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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23)화 (223/394)

223화 

“오랜만이네요, 한이결 씨. 반갑습니다.”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상대의 악수를 받아들였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카락에 은테 안경을 낀 남자, 도하석이 나를 따라 빙긋 미소 지었다.

“처음 뵀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십니다. 다행이네요.”

“그때 일은 감사했습니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도하석 뒤에 있는 루젤과 루크에게 시선을 옮겨 재차 말했다.

“다른 분들도 힘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에이, 너무 딱딱하게 그러지 말아요! 다른 것도 아니고 남 돕는 일인데요.”

내 인사에 루젤이 호쾌하게 대답하며 윙크를 보내왔다. 나는 그 옆에 우물쭈물 서 있는 루크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무소속인데도 이래저래 도움을 요청해서 죄송합니다, 루크 씨.”

“예, 예? 아, 아닙니다… 괘, 괜찮아요.”

화들짝 놀란 루크가 얼굴을 발긋하게 물들이고는 고개를 강하게 휙휙 저었다.

이 두 사람이 없었으면 지금쯤 어땠을지. 상상만으로도 막막하네. 새삼 루젤과 루크 남매를 알게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하태헌 덕분이지만.’

마침 통화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하태헌이 입을 열었다.

“마스터께서 이곳 일이 끝나면 바로 퇴근해도 되니 마음 편히 마무리 짓고 오라는군.”

이주하랑 통화했었구나. 하태헌의 말에 도하석이 반색했다.

“오, 우리 깐깐한 마스터께서 웬일이시래? 루젤, 일이 빨리 끝나면 맥주라도 한잔하실래요?”

“맥주요? 저야 좋죠!”

“루크 씨라고 했죠? 루크 씨도 오세요. 저희 길드 근처에 제법 괜찮은 맥줏집이 있습니다.”

“네? 아, 아니, 저는…….”

“한이결 씨는 어떠세요? 하태헌 씨도 오시니까 부담 없이 끼세요.”

“예? 저요?”

역시 로헌은 분위기도 화목하고 좋다고 생각하던 나는 뜬금없는 도하석의 제안에 눈을 깜빡였다.

그보다 하태헌도 맥주 마시러 간다고? 그런 얘기를 언제 한 거지?

어리둥절해하는 내 어깨를 잡아당긴 하태헌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헛소리하지 마라. 내가 언제 간다고 했지?”

“하태헌 씨 없이 우리끼리 무슨 재미로 마셔요?”

“안 간다.”

역시 장난친 거였군. 도하석도 꽤 능청맞은 성격인가 보다.

뒤에서 내 어깨를 끌어안은 하태헌을 내버려 둔 채로 도하석의 잡담을 듣는데, 간단한 검사를 하러 갔던 민아린과 최가영이 병실로 돌아왔다.

“다들 와 계셨네요.”

도하석을 발견한 민아린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다.

“오랜만이네요, 하석 씨.”

“그러게요. 다시 만나게 돼서 참 좋네요.”

둘이 웃으며 악수를 하는 장면을 본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어비스에서는 민아린이 레퀴엠을 떠나 로헌으로 이적하면서 도하석과 굉장히 친한 사이가 된다.

‘그랬는데… 지금 시간에서는 이제야 두 번째로 만나게 됐구나.’

다시 한번 어비스 내용과는 달라진 현실을 체감하며 최가영에게 물었다.

“최가영 씨,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수술해도 괜찮겠습니까?”

“아, 네. 말씀 주신 대로 닷새 동안 푹 쉬면서 많이 회복했어요.”

최가영의 대답에 민아린이 말을 얹었다.

“검사 결과도 아주 양호해요. 수술이 아마 네 시간 정도 될 텐데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예요.”

“그 검사지 혹시 저도 볼 수 있을까요? 수술 들어가기 전에 살펴보겠습니다.”

“물론이죠.”

도하석의 요청에 민아린이 들고 있던 검사지를 그에게 넘겼다.

말은 수술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합성과 추출 전문가인 루젤과 루크의 힘이 중요했다. 도하석과 민아린은 상처가 커지지 않도록 보조하는 역할에 가까웠다.

팔짱을 낀 채로 우리 대화를 구경하던 루젤이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해독제는 이따 수술 끝나고 드리면 되나요? 아직 관계자분들이 다 모이지 않은 것 같아서요.”

“네. 신경 쓰이지 않도록 회의 시간을 나중으로 잡았습니다. 수술 끝나고 좀 쉬신 다음에 회의실로 오시면 돼요.”

“그거 좋네요. 그럼 이따 봐요.”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루젤을 뒤로하고 하태헌과 같이 병실을 나섰다. 천사연의 명령으로 이 층은 아예 다 비웠으니 최가영은 조금 뒤에 수술실로 이동해서 날개를 떼어 내게 될 거다.

이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려 주는 것뿐이었다.

***

수술이 시작된 지 5시간 후, 루젤과 루크가 약간 지친 기색으로 수술실을 빠져나왔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게 루젤이 다가와 말했다.

“오래 기다렸죠?”

“어떻습니까? 오래 걸리셨네요.”

“짐작했던 것보다 융합률이 더 높았어요. 떼어 내는 것만으로도 한참 걸렸네요.”

“그럼…….”

“걱정하지 마세요. 날개는 무사히 떼어 냈고 지금은 봉합 진행 중이에요. 목숨에도 지장 없고요.”

“다행이네요.”

“나머지는 힐러분들 몫이에요. 마무리까지는 조금 더 걸리겠네요.”

