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59. 권세현
나는 그제야 이 공간에 들어오기 직전에 들려온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가장 강한 이의 가장 끔찍한 순간이 재현될 것이다.
가장 강한 이의 가장 끔찍한 순간.
다른 사람들은 아직 모르지만 나는 내 진짜 능력을 알고 있다. SS급보다 더 강한 등급 외 능력자. 그게 나였다.
‘그렇다는 건 결국…….’
내 지난 생에서 가장 끔찍한 순간이 이 공간에 재현됐다는 건가. 그래서… 권세현이 내 눈앞에 나타난 거고?
빠르게 머리를 굴려서 어떻게 된 일인지 최대한 파악했지만, 무섭도록 쿵쿵거리는 가슴은 여전했다.
완벽히 똑같은 나 자신을 갑자기 마주하게 될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여기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떡하죠?”
“일반인들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데. 일이 복잡해졌군.”
뒤에서 민아린과 박건호가 작은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나는 입 안을 강하게 짓씹어서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흐릿한 머릿속이 조금은 선명해졌다.
‘넋 놓고 서 있을 때가 아니다.’
최대한 빨리 여기서 벗어나자. 그래야 한다.
“저희는…….”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권세현을 상대하기 위해 내가 막 앞장서려던 그때였다. 어딘가 멍한 얼굴로 나… 그러니까, 권세현을 응시하던 천사연이 갑자기 그의 손목을 잡았다.
“뭡니까?”
대뜸 자신의 손목을 잡아 오는 천사연의 행동에 권세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스터, 아는 사람입니까?”
“……아마.”
우서혁의 질문에 짤막하게 대답하는 천사연은 본인조차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권세현이 눈가를 좁히고 천사연을 노려보며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
“뭐야, 형님 손님이셨습니까?”
“아니. 모르는 놈들이다.”
당혹스러운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체 왜 천사연이 권세현을 붙잡은 건지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싸늘한 얼굴로 지켜보던 하태헌이 나를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군. 천사연 마스터.”
“천사연……?”
하태헌의 말을 들은 권세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알아챈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어비스 때문에…….’
권세현은 우리들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는데. 큰일 났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황급히 동의했다.
“맞습니다. 일단 나가죠. 함부로 들어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억지로 활짝 미소 지으며 문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권세현 뒤에 있던 놈들이 험악한 인상으로 나를 막아섰다.
“이봐. 어딜 은근슬쩍 빠져나가려고?”
“그…….”
다른 사람 같았으면 진작에 겁을 집어먹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조금의 타격도 없었다.
“한이결, 뒤로 물러나 있어라.”
오히려 하태헌의 심기만 거스르게 된 꼴이 됐다. 하태헌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을 들은 권세현의 시선이 이번에는 내게로 향했다. 난감한 마음에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맞아요, 이결 씨. 이리로 와요.”
“하태헌 부마스터와 마스터께 맡기고 어린 친구들은 빠져 있는 게 낫겠군.”
“하태헌……?”
결국 하태헌이라는 이름까지 듣게 된 권세현이 눈을 크게 떴다. 진짜 미치겠네.
‘제발 이름 좀 그만 불러…….’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권세현의 반응을 살폈다. 몇 번이고 천사연과 하태헌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는 이내 복잡한 표정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형님, 어떡할까요?”
“지원 요청을 하고 지하로 보내는 게…….”
동생 녀석들이 권세현에게 바싹 붙어서 귓속말을 나눴지만, 능력자인 우리에게는 그 내용이 무리 없이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권세현이 내릴 결정을 짐작했다.
“아니.”
고민을 끝낸 권세현이 입을 열었다.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내보내.”
“예? 하지만 형님.”
“딱 봐도 이쪽 놈들이 아닌데 괜히 붙잡아 둬 봤자 성가시기만 하겠지. 지금은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 쏟을 시간 없어.”
“그렇긴 합니다만…….”
“고동주, 난 가 볼 테니까 네가 책임지고 내보내고 룸 정리해.”
“예. 알겠습니다.”
“…….”
정말로 똑같구나.
나와 같은 판단을 하고 내가 떠올린 말을 그대로 뱉어 내는 권세현의 행동을 두 눈으로 확인하니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저 겉모습만 같은 게 아니다. 저건 진짜로 ‘나’였다. 솟구치는 불쾌한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표정을 숨기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쯧, 조용히 나와. 헛짓거리하지 말고.”
그냥 보내라는 명령에 입구를 막아서던 녀석들이 그제야 자리를 비켜 줬다. 룸을 나선 우리는 그대로 건물 밖으로 내쫓겼다.
“다신 근처도 얼쩡거리지 마라!”
파리를 내쫓듯 손을 휘휘 내저은 고동주가 정문을 쾅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위로 ‘Dies’라는 이름이 적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짐짝처럼 길거리에 내던져진 우리는 난감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일단은 건물이나 사람들을 보아 한국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건너편에 보이는 버스 정류장에 걸린 광고판을 본 권정한의 말에 우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누군가 말했습니다. 가장 강한 이의 가장 끔찍한 순간이 재현될 것이다, 라고 하더군요.”
