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21)화 (221/394)

221화

56. 그늘 너머의 이면

“야… 너 지금 뭐 하냐?”

“뭐가 말이지?”

천사연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분명 알아듣고서도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가증스러운 놈.

“놔.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고.”

“이럴 때?”

내 말을 그대로 따라 한 천사연이 허리에 손을 감은 채로 싱긋 웃었다.

“이럴 때라는 게 무슨 뜻이지? 나도 딱히 더 할 생각은 없는데.”

“미친…….”

욕을 하며 찰싹 달라붙은 천사연을 팔로 열심히 밀어 봤지만, 녀석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힘만 세서.

‘또 이러네.’

이전에 천사연이 몇 번이고 비슷한 행동을 했던 것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녀석을 밀어내던 것을 포기하고 몸에 힘을 풀었다. 지금은 이런 거로 씨름할 시간 없었다.

“천사연, 이번 마약 사건 말인데.”

“말해.”

“너도 처음 겪는 일이라고 했잖아.”

마약이 퍼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천사연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다.

“그럼 닥터는? 그 남자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던 건가?”

“…….”

내 질문에 천사연은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던 나는 곧 결론을 내렸다.

알고 있었구나. 그럼 닥터는 사마엘이나 아벨과 마찬가지로 주요 인물인 게 확실했다.

“그놈들이 미국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이 부분도 모르는 거야?”

“글쎄.”

천사연은 미적지근한 대답만을 내뱉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재차 물었다.

“확실하게 말해. 그래야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정할 수 있어.”

“…….”

“이제 와서 또 숨길 작정은 아니겠지? 아무 의미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프라우스 신도단은 지금….”

“그래.”

내 어깨를 확 끌어당긴 천사연이 고개를 숙였다. 볼을 만져 오는 차가운 손길과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을 마주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껏 겪어 오지 못한 문제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마약 사건도 닥터가 모습을 드러낸 시기도… 무엇 하나 이전과 맞는 게 없지.”

천사연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평온했지만 담긴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마약 건이 해결되는 동안 모든 걸 내게 맡기고 한발 뒤로 물러서 있던 천사연. 그가 이번 사건을 어떤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을지 궁금해졌다.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모른다는 뜻이야?”

“그게 중요한가?”

“중요해.”

천사연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 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게 가장 중요해.”

“미국까지 직접 갈 작정이군.”

“그거야 당연히…….”

대답하던 나는 평소와는 다른 천사연의 표정을 알아챘다. 내 볼을 붙잡고 있는 녀석의 손목을 천천히 쥐며 시선을 맞췄다.

“천사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제대로 해.”

“하고 싶은 말?”

“불만이 있으니까 이러는 거잖아, 지금. 내가 너 하루 이틀 보냐?”

천사연이 재밌다는 듯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불만이라.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건 맞지만.”

“무슨 뜻이지?”

“뭐가 문제인지 나도 모르겠다는 뜻이다.”

천사연이 손가락 끝으로 내 오른쪽 눈을 가볍게 쓸어 만졌다.

“하나만 묻지. 한이결, 네가 이 정도로 프라우스 신도단에 관여하는 건… 그쪽에서 너를 노리고 있기 때문인가?”

“…….”

“그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나?”

생각지도 못한 말에 미간을 좁혔다. 다른 이유라니.

‘아무래도 좀 눈치챈 것 같은데.’

천사연이 이번에도 프라우스 신도단을 이기지 못하고 칼리에게 진다면, 그래서 시간이 또 되돌아간다면 나는 한이결의 몸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진다.

엘로힘의 설명대로라면 내가 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이 세계도 끝나 버릴 위험이 컸다. 여러모로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 굳이 천사연에게 알려 주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껏 보여 준 모습을 보면 세계가 불안정한 상태라는 건 녀석도 알고 있는 듯했지만, 내가 사라진다는 건 모르는 게 확실한데.

‘지금은 말해 줘 봤자 혼란만 주겠지.’

마약 문제도 제대로 마무리를 지어야 하고 미국으로 잡혀간 제작자들의 행방도 알아봐야 한다. 이렇게 할 일이 많은 상황에서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괜히 입에 올릴 필요는 없다.

고민을 끝낸 나는 천사연의 손을 얼굴에서 떼어 내며 대답했다.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 닥터가 한 말을 우서혁 씨에게 전해 들었을 텐데? 중국에 가 있는 동안 프라우스 신도단이 나를 찾아다녔다고. 그러니까 앞으로도 경계를 늦출 수 없어.”

제 손을 잠시 내려다본 천사연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정말 그게 끝인가?”

“그래. 프라우스 신도단을 완전히 없애지 않는 이상은 계속 위험할 거라고. 너도 알잖아, 천사연.”

나와 천사연의 대화가 점차 격해지자 맞은편 소파에 있던 여우가 몸을 바싹 낮추고는 낑낑거렸다.

“저번처럼 또 습격당하지 않으려면 미리 대비해야 해. 그러니까 뭔가를 알고 있다면 더는 숨기지 말고 제대로 말을… 윽!”

순식간에 어깨를 붙잡혀 강한 힘에 상체가 뒤로 휙 넘어가 그대로 소파 위로 쓰러졌다.