하품을 길게 한 루젤이 피곤해 보이는 루크의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그럼 저랑 루크는 회의 전까지 좀 쉬다 올게요.”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루젤의 키에 맞춰 상체를 굽힌 루크가 머뭇거리다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루젤을 따라갔다. 천사연이 빈 병실 두 곳을 루젤과 루크에게 빌려줬으니 그곳에서 푹 쉴 수 있을 거다.

“한이결.”

“하태헌 씨.”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로헌으로 돌아가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하태헌이었다.

내가 말한 대로 천사연은 미국에 있는 아테나 길드 측에 정식으로 방문 요청을 보냈다.

하지만 레퀴엠 소속인 다른 사람들과 무소속인 나와 달리 하태헌은 로헌 소속이기 때문에 함께 가려면 따로 방문 일정을 잡아야 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미국에서 프라우스 신도단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겨우 잡아낸 단서를 놓치기에는 로헌도 아까우니 어떻게든 미국으로 사람을 보내고 싶겠지.

“나만 가는 것으로 확정됐다. 마스터는 당분간 자리를 비울 수가 없으니.”

역시 그런가. 예상했던 결과였다. 이주하의 입장에서는 하태헌만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없겠지.

“그래도 잘됐네요. 하태헌 씨가 없으면 허전했을 겁니다.”

어쨌든 하태헌도 함께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되어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가 곁에 있으면 마음이 굉장히 편했으니까.

나를 따라 옅은 미소를 지은 하태헌이 큰 손으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요즘 자주 이러는 것 같은데.

“괜한 걱정 하지 마라. 웬만하면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아 왔다. 따듯한 체온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당황스러운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잠깐…….’

왜 갑자기 이런 분위기가 된 거지? 갑자기 잡힌 손과 앞에 서 있는 하태헌이 엄청나게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 굳이 그러시진 않아도….”

긴장으로 굳어진 입꼬리를 겨우 끌어 올리며 대답하자 하태헌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번 마약 사건으로 확실히 깨달았다.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눈을 떼면 곧장 사고를 친다는 것을.”

“…….”

그렇게 얘기하면 나야 할 말이 없긴 한데.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신경 쓰이게 해서.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하겠습니다.”

설마 이수진이 염동 능력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필 그런 중요한 상황에서 염동력자를 만나게 될 줄은…….

‘아니, 애초에 그래서 프라우스 신도단이 접근한 걸지도 모르지.’

힘이 약하다고는 해도 염동력자인 이상 써먹을 곳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역시 그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이결, 미국에 가서도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하태헌 씨.”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줄 테니까. 네 그런 모습…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하태헌이 반듯한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통이 묻어나는 그 말에 차마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태헌에게서 진심을 느낀 나는 쓰게 웃었다. 이번 일은 내가 잘못하긴 했지.

내 손을 온전히 감싸는 하태헌의 커다란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하태헌의 어깨 너머로 우리를 바라보고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천사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와 하태헌을 응시하고 있는 이는 분명 천사연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지? 하태헌과 대화하느라고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내 놀란 얼굴을 본 하태헌도 뒤늦게 천사연의 기운을 알아채고 뒤를 돌아봤다.

“…….”

“…….”

서로를 마주 본 하태헌과 천사연이 조용히 침묵했다. 복도에 내려앉은 차가운 공기에 어마어마한 불안감이 몰려들었다.

‘뭐지? 이 오싹한 느낌은?’

열심히 하태헌과 천사연을 살피며 머리를 굴리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요즘에는 좀 덜해서 깜빡했었지만 원래 이 둘은 눈만 마주쳤다 하면 싸우는 게 일상인 사이였다. 설마 마약 사건이 해결되자마자 다시 전처럼 치고받고 싸우려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급히 잡힌 손을 빼내며 천사연에게 물었다.

“크흠, 천사연 마스터. 무슨 일입니까?”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천사연이 딱딱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작자 남매가 오기 전에 미국 관련해서 얘기를 좀 나누도록 하지.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회의실에 모였으니 당장 따라오도록.”

“예? 미국 관련해서라니… 잠시만요.”

천사연이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몸을 휙 돌렸다. 어딘가 단단히 기분 나빠 보이는 모습이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하태헌 씨, 같이 가요. 미국에 가기로 하셨으니 들어서 나쁠 것은 없어 보입니다.”

불쾌한 기색으로 앞서가는 천사연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하태헌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급히 천사연의 뒤를 쫓아 회의실로 가자 정말 그의 말대로 나와 하태헌, 민아린을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 한이결. 그리고 하태헌 부마스터. 민아린 힐러는 아직인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발견한 박건호가 휘파람을 짧게 휙 불며 물었다.

“아직 최가영 씨 수술이 끝나지 않아서요. 그래도 마무리 단계이니 해독제 회의 때는 오실 겁니다.”

“그런가. 그럼 이번 건 한이결 네가 잘 들어서 전해 주면 되겠군.”

“네.”

일단은 김우진 옆으로 가서 앉았다. 내가 회의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나에게 눈길을 떼지 못했던 김우진이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오른쪽은 하태헌이 자리했다.

나와 하태헌이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로헌 측에 소식은 전해 들었다. 하태헌 부마스터도 함께 미국으로 가게 되었으니 이동하는 인원은 총 8명이 됐군.”

“8명이라면…….”

민아린을 포함한 회의 참석자들인가. 찬찬히 회의실을 둘러본 나는 천사연의 의중을 파악했다.

‘프라우스 신도단 일에 다른 사람을 더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은 건가?’

마약 사건에 엮인 이들이 미국도 함께 가게 된 것이다. 복잡한 마음으로 이어지는 천사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테나 길드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왔으니 미국행은 확정이다. 최대한 빨리 출발하기 위해서 여러모로 조율 중이니 준비는 미리 끝내 놓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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