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강승건 능력자의 행방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군. 아마 아이템을 사용해서 빠져나갔겠지.”
역시 그런가. 그렇다면 관리 본부가 찾는 건 힘들겠네.
“미국으로 갔을까?”
“글쎄. 확률은 높다만 아닐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나는 마지막으로 본 강승건을 기억해 냈다. 길드 관리 본부를 무너뜨리고 사마엘의 손에 끌려갔었지.
‘그때는 강승건을 대체 왜 데려가나 싶었는데.’
결국 프라우스 신도단이 노린 것은 관리 본부와 강승건 둘 다였다.
-능력을 쓰지 못한다 해도 S급 신체이니 쓸 곳이야 여러모로 많겠지.
엘로힘의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사람을 죽일 정도로 강한 몬스터와 융합된 상태라면 나중에 구한다 하더라도 최가영처럼 떼어 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강철우 의원 같은 경우가 또 생기면 일이 복잡해질 텐데. 우리는 이제 미국으로 가야 하잖아.”
“어쩔 수 없지. 이쪽 일은 최미진 센터장과 이주하 마스터에게 맡겨 놓고 최대한 빨리 다녀오는 수밖에.”
괜히 인원을 나눠서 한국에 두고 가 봤자 양쪽 다 상황만 애매해질 거다.
‘그렇다고 한두 명만 두고 가는 건 더 불안하고.’
엮인 이들이 제법 많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는 부족하게 느껴지네. 착잡한 심정으로 시선을 들었다.
걸터앉은 옥상 난간이 꽤 높은 터라 천사연과 시야가 얼추 맞았다. 정원 곳곳을 밝히는 노란 전등 빛이 천사연의 얼굴을 비췄다.
“그래서?”
“……?”
“기분 안 좋은 이유가 그게 다야?”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받아 내던 천사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까도 괜찮냐고 묻더니… 왜 내 기분이 안 좋다고 생각하는 거지?”
“생각할 게 있나? 그냥 그렇게 보이는데.”
나는 담뱃갑이 들어 있는 재킷 주머니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담배까지 가져와 놓고.”
“별 의미 없다. 원래도 피던 거고.”
“알아. 봤으니까.”
피는 것까지 본 건 아니지만.
천사연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제멋대로 명령을 내리고는 목욕 가운을 걸친 채로 담배를 꺼냈었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왜 한이결을 그런 태도로 대했는지 이해가 됐다.
‘그때는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나와 같은 것을 생각했는지 천사연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려 웃었다.
“그날을 아직 기억하나 보군.”
“당연히 기억하지. 그게 여기…….”
처음 왔던 날이니까.
무심코 끝까지 말하려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천사연은 내가 진짜 한이결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을 놓았다.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네.
“…큼, 아무튼 큰 문제 없다는 거지?”
다소 부자연스럽게 말을 돌리자 천사연이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
회의할 때도 상태가 나빠 보였는데. 그 부분도 물어봐야 할지 고민하는 내게 천사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이상하군.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고.”
“뭐… 그럴 수도 있지.”
“혹시 걱정이라도 한 건가?”
그 물음은 장난처럼 가볍게 던져졌다. 잠시간 미소 짓고 있는 천사연의 얼굴을 보다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래.”
정확히는 일이 잘못됐나 싶어서 걱정한 거지만… 걱정한 건 사실이니까.
“그렇게 티를 내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
“…….”
“너 마약 사건 때부터 계속 예민했잖아.”
반복되는 시간을 살고 있는 천사연에게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은 큰 불안 요소였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더 초조하겠지.’
마약 사건이 잘 해결됐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강철우 의원이 살해당한 건 어쩔 수 없이 거슬릴 거다.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괜찮냐?”
“…….”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자 가만히 서 있던 천사연이 쓰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두 팔로 허리를 껴안았다.
“…천사연.”
거절할 새도 없이 안기게 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천사연을 마주 안았다. 쓰고 차가운 향이 옅게 느껴졌다.
밤하늘 아래에 서 있는 천사연이 유독 쓸쓸해 보였다. 내게 안겨 오는 몸짓에 어딘가 서글픈 감정이 묻어나서 도무지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내색하지 않았으면서… 이번에는 스트레스가 제법 컸나 보네.’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는 대신에 녀석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몸짓이었지만 천사연은 얌전히 받아들였다.
***
어딘가에서 꽃향기가 흘러왔다. 감고 있던 눈을 뜬 나는 눈앞에 가득 펼쳐진 꽃밭을 멍하니 바라봤다.
‘여긴……?’
분명 처음 오는 장소인데도 묘하게 익숙했다. 어쩌다가 여길 오게 된 거지. 전후 사정이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아서 머리만 긁적이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현아.”
다정함이 깃든 부드러운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바람에 살랑거리는 꽃 너머로 반가운 이가 서 있었다.
“엘!”
“오랜만이구나.”
내게 다가온 엘로힘이 커다란 손으로 뺨을 가볍게 만져 왔다. 그제야 나는 여기가 꿈속이라는 걸 깨달았다.
‘천사연을 만나고 방으로 돌아와서… 김우진과 좀 놀다가 피곤해서 일찍 잤었지.’