“앗, 그거 저도 들었어요.”
“나도 마찬가지로 들었다. 보아하니 여기 모두가 들은 모양이군.”
우서혁의 말에 민아린과 박건호가 한 마디씩 했다. 나만 들은 게 아니었구나.
“제 기억이 맞다면 목소리의 주인은 리웨이 제작자일 겁니다.”
“그럼 이 공간 자체는 리웨이 제작자가 만든 게 확실하겠군.”
“혼자 만든 건 아닐 거예요.”
나와 박건호의 대화를 듣던 에드워드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등급이 높고 뛰어난 공간 제어 능력자라고 해도 혼자서 이 정도로 현실적이고 커다란 공간을 만들어 낼 수는 없어요.”
“여러 제작자가 함께 모여서 만들어 낸 공간이라는 겁니까?”
그사이 또 능력을 쓴 건지 에드워드의 눈동자에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럴 가능성이 커요. 자세히는 저로서도 알기 힘드네요.”
그렇다면 내 개입 능력도 섣불리 쓸 수 없다. 여러 제작자가 힘을 합쳐 만들어 낸 공간이라면, 어떤 능력들이 쓰였는지 파악하기 전에 무작정 개입했다가는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개입 능력을 쓴다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며칠은 기절해 있을 텐데… 일단 상황을 더 지켜보는 편이 낫겠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다 가짜라는 말입니까? 그저 만들어진?”
“네. 여기는 모두 만들어진 공간이에요. 다만 환상이나 환각 종류인지, 도플갱어 같은 반사형 몬스터를 갖다 둔 건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조금 더 살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혹시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내려면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합니까?”
내 질문에 에드워드가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최소한 이 주일… 넉넉하게는 한 달 정도요. 제가 하루에 능력을 쓸 수 있는 시간이 한두 시간 정도인데 여기는 너무 넓어서요.”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리는구나. 그럼 대략 한 달 동안 여기서 버텨야 한다는 건가? 막막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혹시 리웨이 제작자가 했던 말이 힌트가 아닐까요? 가장 강한 이의 가장 끔찍한 순간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민아린의 의견에 모두의 시선이 천사연과 하태헌에게로 향했다. 나는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아니다. 살면서 처음 와 본 곳이니까.”
하태헌이 먼저 깔끔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천사연은 조용히 서 있을 뿐,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마스터, 아까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아는 사이인 것처럼 보이던데. 맞습니까?”
궁금한 점이 생기면 짚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박건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던 천사연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이전에… 만났던 사람이긴 하다만. 동일인이 맞는지는 아직 모르겠군.”
권세현을 만난 적 있다는 말에 천사연을 바라봤다. 옅은 혼란이 담겨 있는 그 얼굴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나는 살면서 천사연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만약에 만났다면 분명 기억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천사연이 무언가 오해를 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나도 이 장소는 처음 와 보니 나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에는 힘들 것 같은데.”
“으음, 그럼 더 복잡하네요.”
나는 시선을 돌려서 차도를 지나가는 수많은 차와 건너편에 길을 걷고 있는 사람, 높다란 건물을 찬찬히 살펴봤다. 어디로 눈길을 보내든 내게는 모두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걸 깨닫자 어마어마한 긴장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권세현이 나라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속이 뜨겁게 울렁거렸다. 이 상황에서 계속 숨길 자신이 없었다. 최악의 경우, 여길 벗어나기 위해 내 입으로 권세현에 대해서 얘기해야 할 수도 있다…….
“……결.”
심지어 박건호와 우서혁은 이전에 내가 ‘권세현’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을 알고 있잖아. 그럼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한이결!”
“어?”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김우진의 얼굴 뒤로 나를 응시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김우진이 내 상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손목을 잡아 왔다.
“어디 아파?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아…….”
김우진의 체온이 굉장히 뜨거웠다. 아니, 내가 차가운 건가? 이마에 맺혀 있던 식은땀이 귀 옆으로 흘러내렸다.
“미안. 생각을 좀 하느라고…….”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힘겹게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모두의 표정이 어딘가 묘해졌다.
“마스터. 나머지는 자리를 옮겨서 마저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우서혁의 제안에 잠시간 나를 보던 천사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국과 비슷한 곳이니 근처 호텔이라도 찾아서 가 보도록 하지.”
“예. 카드는 쓰지 못할 테니 현금으로 빌릴 수 있는지 확인이 필요해 보입니다.”
“현금이라면 저도 조금 갖고 있어요.”
“저기 보이는 건물이 호텔인 것 같아요. 우선 저기로 가 볼까요?”
도란도란 이어지는 대화에서 한 걸음 물러선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느끼며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확실히… 휴식이 필요했다. 이대로는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