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한참을 달린 끝에 우리는 천안 G32 구역 바로 옆에 있는 JS 한국 지부에 도착했다.
우리 차가 줄줄이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관계자와 직원들은 천사연이 내리자마자 빠르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레퀴엠 마스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JS 한국 지부 총관리자 레이먼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레이먼.”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에 안경을 쓴 레이먼은 냉철하면서도 정갈한 분위기를 풍겼다. 능력자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거로 보아 일반인이 확실했다.
천사연 옆에 서 있는 나를 향해 레이먼이 살짝 웃었다.
“한이결 능력자님 맞으시죠?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사연과 나와 모두 악수를 마친 레이먼이 엘리베이터로 우리를 안내했다.
“로헌 부마스터께서는 먼저 도착해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을 벗어났다. 투명한 유리 벽으로 바깥이 훤히 보이는 엘리베이터는 높게 올라갔다.
“아테나 길드에서 전달한 사항은 잘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체되지 않도록 준비는 모두 마쳐 둔 상태입니다. 하태헌 부마스터께서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셨으니 나중에 확인하셔도 괜찮습니다.”
엘리베이터는 30층에서 멈춰 섰다. 문 너머로 나타난 건물 내부는 생각 이상으로 넓었다.
“이쪽입니다.”
앞장서는 레이먼을 따라 복도를 가로질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걸어가며 이곳에서 일하는 연구원이나 직원의 수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모두 능력자들이었다. 분명 제작 능력자겠지.
‘시설도 꽤 괜찮아 보이고. 대통령이 이용했다더니 확실히 제대로 된 곳인가 보네.’
나와 마찬가지로 레이먼을 따라가며 여기저기 구경을 하던 민아린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대단하네요. 이 정도면 공간 이동을 한 번 이용할 때마다 드는 비용도 장난 아니겠어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JS 측에서 먼저 제안했으니 별다른 비용 없이 이용할 수 있지만, 그것도 이번뿐이었다. 만약 저들의 설명처럼 큰 부작용 없이 외국으로 갈 수 있다면 언제든 더 이용할 의향이 있었다.
나와 민아린의 대화를 듣던 우서혁이 입을 열었다.
“기업 관계자나 정치인들은 이전부터 간간이 이용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외는 이용자가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만 이용하는 거면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게 확실하겠네요.”
나 같은 서민들은 이런 시설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를 거다. 알아 봤자 이용하지도 못하겠지만.
권정한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끼어들었다.
“뭐, 기술이 가진 값어치인 거겠죠. 동네 뒷산 가는 것도 아니고 해외로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기계 제작에만 몇억 들걸요?”
그렇군. 난 이런 주제는 알고 있는 게 그다지 없는 터라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복도 끝에 도착하자 유리로 된 자동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방 안쪽엔 수많은 기계와 연구원이 보이고 중앙에는 저번 서류에서 봤던 거대한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와, 진짜 대단하네요.”
천장이 굉장히 높고 내부도 넓었지만, 기계 몸집이 워낙에 커서 그런지 꽉 차 보였다. 민아린의 진심 어린 감탄을 들으며 기계를 올려다봤다.
‘저 정도 높이면 30미터는 넘겠는데.’
제작에만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었을 거라는 권정한의 말에 공감이 갔다. 어떤 식으로 작동되는지는 궁금하네.
주변을 천천히 살피던 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하태헌 씨.”
입구 근처에서 로헌 경호원들과 함께 서 있던 하태헌이 내 부름에 뒤를 돌아봤다. 하태헌에게 다가가자 투명화한 상태로 어깨에 앉아 있던 여우가 끼웅, 하며 낮게 울었다.
“늦지 않게 왔군.”
“네. 별일 없으셨죠?”
보는 눈이 많으니 평소처럼 머리를 쓰다듬는 것 대신 어깨를 한 번 가볍게 잡은 하태헌이 천사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셨습니까.”
“그래. 일찍 와 있었군.”
“업무가 빠르게 끝나서 먼저 출발했습니다.”
조마조마한 내 마음과 달리 하태헌과 천사연은 제법 멀쩡하게 대화를 나눴다. 하긴. 엄연히 따지면 지금은 일하고 있는 중이니까.
“간단한 설명 이후에 바로 가동하겠습니다. 모두 이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레이먼의 손짓에 직원이 들고 있던 태블릿PC를 두드렸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기계가 지잉, 소리를 내며 입구를 열었다.
“들어가셔서 기계 중앙에 서 주시면 됩니다. 바닥에 새겨진 문양은 공간 이동이 가동되면 빛이 납니다만, 정상 반응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를 따라 기계 안까지 들어온 레이먼과 직원들이 딛고 설 위치를 세세하게 짚어 줬다.
“기계가 가동되면 개인에 따라 미약한 현기증이나 메스꺼움을 느낄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여러분이 도착하게 될 목적지는 JS 뉴욕 지부입니다.”
우서혁이 나눠 준 작은 배지 모양의 통역 아이템을 옷에 끼우며 레이먼의 설명을 들었다.
양쪽 기계를 두고 이동하는 방식인가 보네. 그 외에 기본적인 사항들을 읊어 준 레이먼이 빙긋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럼 이제 공간 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웬만하면 지금 위치에서 벗어나지 말아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레이먼과 직원들이 기계 바깥으로 나갔다. 투명한 창 너머로 수십 명의 직원과 연구자들이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며 기계를 가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공간 이동을 하려면 이렇게 많은 인력이 필요한데… 프라우스 신도단은 어떻게 그 작은 구슬 하나로 이동할 수 있는 거지?’
