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55. 단서
왜 웃냐고 따질 수도 없고… 아무튼,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상황이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무슨 상황을 말하는 거지?”
“그야 당연히…….”
천사연의 되물음에 살짝 당황한 나는 박건호와 우서혁에게 시선을 보냈다. 클럽에서 있었던 일 설명 안 했나?
나와 눈을 마주친 박건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가 웃고 있지 않은 건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터라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야… 정말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복잡한 기색으로 입가를 매만진 박건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참,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줄이야…….”
“예?”
“데려온 두 명은 일단 치료해 놨다. 자세한 얘기는 우서혁 비서가 해 줄 거고.”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우서혁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약을 강제로 마셨던 여성분은 몸 상태를 검사한 후 병실로 옮겼습니다.”
“마약 반응은요?”
“이전 피해자들과 비슷했습니다. 다만 이렇다 할 공격 능력은 없는 데다 중간중간 기절한 터라 큰 소란은 없었습니다.”
“이수진… 프라우스 신도단 관계자는 어디 있습니까?”
“이전에 심문실로 사용했던 지하 훈련실에 감금했습니다. 머리에 상처는 치료했으니 건강에 문제는 없습니다.”
“아직 심문은 안 한 거죠?”
“네.”
내 질문에 권정한이 대신 대답했다. 심문도 안 했다니. 내가 약 기운에 빠져 있는 동안 다들 그럼 무엇을 한 건지 의문이 좀 들었지만, 일단은 넘어가자.
“마약이 담긴 술은 제 인벤토리에 잘 있습니다. 하태헌 씨, 루젤과 루크 씨에게 연락 좀 넣어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마약은 루젤과 루크 씨가 도착하면 바로 넘기고, 지금은 이수진을 만나러…….”
“한이결 씨.”
더 늦어지기 전에 심문하러 가려는데, 나를 가로막은 우서혁이 피곤한 기색으로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이수진이라는 관계자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제대로 관리하고 있으니 우선은 씻고 식사를 하시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예? 하지만…….”
“그래. 이미 성공적으로 붙잡아 왔는데 왜 급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한두 시간 정도는 늦어져도 괜찮을 거다.”
지금껏 가만히 지켜보던 천사연도 불쑥 끼어들었다. 그걸 시작으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김우진과 민아린, 하태헌도 순서대로 한마디씩 의견을 얹었다.
“한이결, 제발… 제발 쉬면 안 돼?”
“맞아요. 이번만큼은 절대 양보 못 해요.”
“안색이 아직도 좋지 않다. 씻고 나와. 먹을 걸 준비해 줄 테니.”
“자, 잠깐만요…!”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억지로 등 떠밀려 욕실로 들어온 나는 멍청한 얼굴로 세면대 거울 앞에 섰다.
‘아니, 다들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지?’
특히 하태헌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과 어색해 보였는데. 혹시 클럽에 가 있는 동안 친분을 쌓은 건가?
레퀴엠 사람들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하태헌을 상상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레퀴엠과 로헌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라이벌 관계를 이어 온 ‘어비스’를 읽은 나로서는 지금 상황이 영 어색했다.
‘알 수가 없다니까…….’
속으로 투덜거리며 옷을 벗었다. 땀에 젖어서 찝찝한 건 사실이었으니 일단 씻긴 해야겠다. 욕실 거울로 확인해 본 얼굴은 이래저래 엉망이긴 했다.
씻고 나면 식사는 나중으로 미루고 이수진에게 가 봐야겠다. 그런 중요한 인물을 붙잡아 놨는데 밥이나 먹고 앉아 있는 건 말이 안 되지.
이수진을 보고 나면 닥터의 실험체였던 여자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그 사람에게도 물어볼 게 있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샤워기에 물을 틀고 빠르게 씻었다.
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은 것도 잠시, 욕실을 나오자마자 나는 민아린에게 손목이 붙잡혀 식탁으로 질질 끌려갔다.
“이결 씨, 이결 씨. 이것 봐요!”
