 정보. 좀 더 제대로 말하자면 미래에 대한 정보겠지.”
“미래?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거짓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 거고.”
뻔뻔하게 대답하자 권세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우리가 신경 쓰이잖아. 아까 그렇게 보내고 나서 아랫사람에게 뒷조사를 시킨 것도 다 알고 있어.”
짜증스러운 감정이 내비치는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이제는 권세현도 나로 인해서 깊은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그 편이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내가 권세현이고, 권세현이 나인 이상 우리는 결코 서로를 좋아할 수 없다.
“거슬리는 상대일수록 곁에 두는 편이 안전하다… 그렇게 배웠을 텐데.”
조용히 덧붙인 말을 들은 권세현의 얼굴이 무서울 만큼 차갑게 굳었다. 자신의 약한 부분을 망설임 없이 파고들어 아프게 찌르는 내 행동이 엄청나게 거슬릴 것이다.
“잘 고민해 봐. 어느 걸 선택해야 이득일지.”
“…….”
“지금 있었던 일은 너만 알고 있도록 하고.”
복잡한 눈으로 입을 다문 권세현을 뒤로하고 하늘로 높이 떠오른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장 호텔로 날아갔다. 인적이 닿지 않는 호텔 뒤쪽 어두운 골목길로 내려오자마자 온몸에 힘이 탁 풀리며 지친 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벽에 등을 기댔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처럼 속이 마구잡이로 뒤틀리고 매슥거렸다.
-가장 끔찍한 순간이 재현될 것이다.
그러네. 확실히 가장 끔찍한 과거의 순간이 맞다.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지친 몸으로 호텔로 돌아갔다.
늦은 시간인 탓에 정적이 내려앉은 복도를 지나 방으로 돌아오자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잠들어 있는 김우진과 하태헌이 보였다. 다행이다. 깨기 전에 잘 갔다 왔군.
해야 할 일을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에 피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히 외투를 벗은 나는 살금살금 침대로 걸어가 몸을 뉘었다. 협탁에 놓인 시계는 아침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권세현은…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지.’
거절할 확률은 극히 낮았다. ‘어비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한이결이 가진 바람 능력까지 대놓고 보여 줬으니 거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 대가로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일을 말해 줘야 하지만…….
‘어차피 여기 있는 권세현은 공간이 만들어 낸 가짜다.’
그러니 권세현이 미래를 알게 된다 해도 문제없었다. 실제로 있었던 이 순간은 이미 오래전에 끝나 버렸으니까.
흔들리는 마음을 억지로 다잡으며 두 눈을 꾹 감았다. 복잡한 머릿속과 달리 오랜 시간 깨어 있던 몸은 찾아온 휴식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덮쳐 오는 강한 수마에 흐려진 의식 사이로 누군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이불을 끌어와 몸을 덮어 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