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해독제는 닷새 내에 완성이 될 것 같다고 한다. 루젤 제작자가 전해 달라는군.]
“다행이네요.”
루젤과 루크에게 마약이 담긴 술을 넘긴 다음 날, 하태헌의 연락으로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조금은 안심했다.
해독제를 완성하면 바로 길드 관리 본부에 넘겨야겠다. 마약에 당한 건 서울뿐만이 아니니까.
‘아직 복구에 정신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완성된 해독제를 전달하는 일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하태헌에게 물었다.
“그럼 루젤과 루크 씨는 닷새 후에 레퀴엠에 들르는 겁니까?”
[그럴 것 같군.]
“그때는 최가영 씨의 수술을 진행해야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번 일을 믿고 맡길 만한 의사가 없었다. 난감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는데, 수화기 너머로 하태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이결. 혹시 도하석을 기억하나?]
도하석. 그 이름에 예전에 로헌 병실에서 만났던 힐러 한 명을 떠올렸다.
“도하석 씨라면 로헌 소속 S급 힐러 아닙니까? 물론 기억합니다.”
얼마 전에는 신생 게이트인 D45 구역에도 참여했던 거로 안다.
[도하석에게 수술을 부탁하는 건 어떻지?]
“예? 도하석 씨에게요? 하지만…….”
힐러는 민아린이 있으니까 충분한데.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그가 이어 설명했다.
[도하석은 각성 이전에 레지던트 과정을 3년 정도 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정말입니까?”
[그래. 제안 정도는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실제로 수술을 할 수 있을지도 확인해야겠지만.]
도하석은 힐러로 각성하기 이전에도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해 온 건가. 로헌 소속인 도하석이 최가영을 맡아 준다면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어제 병실에서 루젤 제작자의 얘기를 듣고 도하석을 바로 떠올렸다. 하지만 그놈이 거절할 수도 있는 문제이니 섣불리 입에 올리지 않았지.]
“한번 물어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바로 만나 보겠다. 도하석에게 대답을 듣는 대로 다시 연락하지.]
“부탁드립니다, 하태헌 씨.”
[걱정하지 말고 너는 얌전히 쉬고 있도록.]
염려가 느껴지는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전화를 끝냈다. 얌전히 쉬라니, 그럴 수는 없다.
하루 푹 자고 일어났더니 몸 상태도 훨씬 좋아진 참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이수진을 데려가기 위해 최미진이 직접 레퀴엠으로 방문하는 날이니 나도 웬만하면 함께할 생각이다.
“이결 씨, 통화 끝나셨어요?”
“아, 네.”
“그럼 이거 맛 좀 봐 주실래요?”
민아린이 갓 구운 쿠키를 내밀었다. 여러 개 중 하나를 골라서 입에 넣자 달콤한 초콜릿 맛이 진하게 느껴졌다.
“오. 맛있는데요?”
“와아! 성공이에요, 우진 씨!”
민아린은 어제 퇴근하기 전에 말했던 대로 출근하자마자 내 방으로 달려왔다. 그러고는 아침을 차려 주기 위해 들른 김우진에게 1시간 전부터 쿠키 굽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가르쳐 주는 선생님의 실력이 좋아서 그런 건지, 민아린이 재능이 있는 건지 처음 만들었는데도 쿠키는 맛이 제법 괜찮았다.
민아린이 놓고 간 쿠키 하나를 더 입에 넣으며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곧 최미진 센터장이 도착할 시간이네.’
조금만 더 쉬다가 내려가면 될 것 같다. 한가한 생각을 하던 나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는 천사연과 눈이 딱 마주쳤다.
“…….”
나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절로 몸이 움찔 떨린 나는 황급히 고개를 휙 돌렸다.
‘아, 무심코 그만….’
그 이상한 행동에 품에 안겨 있던 여우가 피익, 울음소리를 흘리며 머리를 갸웃 기울였다.
뒤늦게 머쓱한 감정이 마구잡이로 밀려왔다. 이런 행동이 어색하고 유치한 걸 알면서도 한번 돌아간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리는 건 쉽지 않았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내가 아니라 천사연이 이상한 거 아닌가?’
어제 그 난리를 쳐 놓고 왜 다시 방에 찾아온 거냐고. 일이라면 대표실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하여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을 정면을 바라보지 못한 채로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데, 테이블에 놓여 있는 쿠키를 먹으며 우리를 구경하던 박건호가 나를 불렀다.
“한이결.”
“예?”
“혹시 마스터와 무슨 일 있었나?”
나와 천사연의 시선이 동시에 박건호에게로 향했다.
아니, 그걸 왜 하필 나한테 물어봐? 옆에 천사연도 앉아 있잖아.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싸우기라도 했나 싶어서.”
“제가 어떻게 천사연 마스터와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마침 주방에서 나온 권정한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평소랑은 분위기가 많이 다른데요?”
“권정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군.”
“착각입니다.”
박건호와 권정한의 의문을 단칼에 쳐 낸 나는 천사연이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분명 나를 비웃을 때 짓는 표정인데.
저 자식이…. 내가 난감해하는 걸 즐기고 있잖아. 어제 봤던 모습은 뭐야? 혹시 내가 꿈이라도 꾼 건가?
‘그럼 그렇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사연인데, 괜한 걱정을 했잖아.’
