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16)화 (216/394)

216화 

짙은 어둠이 점차 물러나고 창밖이 새파란 빛으로 가득 차올랐다.

새벽 다섯 시를 지나 여섯 시가 다 되어 가는 늦은 시간, 벽에 기댄 채로 서 있던 천사연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으, 흐윽…! 아……!”

물기에 젖은 신음 소리가 침실 문 너머에서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그뿐만 아니라 고통에 발버둥을 치는지 쿵, 하며 가구에 몸이 부딪히는 소리나 쇠사슬이 쓸리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이… 사님, 제발…! 으읏, 헉…….”

한이결이 마약에 당한 채로 돌아와 침실로 도망치듯 들어간 지 두 시간이 넘어갔다. 그는 몇 번이고 ‘이사님’을 부르짖으며 빌고 또 빌었다.

‘통증은 환각 다음일 텐데. 무언가에 타지 않은 마약 자체를 몸에 받았으니 경계가 희미한 건가.’

환각과 통증을 동시에 겪고 있을지도 모르는 한이결을 떠올리며 천사연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해야 할 일이나 생각할 것이 많은데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자꾸만 치솟아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불쾌한 기분과 무력감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으, 아, 아아악! 흐… 으, 아아!”

30여 분 정도 시간이 더 흐르자 고통에 찬 거친 목소리가 비명을 내질렀다. 가구나 벽에 몸을 부딪치는 빈도수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피익, 침실 가장 가까운 벽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던 여우가 비명이 들릴 때마다 귀를 움찔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하아…….”

침실 문 근처에서 서성이던 하태헌이 커진 비명 소리에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지친 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침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고 싶지만 겨우 참아 내고 있었다.

역시 보내는 게 아니었다. 마약이고 뭐고 그냥 제집에 가둬 둘 걸 그랬다. 최소한 천사연이 채운 족쇄를 풀게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한이결의 비명이나 발버둥 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하태헌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지금 몇 시간 지났지?”

소파에 앉아 있던 박건호의 물음에 컵에 가득 담긴 찬물을 한 번에 들이켠 권정한이 평소보다 낮은 음성으로 답했다.

“곧 세 시간 되어 가요.”

“후…….”

술과 섞인 것을 먹어도 최소 두세 시간 동안 고통스러워했으니, 한이결은 그보다 더 오래 버텨야 할 것이다.

그 막막함에 박건호는 미간을 강하게 찌푸리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이결 씨… 괜찮겠죠?”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민아린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지금은 잘 버텨 주고 있지만, 마지막은… 혹시 이결 씨가 자해라도 하면…….”

“상처가 나면 피 냄새가 날 테니 분명 마스터께서 알아채실 겁니다.”

민아린의 걱정에 우서혁이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도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았다.

“맞습니다. 그리고 하태헌 부마스터도 계시니… 지금은 한이결을 믿고 기다려 줘야 합니다.”

설명을 덧붙인 박건호는 김우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창백하게 질린 채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김우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상태가 나빠 보였다.

그걸 알면서도 들어가서 쉬라는 말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김우진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이 자리를 차마 떠날 수 없었으니까.

한이결이 애타게 부르며 용서를 빌던 낯선 이에 대한 의문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모두에게 그런 부분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진 씨, 저…….”

처참한 심정으로 이 악몽을 견뎌 내던 민아린이 아주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그저 이결 씨가 좋으니까… 언제나 함께 있으려고, 그래서 도왔는데.”

“…….”

“이제는…….”

덜덜 떨리는 두 손에 힘을 줘서 주먹을 쥔 민아린의 두 눈동자가 음울하게 빛났다.

“이결 씨와 같은 생각이에요.”

민아린과 김우진은 이제 한이결이 무엇을 숨기고 있든 상관없었다.

“저는 힘이 없어서 프라우스 신도단을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둘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이결의 안위였다. 그것만 지킬 수 있다면 뭐든 할 자신이 있었다.

“죽이는 것을 도울 수는 있어요.”

분명 한이결도 그렇겠지.

“진심으로 이결 씨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요.”

만약 언젠가 정말 그런 순간이 온다 하더라도 한이결은 아마 망설일 수도 있다.

이번에도 마약을 팔던 여자를 살려서 데려왔으니까. 심문할 필요가 없더라도 그는 똑같이 행동했을 거다. 그 때문에 자신이 저런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된다 하더라도.

그러니 민아린과 김우진은 같은 다짐을 했다. 그때는 한이결을 대신해서 자신이 적을 죽이겠다고.

해가 떠오르며 창밖에 환한 빛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간은 7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지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이럴 때는 기절이라고 해야 맞는 건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자 침실 바닥이 보였다. 딱딱한 바닥에 쓰러져 있어서 그런지 조금만 움직여도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콜록, 헉, 크흠.”

비척거리며 겨우 상체를 일으키며 헛기침을 했다. 계속 소리를 질러서 그런지 목이 좀 잠겨 있었다.

“하아…….”

그것 좀 움직였다고 기운이 쭉 빠져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방금 일어났는데도 사흘 밤을 새운 것처럼 지독하게 피로했다.

“아, 죽겠네.”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장난처럼 투덜거렸다. 약 기운은 이제 다 빠져나간 듯싶었다. 쉬지 않고 이어지던 통증도 이제 멎었으니까.