엘로힘이 꿈을 통해서 찾아온 거였나. 그럼 이 장소도 저번처럼 꿈을 통해 만들어진 곳이겠네.
내가 생각을 정리할 동안 기다려 준 엘로힘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갑자기 만나러 와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미국으로 출발하면 바쁠 테니 이때가 제일 괜찮아 보였단다.”
무언가 전하려고 일부러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챈 나는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우리가 아니지.”
“네?”
“고생 많이 했더구나, 세현아.”
고생? 내가 고생한 게 뭐가 있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엘로힘이 드물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약 말하는 거란다.”
“아아.”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꿈속이라 그런가, 영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목덜미를 쓸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멀쩡하고요.”
“그나마 다행이지. 해독제를 만든 것도 봤단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혹시 강철우 의원이 살해당한 것도 보셨습니까?”
“그래. 천사연, 그 아이를 통해 봤단다.”
“강승건의 지문이 나왔다고 하던데… 강철우 의원이 죽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건 어렵습니까?”
엘로힘이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기록을 남기지 않고 사망한 자의 과거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역시 그런가요. 아쉽네요.”
“강승건이라는 인간은 신도단에게 끌려갔을 때부터 모습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아무래도 그들과 제대로 엮인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강철우 의원을 살해한 범인은 강승건일 가능성이 크겠군요.”
우리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다른 피해자가 생기면 안 될 텐데. 아이템을 통해 어디로 이동했을지 예상조차 가지 않으니… 상황이 참 답답했다.
“너무 안달 내지 마렴. 강철우라는 인간이 죽은 것은 그리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이니까.”
“예?”
“계획이 있어서 죽인 게 아니라 분풀이에 가까워 보이는구나.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분풀이? 프라우스 신도단과는 관련 없다는 건가?
굳이 묻지 않아도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엘로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한번 살펴봤던 바로는 강승건과 강철우는 그다지 사이좋은 관계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정신계 능력에 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철우 의원을 죽였다는 말씀입니까?”
“가능성은 있다. 죽은 인간의 몸에 남아 있던 흔적이 거칠면서도 깔끔했으니까.”
거칠면서도 깔끔했다… 혼란에 빠진 내게 엘로힘이 이어 설명했다.
“세현아, 강승건이라는 인간이 너를 납치했었던 거로 아는데.”
“맞습니다.”
“그때 당시의 모습을 생각해 보렴.”
그 말에 나는 강남 사건을 기억해 냈다. 나를 납치한 강승건은 굉장히 불안해 보였고 감정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서 내게 폭력을 동반한 분노를 쏟아 내곤 했다. 아벨은 그 상태를 ‘부작용’이라고 했었지.
“강승건이 그때처럼 정신계 능력에 당한 상태였으면 시체에 남아 있는 흔적이 더욱 지저분했을 거다. 그래서 나는 어느 정도 이성이 있는 거로 판단했다.”
본인이 원해서 죽인 거라면 엘로힘의 말처럼 둘 사이 관계가 정말 나빴던 모양이다.
‘하긴, 부모와 자식이라 해도 무조건 좋을 수는 없으니.’
만약 강승건이 사마엘의 능력에 당하지 않고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걸 과연 나은 상황이라고 봐야 할지 모르겠다. 오히려 더 위험할지도 모르고.
“이런, 또 과한 걱정을 하는구나.”
엘로힘이 내 미간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문질렀다. 나도 모르게 찌푸리고 있었나 보다.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 네 마음은 이해한다만… 불확실한 것은 제쳐 두고 단서가 정확한 미국부터 다녀오는 게 나을 것 같구나.”
“…역시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미국으로 보내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내 미간이 펴진 것을 확인한 엘로힘이 복잡한 표정을 했다.
“미국에서 굉장히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관련자들이 그곳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
“그럼 더더욱 가 봐야죠. 뭘 하고 있든 막아 낼 겁니다.”
“…….”
모른 척했다가는 나중에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엘로힘이 좋은 정보도 줬으니 이제 한시라도 빨리 미국으로 가서 직접 확인해 보는 일만 남았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엘로힘이 내 손목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폭 안기게 된 그의 품에선 천사연과 달리 백합 향이 물씬 풍겼다.
“제발 몸조심하렴, 세현아.”
벌써 몇 번이고 들어 온 말에 조금 머쓱해졌다. 많은 이들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네. 더 신경 쓰겠습니다.”
“엘라하도 걱정 많이 했단다.”
“엘라하가요?”
그 까칠한 분이 나를 걱정했다고? 놀라서 되묻자 엘로힘이 이해한다는 듯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럼, 당연하지. 천사연의 과거를 정리하느라 바쁜 나를 대신해서 엘라하가 항상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네가 마약으로 아파할 때는 한숨을 어찌나 쉬던지.”
“하하…….”
어째 걱정이 아니라 한심하게 본 것 같은데. 어쨌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마.”
엘로힘의 어깨에 머리를 편히 기대고 눈을 감자 건너편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점차 퍼져 나가며 모든 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꿈이 끝나 가고 있었다.
“잘 가라, 세현아. 다음에 또 보자.”
마지막 인사말과 함께 모든 게 하얀빛으로 덮였다. 그걸 느끼며 나는 뒤늦게 생각했다.
‘여우한테 디저트 줘도 되는지 물어보는 거 깜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