짜증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겨우 억누르던 그때, 방으로 돌아온 우서혁이 천사연에게 보고했다.
“최미진 게이트 관리 센터장께서 방금 막 도착했다고 합니다.”
차라리 잘됐다. 이런 상황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일이나 하는 게 훨씬 낫지. 나는 벌떡 일어서서 의욕을 담아 말했다.
“바로 가죠. 이수진을 빨리 넘겨야 하니까.”
“흠.”
내 태도에 천사연이 알 만하다는 기색으로 서류를 덮고 몸을 일으켰다.
그 모든 걸 지켜보던 권정한이 내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싸운 게 맞는 것 같은데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최미진은 길드 내부로 올라오지 않고 지하 주차장 안쪽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우서혁이 훈련실에 묶어 둔 이수진을 데려오는 동안 나와 천사연은 먼저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이군요, 최미진 센터장.”
“천사연 마스터.”
길드 관리 본부 직원 두 명을 데려온 최미진이 천사연과 악수를 한 후에 옆에 있는 내게도 인사를 건넸다.
“한이결 능력자. 간만입니다.”
“어서 오세요.”
“레퀴엠 길드와 함께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저번에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까 새삼 놀랍군요.”
놀랄 정도인가? 멋쩍게 웃는 나를 두고 최미진이 천사연에게 물었다.
“마약 사건 설명은 모두 이해했습니다. 염동 능력자는 어디 있습니까?”
“제 비서가 데리러 갔으니 곧 올 겁니다.”
“좋아요. 아, 그리고 이건 부탁했던 자료입니다.”
최미진의 말에 오른쪽에 서 있던 직원이 들고 있던 파일철을 내게 넘겼다.
“조사를 끝낸 클럽과 마약 피해자 목록입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서 양이 많지는 않지만, 서울과 부산은 대부분 끝냈습니다. 부산은 사계 길드가 큰 도움이 되더군요.”
“감사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줬으니 감사 인사는 제가 해야죠.”
차분하게 설명한 최미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계 길드와 길드 관리 본부는 힘을 합쳐서 우리가 에이튼 클럽에 잠입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부산 클럽들을 일일이 확인해 봤다. 그 결과, 총 네 군데에서 마약 유통범을 잡아낼 수 있었다.
‘부산에서 잡힌 놈들은 프라우스 신도단 일원이 아니라 이명수처럼 고용된 경우에 가까웠지만.’
권정한에게 사계 길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프라우스 신도단 관계자가 더 잡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어쩔 수 없지. 마약을 몰아낸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마스터.”
주차장 가장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서혁이 다가왔다. 그 옆에는 셔터 아이템인 수갑을 손목에 차고 눈가리개를 한 이수진도 함께였다.
“데려왔습니다.”
이수진을 확인한 최미진이 눈짓을 하자 뒤에서 기다리던 직원들이 이수진에게 다가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수진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신을 부축하는 직원들을 따라 열려 있는 차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보던 최미진이 입을 열었다.
“이름이 이수진이라고 했던가요? 당신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냈습니다.”
“…….”
그 말에 이수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신경한 눈빛으로 이수진에게서 시선을 돌린 최미진이 나와 천사연을 한 번씩 보고는 말했다.
“어차피 두 분도 나중에 알게 될 테니 그냥 말씀드리죠. 미국에 있다는 이수진의 부모는 실종된 지 한 달이 넘었다고 합니다.”
“실종이요?”
“다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고 하는군요. 저는 그걸 프라우스 신도단이 한 짓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실종된 지 한 달이 넘었다면, 이수진이 한국으로 오자마자 사라졌다는 건가.
이수진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지하 주차장 특유의 창백한 불빛 아래로 드러난 얼굴 일부분은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겠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많은 부분이 망가진 상태라서 여기까지가 한계더군요.”
최미진이 자존심 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고민하다가 조심히 물었다.
“혹시 이수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수진 능력자는…….”
잠시 멈칫한 최미진은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희 길드 관리 본부에서 감시받으며 능력을 훈련하게 될 겁니다.”
“훈련 말입니까?”
“일단은 희귀한 염동 능력자이니까요. 범죄를 저질렀다고는 해도 내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수진 능력자도 이제는 프라우스 신도단에게 좋은 감정은 없을 테니까요.”
확실히… 이수진의 실종된 부모와 프라우스 신도단이 연관이 있다면 그렇긴 하겠는데.
“여러모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으면 소식을 전하도록 하죠.”
“네. 마약 해독제는 완성되는 대로 보내겠습니다. 피해가 생긴 곳에 운반 좀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수진과 최미진이 올라탄 차는 빠르게 주차장을 떠나갔다. 차가 온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기다린 뒤에 천사연에게 질문했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미국에서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는 게 확실한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이는군.”
“천사연 마스터. 부탁 하나만 하겠습니다.”
어제 일이 미안하면 순순히 들어 달라는 뜻을 담아 당당하게 말하자 천사연이 눈꼬리를 살짝 접었다.
“부탁이라. 뭐지?”
“미국에 있는 아테나 길드에 공식적으로 방문 요청을 좀 넣어 주세요.”
아테나의 부마스터인 클로에와 그녀의 동생 에드워드. 나는 그 두 명을 떠올리며 천사연을 향해 자신 있게 웃었다.
“어차피 같이 가실 거 아닙니까? 미국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