“…무슨 짓이지?”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기분은 더러웠다. 이 새끼가 잘 얘기하다가 왜 또 이 지랄이야?

‘하도 당해서 이제는 놀랍지도 않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거지….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천사연을 올려다본 나는 어깨를 움찔 굳혔다.

“…….”

“…천사연.”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쓴 미소를 짓고 있는 천사연은 커다란 손으로 느릿하게 내 목을 감싸 쥐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네 말이 맞아, 한이결.”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긴장감이 밀려왔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짓누르던 예전과 달리 내 살결을 가볍게 매만진 손은 천천히 뒤로 향했다.

왼쪽 귀 뒤와 그 아래 부근, 하태헌이 준 아트 인벤토리가 새겨진 그곳을 천사연이 집요하게 문질렀다.

“너도 프라우스 신도단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으니 굳이 숨길 필요는 없지.”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대답해 줘야 할 이유도 없다. 내게서 무언가를 얻고 싶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

“거래하자는 거야?”

“싫은가?”

싫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천사연이 대가 운운하는 것도 이미 익숙했다.

‘생각해 보면 이전에 꿈에서 만났을 때도…….’

관계 회복이 아닌 이용하는 쪽을 선택한 천사연. 엘로힘은 녀석이 너무 오랜 시간 혼자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하자. 천사연, 너도 그걸 원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좋아.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나도 마음 편하겠어. 대가를 말해.”

거래를 순순히 받아들이자 천사연이 마치 가면을 쓰듯 무표정한 상태로 입을 열었다.

“족쇄를 다시 채워, 한이결.”

“뭐?”

“족쇄를 채우고 이곳에 남아 있어. 미국은 나 혼자 갈 테니.”

상상도 못 했던 요구에 머릿속을 복잡하게 채웠던 모든 생각이 뚝 끊겼다.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천사연을 살펴봤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얼굴. 나를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래.”

“너 혼자 미국으로 가서 뭘 할 수 있다는 건데? 이딴 개 같은 거래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

“그럼 정보를 포기해.”

냉정한 대답에 뜨거운 감정이 속에서부터 울컥 치솟았다. 심장 부근을 쿡쿡 쑤셔 오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냉정해지자며 굳게 다짐한 각오는 이미 파도에 휩쓸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왜 자꾸 이런 식으로 말을 해? 왜 미국에 혼자 가려고 하냐고. 이번 마약 사건을 해결하면서 아무것도 못 느꼈어? 나는 너를 진심으로 돕고 있는데.

“천사연, 너는 왜…….”

나를 믿지 못하는 거지?

끝까지 뱉어 내지 못한 속마음은 허무하게 흩어졌다.

네가 이 지옥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야 나도 살 수 있다… 이걸 말하면 뭐가 달라질까? 너는 이미 내가 내민 손을 거절했는데.

“…읏, 이용하겠다고 했잖아.”

천사연의 팔을 거칠게 쳐 내며 말하자 검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천사연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나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누군가를 쉽게 믿지 못하는 건 결국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천사연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내가 아는 건 그가 지금 이 순간에도 힘겹게 견디고 있다는 것뿐.

하지만… 결국엔 나도 사람이라서. 서로 같은 운명이 된 천사연이 내게 보이는 냉담한 태도가… 어쩔 수 없이 서운했다.

“나를 이용하겠다고 네가 선택했잖아. 그랬으면 선을 지켜.”

“…….”

“내가 어떤 상황이 되든 프라우스 신도단만 처리할 수 있으면 상관없잖아. 그러니까….”

“쉽게 말하지 마.”

내 말을 단호하게 끊어 낸 천사연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거칠고 메말랐다.

“나라고… 그런 선택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내게서 몸을 뗀 천사연은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소파에서 일어나 내게 거리를 벌리는 그의 모습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 같았다.

“……천사연.”

내 부름에도 그는 끝까지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며 그대로 몸을 돌렸다. 방을 떠나가려는 천사연을 나는 차마 붙잡지 못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털을 바싹 세운 채로 천사연을 경계하던 여우가 그제야 안심하며 내게 달려와 품에 안겼다.

따듯한 여우의 체온을 느끼며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에는 아까 천사연에게 건넸던 물 잔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천사연은 처음부터 나를 미국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서… 설득하려고 한 건가.’

목을 잡고 협박하는 시늉만 한 것도, 거래를 운운한 것도 다 그래서겠지.

하지만 대체 왜? 클럽에 잠입했을 때까지만 해도 굳이 막으려고 하지 않았잖아.

그때와 지금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한참을 생각해 본 뒤에야 나는 깨달았다.

‘설마 내가 마약에 당한 것 때문에?’

그것 말고는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머리 아프게 고민한 결과가 꽤 허탈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이없는 놈…….”

예전에는 천사연이 이런 식으로 행동할 때마다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큰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간 천사연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천사연이 아직 내 곁에 있다면… 솔직하게 묻고 싶었다.

나를 걱정했어? 미국에 가지 말라는 것도 나를 걱정해서 한 말이야? 그래도 나를… 조금은 믿고 있나?

‘뭐, 물어봤자 순순히 대답해 줄 성격이 아니긴 하지.’

상대에게 닿지 못하고 내 마음속에 묻어 둘 질문들이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꺼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