잡아끄는 힘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식탁으로 다가가자 한가득 차려진 음식이 보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잡힌 손목을 슬쩍 뺐다.
“지금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식사는 나중에…….”
“어? 안 먹을 거야?”
때마침 주방에서 계란프라이가 담긴 접시를 들고 나오던 김우진이 충격받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김우진이 뾰족했던 눈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울상을 지었다. 동시에 내게 꽂히는 여러 시선이 느껴졌다.
‘이거… 너무 단번에 거절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지겠는데.’
저번처럼 천사연이 쓰레기니 뭐니 할 게 뻔했다. 나는 미소를 유지하며 접시를 내려놓는 김우진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 게 아니야, 김우진. 내가 너 요리 좋아하는 거 알잖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김우진이 몸을 살짝 떨더니 목덜미를 발갛게 붉혔다.
“하지만 지금은 해야 할 게 많으니까 어쩔 수 없…….”
“한이결.”
나와 김우진 사이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나는 깜짝 놀라며 입을 떡 벌렸다.
“하, 하태헌 씨?”
민아린이 주방에서 뭘 만들 때면 쓰던 연한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하태헌이 뒤집개를 든 채로 근엄하게 한마디 했다.
“밥 먹어라.”
“예…?”
“밥. 먹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게 민아린이 덧붙여 설명했다.
“계란프라이랑 햄 구운 건 하태헌 부마스터께서 하신 거예요.”
“무, 무슨… 어쩌다가…….”
“그냥 우진 씨 보더니 자연스럽게 가서 하시던데요?”
할 말을 잃고 멍청하게 서 있는 내 뒤에서 천사연과 박건호가 입을 틀어막고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아 냈다.
나란히 앞치마를 두른 김우진과 하태헌, 재밌어 죽으려고 하는 천사연과 박건호, 과연 내가 무슨 선택을 할지 흥미롭게 지켜보는 민아린, 권정한, 우서혁까지.
‘왜들 이러는 거야, 진짜…….’
뻣뻣하게 굳어서 눈치만 보는 나를 향해 하태헌이 턱짓을 했다.
“앉아라.”
“넵…….”
의지가 푹 꺾인 나는 순순히 식탁 앞에 앉았다. 설마 김우진과 하태헌이 힘을 합쳐서 요리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둘이 만들어서 그런지 식탁에 차려진 음식 가짓수도 제법 많았다. 어떻게 이렇게 많이 만들 수 있는 거지? 갓 지어진 따끈따끈한 쌀밥이 가득 담긴 밥그릇을 앞에 놔 준 김우진이 눈을 반짝 빛냈다.
“많이 먹어, 한이결.”
“어엉…….”
넋이 반절 나간 상태로 수저를 든 나는 열심히 요리를 입에 넣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적당히 먹고 배부른 척하자.
‘근데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요리를 잘하는 두 명이 모여서 그런 건가? 생각해 보니까 클럽에 가서 샴페인 몇 잔 마신 거 말고는 지금껏 먹은 게 없기도 했다. 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몰랐네.
피이익!
식탁 한쪽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서 내가 밥 먹는 것을 바라보던 여우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
김우진이 챙겨 준 후식까지 먹고 나니 시간은 2시간이 흘러 있었다.
이제는 정말 더 늦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모두를 재촉해서 족쇄를 풀고 이수진이 잡혀 있는 지하 훈련실로 향했다. 여우는 안타깝지만 데려갈 만한 상황이 아닌 데다, 일만 끝나면 곧장 돌아갈 거라 방에 두고 나왔다.
“힘이 약하기는 해도 염동력을 가진 상대이니 셔터 아이템은 풀지 않고 추가로 묶어 놨습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우서혁이 해 준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진은 다친 와중에도 내 몸에 꽂힌 주사기를 눌러서 약을 넣을 정도로 능력을 세세하게 다룰 줄 아는 실력자였다.
괜히 방심했다가 놓치는 것보다는 빡빡하게 잡아 두는 게 훨씬 나았다.
“그리고 조사를 좀 해 봤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지나며 우서혁은 이수진의 신상 정보를 읊었다.
