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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24)화 (224/394)
  • 224화

      

    “출발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겁니까?”

    “아테나에서 일정을 정리한 후에 다시 연락하겠다는군.”

    내 질문에 천사연이 이쪽으로는 시선조차 보내지 않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행동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한데?’

    또 뭐 때문에 저러는 거지? 아무래도 천사연과는 나중에 따로 대화를 좀 나눠 봐야겠다.

    “하태헌 부마스터. 미국까지 동행할 거라면 그에 필요한 다른 문제들은 로헌에서 해결하도록.”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 도착하면 아테나 길드에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지내게 될 예정이다.”

    이어지는 설명에 박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테나 길드가 그나마 안전하겠군요.”

    “그래. 하지만 오래 있지는 못하니 프라우스 신도단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빨리 찾아봐야 할 거다.”

    레퀴엠 마스터인 천사연과 로헌 부마스터인 하태헌이 한국을 비우는 셈이니 일주일이 넘어가면 이래저래 복잡한 일들이 많아질 게 뻔했다.

    최악의 경우, 천사연과 하태헌만 한국으로 돌아가고 남은 사람들끼리 프라우스 신도단을 상대하게 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쓸 만한 단서를 얻어야 할 텐데.’

    만약 SS급인 천사연과 하태헌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프라우스 신도단이 습격해 온다면… 쉽게 이기기는 힘들겠지. 그 부분이 나는 제일 불안했다.

    “미국으로 가는 것은 확정이니 미리 준비해 놓도록. 정확한 일정은 정해지는 대로 우서혁을 통해 전달하지.”

    “알겠습니다.”

    천사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서혁이 정장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민아린 힐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수술은 문제없이 끝났다고 합니다.”

    다행이다. 반가운 소식에 마음이 좀 놓였다.

    그럼 이제 남은 건 곧 있을 해독제에 대한 회의뿐이다. 우서혁의 말을 들은 천사연이 명령했다.

    “피해자 최가영의 가족에게 연락해서 내일 바로 만날 수 있도록 연락 보내 놔.”

    “예.”

    “그럼 조금 쉬다가 다음 회의에 다시 모이지.”

    천사연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마 이대로 끝낼 줄 몰랐던 나는 회의실 문으로 향하는 천사연의 모습을 뒤늦게 알아챘다.

    “잠깐만요, 천사연 마스터!”

    급히 붙잡는 내 부름에도 천사연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그 적나라한 무시에 아까부터 느꼈던 찝찝함이 더욱 강해졌다.

    ‘대체 뭐야?’

    복잡해지는 머릿속에 미간을 찌푸리자 옆에 앉아 있던 김우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한이결,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그래도 오늘처럼 이렇게 대놓고 무시한 적은 처음 아닌가.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정말 모르겠다. 물론 천사연이 의중을 알 수 없는 행동을 해 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긴 하지만….

    엘로힘이 가져다줄 천사연의 과거가 담긴 책이 너무나도 절실해졌다. 그걸 보면 천사연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까?

    ‘하여간 까다로운 놈…….’

    조금은 알게 됐다고 생각하자마자 다시 이 꼴이라니, 보통 어려운 상대가 아니라니까.

    “하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만 있는 대로 휘둘리는 것 같은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

    “자, 여기 해독제예요.”

    루젤이 아까보다 훨씬 좋아진 안색으로 인벤토리 가방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새끼손가락만 한 길이의 병에는 옅은 보랏빛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건 제작 방법이고요.”

    루젤이 회의실 책상에 꺼내 둔 약병과 종이쪽지를 바람 능력으로 가져온 나는 쪽지에 적힌 내용을 살펴봤다.

    헬런드의 피, 루섹타 나방의 날개 가루, 페로세트의 체액….

    “혹시 여기 적힌 거 다 몬스터 재료입니까?”

    “맞아요. 한두 개 빼고는 모두 몬스터인데, 일부러 구하기 쉬운 놈들만 선별해서 넣었으니까 복제는 문제없을 거예요.”

    그렇군. 나는 약병과 종이를 다시 바람으로 띄워서 천사연의 앞으로 보냈다.

    “세세하게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뭘요. 피해자가 많다고 했으니 복제품도 그만큼 여러 개 필요할 텐데 이 정도는 당연하죠.”

    루젤의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루크가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마, 마약 자체가 그리 복잡한 제작 아이템이 아니라서 가능했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셀톡 전갈 독이나 테라신 버섯 독처럼 통증을 유발하고 환각을 보게 하는 체액들만 들어 있었습니다.”

    루크가 방금과는 달리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눈을 반짝 빛내며 설명을 했다. 이럴 때만 당당해지는 건 여전하구나.

    “그렇군요. 루크 씨 설명대로라면 마약이 정말 위험하긴 했네요.”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서 턱을 괴며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자 루크의 굳은 어깨가 조금은 편하게 내려왔다. 이제야 긴장이 좀 풀린 모양이다.

    “…….”

    내 옆에 앉아서 나와 루크를 번갈아 본 김우진의 눈초리가 점점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얘가 또 이러네. 낯선 상대를 마주할 때면 늘 있는 일이니, 책상 아래에 있는 김우진의 손등에 손을 올려 가볍게 두어 번 토닥였다.

    “해독제 잘 받았습니다. 빠른 시일 내로 길드 관리 본부에 넘겨서 복제하도록 하죠. 두 분의 이름도 함께 전달하겠습니다.”

    천사연이 해독제와 재료가 적힌 종이를 인벤토리에 넣으며 말하자 루젤이 반색했다.