심지어 길드 관리 본부 습격 때를 떠올리면 10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한 번에 사라졌잖아. 발동되는 시간도 아주 짧았고.
‘닥터라는 그 남자가 아무리 등급 높은 제작자라 해도 그런 아이템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게이트에서도 구할 수 없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건가? 이 부분도 기회가 된다면 알아봐야겠다.
우우웅!
곧이어 기계가 진동하며 바닥이 푸른색으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아찔한 감각이 온몸에 퍼졌다.
그 불쾌한 느낌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
순식간에 뉴욕으로 건너온 우리를 반긴 상대는 JS 뉴욕 지부의 총관리자인 에밀리였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선명한 이목구비에 주홍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에밀리가 기계 밖으로 나온 우리를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공간 이동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혹시 몸이 불편하신 분 계십니까? 말씀 주시면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뭐야?’
당황해서 급히 괜찮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젓자 에밀리가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건물 정문으로 안내했다.
“아테나 길드에서 보낸 차가 와 있습니다. 여기서 워싱턴까지는 넉넉하게 5시간 정도 걸리니 바로 이동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미국까지 편히 올 수 있었습니다.”
천사연이 대표로 감사 인사를 보내자 에밀리가 악수하며 미소를 지었다.
“저희야말로 귀한 인연을 맺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디 마지막 일정까지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JS 뉴욕 지부 건물 앞에 세워진 아테나 길드의 차를 타고 곧장 워싱턴을 향해 움직였다.
아테나 길드는 포토맥강 옆에 자리해 있다고 하는데, 워싱턴을 와 본 적이 없어서 설명을 들어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에밀리가 말했던 대로 워싱턴까지 5시간을 쉬지 않고 이동한 끝에 드디어 아테나 길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에 내려서 처음으로 아테나 길드 건물을 마주한 나는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건물이 작네.’
워싱턴은 고도 제한이 걸려 있어서 높은 건물은 지을 수 없다던데, 그것 때문인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천사연이 귓가에 속삭였다.
“아테나는 건물이 곳곳에 여러 개가 있지. 이곳이 대표 건물이라 가장 보안이 철저하고.”
역시 그렇군. 정문을 지키고 선 경호원들에게 보안 검사를 받은 우리는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올라갔다.
“한이결 씨!”
경호원이 대표실 문을 열어 주자마자 밝은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후다닥 달려왔다. 나는 품으로 곧장 달려오는 작은 체구를 기쁜 마음으로 안아 줬다.
“에드워드 씨.”
“오랜만이에요!”
아테나 부마스터인 클로에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무소속 제작자인 에드워드. 몇 개월 만에 다시 만난 에드워드는 그새 키가 조금 자라 있었다.
대견한 마음에 금색으로 반짝거리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에드워드가 헤헤 웃으며 얌전히 손길을 받았다. 그러고는 천사연을 바라봤다.
“천사연 씨도 오랜만이에요.”
“그래. 잘 지냈나?”
“네! 저는 잘 지냈어요. 뒤에 다른 분들도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제작자 에드워드라고 합니다.”
“클로에 부마스터의 동생분입니다.”
에드워드의 말에 덧붙여 설명한 나는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클로에 부마스터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누나는 아테나 마스터를 데리러 갔어요. 곧 올 거예요. 우선 들어오세요.”
내 손을 잡고 이끄는 에드워드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갔다. 얼마 가지 않아 아테나 직원이 차와 디저트를 가져다줬다.
“형. 여기요.”
“한이결, 이거 먹어.”
양 옆자리를 차지한 권정한이 홍차를, 김우진이 쿠키를 내 앞으로 밀어 줬다. 얼떨결에 홍차가 담긴 찻잔을 받아 들고 쿠키를 입에 넣은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이거… 미국에 왔다는 실감이 별로 안 드는데.’
자기도 먹고 싶은지 투명화한 상태로 낑낑거리는 여우의 모습을 제외하고는 평소의 방 분위기와 너무 똑같아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맞은편에 앉아서 틈틈이 서류를 보며 대화를 하는 천사연과 우서혁이나, 이주하에게 도착했다는 연락을 보내는 하태헌의 모습 또한 너무나도 익숙했다.
“으음, 국회 의사당이라면 제가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어요.”
“나중에 시간 되면 길 안내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구경하기 좋은 관광 명소도 많이 알고 있으니까 편하게 말씀 주세요.”
“좋아라~!”
어느새 친해졌는지 민아린과 에드워드는 여행 잡지를 보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서로 얼굴을 몇 번 마주하긴 했지만, 저 정도로 편하게 얘기를 나누다니. 대단하다.
그렇게 10분 정도 시간을 보냈을 때였다. 응접실 문이 열리며 기다렸던 클로에가 나타났다.
“미안해요. 조금 늦었군요.”
봄날의 꽃 같은 미소를 짓는 클로에 뒤로 처음 보는 남자가 뒤따라 들어왔다.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넘긴 그는 한껏 찌푸린 미간과 사나운 눈매를 지니고 있어서 무척 예민해 보였다.
‘저 남자가…….’
아테나 길드의 마스터이자 클로에의 남편. 이름이 제이크라고 했던가.
나는 워싱턴으로 오기 전에 개인적으로 찾아본 제이크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클로에와 마찬가지로 SS급인 그는 그림자를 통해 공격과 방어를 모두 할 수 있는 강한 기운을 가진 능력자였다.
‘미국에서 길드를 이 정도로 키워 낸 장본인이니 만만찮은 실력자겠지.’
나름 기대를 하고 제이크를 살피던 나는 그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천사연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