“성명은 이수진입니다. 가명이 아니라 본명 맞습니다. 한국에서 살다가 16살에 가족과 다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합니다.”
“미국이요?”
“예. 능력 각성은 그곳에서 한 것 같습니다. 여권 기록상 한국은 45일 전에 들어왔습니다.”
“마약이 퍼진 시기와 비슷하네요.”
한국에서 프라우스 신도단과 접촉하여 마약을 퍼뜨렸다기에는 촉박한 시간이었다.
‘그럼 설마 미국에서부터?’
프라우스 신도단이 전 세계적으로 골칫거리인 것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지난번 이명수를 묶어 놨던 지하 3층 가장 안쪽 훈련실. 문을 열자 의자에 온몸이 묶이고 눈이 가려진 이수진이 보였다. 셔터 아이템인 수갑 또한 양손에 고스란히 채워져 있었다.
“…너무 늦게 오네. 한참을 기다렸는데.”
깨어 있었던 건지, 우리가 오는 소리를 들은 이수진이 샐쭉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클럽에서부터 느꼈지만 참 대단한 성격이네. 나도 픽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그쪽이 준 마약이 꽤 오래가서.”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이수진이 의외라는 기색을 보였다.
“흐흥, 제법 멀쩡해 보이네? 이틀은 더 기어 다닐 거라고 예상했는데… A급이라 이건가?”
확실히 아직도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굳이 티를 내 봤자 좋은 것 없으니 최대한 숨길 뿐이었다.
“뭐, 생각보다 별거 아니던데요?”
“구라 치네. 하여간 남자 놈들이란.”
“…….”
나름 농담한 거였는데 너무하네. 머쓱해진 나는 괜히 헛기침하고는 본론을 꺼냈다.
“이수진 씨. 당신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주면 풀어 줄 거고?”
“글쎄요. 풀어 주는 건 힘들 것 같은데.”
“그럼 나도 말해 주고 싶지 않은데?”
“그건 우리 쪽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내 답에 잠시 멈칫한 이수진이 어딘가 쓰게 느껴지는 웃음을 흘렸다.
“정신계 능력자까지 있나 보네. 제대로 걸렸잖아, 진짜 짜증 나게…….”
“고문보다 낫지 않습니까? 죽이지도 않을 겁니다. 그저 잠시간 협조한다 생각하세요.”
“고문? 할 수는 있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합니까? 필요하면 합니다. 그걸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자체가 좋은 거고.”
장난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뒤에서 기다리는 권정한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가 내게 바싹 붙으며 상체를 조금 숙여 줬다.
“최대한 내 말에 따르도록 해 줄 수 있어?”
“직접 하시게요?”
나는 천사연과 하태헌에게 시선을 보냈다. 하태헌은 네 마음대로 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천사연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아무래도 이수진은 내가 직접 클럽에서 데려왔으니 전적으로 맡기려는 모양이다. 그럼 나야 고맙지.
“그러려고.”
“흠… 글쎄요. 저번 남자보다 등급도 높고 정신력이 강해서 신뢰감을 좀 주는 정도로는 부족할 것 같아요.”
“그럼 어려운 건가?”
“이럴 때 쓰는 방법이 있긴 해요. 저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혹시 눈가리개 풀어도 되나요?”
권정한의 질문에 천사연이 잠시간 입가를 매만지다가 대답했다.
“염동력을 가진 데다 국내 소속이 아니니 일이 다 끝나면 최미진 센터장에게 넘겨야 하니… 우리 모습이 드러나도 큰 상관은 없긴 한데. 하태헌 부마스터는 잠시 나가는 게 어떻지?”
“아니. 로헌도 괜찮다.”
“그렇다는군.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둘이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천사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눈꼬리를 살짝 휘며 웃은 권정한이 내게 물었다.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도와 달라고?”
“네. 그래야 가능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당연히 도와줘야지.
“뭐 하면 되는데?”
“그냥 제 옆에 서 있어 주세요.”
그거면 끝인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은 권정한이 앞으로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