    “오, 센스 좋으시네요. 그래 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제작자들은 이름이 알려질수록 의뢰가 더 많이 들어온다. 전국에 퍼져 나갈 해독제에 루젤과 루크의 이름이 붙는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최가영 씨 등에 붙은 날개는 문제없이 떼어 냈어요. 떨어져 나온 날개는 저희가 가져가서 말씀하셨던 대로 폐기 처리 할 거고요.”

    이어지는 루젤에 설명에 민아린도 말을 보탰다.

    “등에 상처도 하석 씨와 제가 힘을 합쳐서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치료했으니까 관련된 얘기가 새어 나갈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역시 눈치 빠른 민아린이다. 그런 부분까지 생각해 줬구나.

    “모두 고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독제뿐만 아니라 최가영 씨 수술도요. 덕분에 한시름 덜었습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내 인사에 루젤이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마약 문제는 이제 어느 정도 끝난 것 같네.’

    루젤과 루크가 만들어 준 해독제는 최미진의 주관하에 피해를 본 이들에게 전해질 거다. 닥터가 한국에서 물러나서 미국으로 옮겨 간 지금은 다른 마약이 더 나올 가능성도 없고.

    ‘여러모로 정리가 잘됐으니 마음 편하게 미국으로 갈 수 있겠어.’

    물론 미국을 가서도 해야 할 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만. 그래도 한국에서 생긴 일을 온전히 매듭짓고 떠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마스터, 잠깐 괜찮으십니까?”

    회의가 얼추 마무리되어 가던 그때였다. 회의실 문을 노크한 수행원이 짧은 묵례와 함께 천사연을 불렀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천사연 대신 우서혁이 일어서서 수행원을 따라 회의실을 나섰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수행원이 우서혁에게 바싹 붙어서 무언가를 전달하는 모습이 비쳤다.

    ‘…뭐지?’

    그걸 지켜보던 나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불길한 예감에 미간을 좁혔다. 방금까지 회의실에 가득했던 평화로운 분위기가 한순간에 깨졌다.

    “…….”

    나와 비슷하게 무언가를 감지한 천사연과 하태헌도 얼굴을 굳히고 우서혁을 응시했다. 이런 일에 유독 예민한 SS급 두 명이 동시에 같은 반응을 보였으니 내 착각은 아니었다.

    수행원의 말을 전해 들은 우서혁은 드물게 눈가를 찌푸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달을 마친 수행원이 자리를 떠나가는 것을 확인한 우서혁이 회의실로 돌아왔다.

    “마스터. 아무래도 회의는 이쯤에서 끝내고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지?”

    “강철우 의원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강철우 의원? 나는 관련된 한 사람을 곧장 떠올렸다. 같은 생각을 한 박건호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강철우 의원이라면 강승건 능력자의 부친 아닌가?”

    “맞습니다.”

    우서혁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하태헌이 진동하는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주하에게서 온 전화였다.

    하태헌이 통화를 하기 위해 회의실을 나가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던 우서혁이 멈췄던 설명을 이었다.

    “단순한 사망이 아닙니다.”

    “그럼…….”

    “길드 관리 본부에서 전한 바로는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조용히 얘기를 들은 천사연이 입가를 매만졌다.

    “하태헌 부마스터도 지금쯤 이 소식을 듣고 있겠군.”

    “레퀴엠과 로헌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도 관련 사항이 전달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살해당한 고위직 사람과 길드 책임자들을 불러내는 길드 관리 본부라. 그렇다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능력자에게 살해당했나.’

    범인이 사용한 능력의 흔적이 사건 현장에 남아 있는 거겠지. 설마 이것도 프라우스 신도단의 짓인가?

    “세상에, 벌써 기사가 떴네요.”

    핸드폰으로 뉴스를 확인한 민아린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제법 이름 있는 정치인이 죽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바로 출발하지.”

    귀찮다는 듯이 짧게 한숨을 내쉰 천사연이 정장 재킷 단추를 채우며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가고 싶었지만 끼어들 만한 명분이 없었다.

    어차피 천사연과는 나중에 따로 대화할 시간을 가지려고 했으니 그때 가서 물어보는 수밖에.

    천사연과 우서혁이 급히 밖으로 나갔다. 전화하러 간 하태헌도 아마 돌아오지 않고 바로 사건 현장으로 가겠지.

    “으음, 맥주나 한잔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네요. 도하석 힐러님이 기대하고 있던데.”

    휑해진 회의실을 바라보던 루젤이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예, 아쉽게 됐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마시러 가죠.”

    “그래요. 이 상황에서 마시기도 좀 그러니까.”

    시원스럽게 대답한 루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도 이만 가 볼게요. 해독제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다면 연락해 주세요. 루크, 가자.”

    마지막 인사를 건넨 루젤과 루크는 미련 없이 회의실을 떠나갔다.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오자 민아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불안하네요. 살인 사건이라니… 게다가 능력자가 엮인 것도 좀 수상하고요.”

    박건호도 찝찝한 기색으로 민아린의 얘기에 공감했다.

    “강철우 의원 정도면 신변 관리에 제법 신경을 썼을 텐데. 보통 일이 아닌 듯하군.”

    “아직 복구도 제대로 안 된 길드 관리 본부가 나서서 마스터들을 불러 모은 것도 평범하진 않네요.”

    권정한의 말을 들으며 나는 사건 현장으로 갔을 천사연과 하태헌을 떠올렸다.

    ‘별일 아니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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