방에 들어와서부터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생각나는 건 몇 없었다. 고통에 발버둥 치던 기억만 드문드문 떠오를 뿐이었다.

마약을 희석하지 않아서 그런가, 1단계 환각부터 3단계 우울증까지 진행되는 동안 고통은 사그라지지 않고 계속됐다. 2단계에서는 유난히 더 심했고.

나는 희미하게 떨리는 손을 들어 배나 가슴을 더듬었다. 마치 누군가가 마구잡이로 내장을 찢어 내는 것 같았는데. 역시 그냥 착각이었군.

마음 같아서는 침대에 드러누워서 다시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클럽에서 데려온 피해자와 이수진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도 해야 했고, 인벤토리에 넣어 둔 술을 루젤에게 넘겨야 했다.

“몇 시지?”

테이블에 올려진 탁상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 반이라. 약 기운이 오래 돌았던 건지, 기절해 놓고 늦게 깨어난 건지 모르겠네.

예상보다 훨씬 늦어져서 그런지 마음이 급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침실을 나서려던 나는 무언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읏……!”

헛숨을 들이켜며 다시 바닥에 나자빠지고 나서야 눈앞에 있는 게 전신 거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없어서 체인징 아이템을 빼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았다.

“아…….”

그 짧은 사이에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가는 오싹한 감각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쿵쿵, 거칠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가득 울렸다. 나는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한 끝에 꽂아 놨던 넥타이핀을 빼냈다.

아이템을 빼자마자 머리와 눈에 따끔한 전류가 흐르더니 색이 다시 돌아왔다. 맞은편에 있는 거울에 얼빠진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한이결의 모습이 비쳤다.

“하… 하하…….”

그걸 보자 비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꼴사나운 권세현.

이제는 두 번 다시 그 남자를 만나지 못할 텐데. 괜히 겁만 먹어서는….

“…….”

입 안이 지독하게 썼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잔뜩 망가진 앞머리를 손으로 흩트렸다.

…그만하자.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넥타이핀은 인벤토리에 넣어 두고 재차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 누가 남아 있으려나. 김우진이나 민아린 정도는 있을 것 같은데. 하태헌은 분명 돌아갔을 거고…….

‘천사연도 지금쯤이면 일하러 갔겠지? 연락을 해 봐야겠네.’

엮인 이들이 하도 많아서 일일이 인원 체크하는 것도 일이었다. 모두 모이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 그동안 씻어야겠다.

잠금을 풀고 침실 문을 열었다.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거실로 가려던 나는 침실 바로 앞에 우뚝 서 있는 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천사연?”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서 차가운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상대는 분명 천사연이 맞았다.

저 새끼가 왜 아직도 여기 있지? 심지어 기분도 엄청나게 더러워 보이는데.

“한이결!”

피이익! 피익!

“윽, 김우진.”

당황해서 뭐라 말하기도 전에 커다란 덩치가 빠르게 달려와 품에 안겨 들었다. 김우진과 마찬가지로 헐레벌떡 날아온 여우가 어깨 위로 올라와 서글프게 울었다.

김우진의 갑작스러운 포옹은 이미 몇 번이고 겪었던 터라 익숙하게 등을 토닥였다. 목덜미에 닿아 오는 체온이 평소보다 뜨끈뜨끈한 걸 보아하니 또 우는 게 분명했다.

“이결 씨, 괜찮으세요?”

“한이결.”

김우진과 천사연뿐만 아니라 속상한 표정을 한 민아린과 하태헌이 내게 재빨리 다가와 몸을 살폈다. 그 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권정한과 박건호, 우서혁도 보였다.

‘아니, 이 사람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설마 한 명도 빠짐없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무엇보다 로헌 일도 있는 하태헌은 분명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혹시… 다들 계속 기다렸습니까?”

“네.”

간결한 대답의 주인은 권정한이었다. 그는 친절히 설명도 덧붙였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요.”

“…….”

그 말에 어째 좀 창피해졌다. 아파서 정신 못 차리고 그 난리를 쳤으니…. 아무리 방음이 잘되어 있다 해도 분명 들렸을 거다.

‘자리 좀 비켜 주지. 듣고 있을 만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환각 단계에서 그 남자에 관한 말도 막 내뱉은 탓에 이래저래 신경이 쓰였다. 그것도 새어 나간 건 아니겠지?

당장이라도 누구 한 명 붙잡고 이것저것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상황 정리가 우선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멀쩡해요. 김우진, 비켜 봐. 나 안 씻어서 냄새나.”

찰싹 달라붙어 있는 김우진을 억지로 밀어내자 예상했던 대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얼굴이 나타났다. 아이고, 저런.

그걸 보니 양심이 바늘로 찔리듯 콕콕 쑤셔 왔다. 무서운 표정으로 내 손목을 강하게 붙잡고 있는 하태헌도, 눈가가 발긋한 민아린도 신경 쓰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죄송합니다, 방심해서. 다음에는 이런 일 없게 조심하겠습니다.”

“다음?”

“…….”

솔직한 마음을 담아 사과하자 가만히 나를 지켜보던 천사연이 내 말을 따라 하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뭐지? 갑자기 엄청나게 불안해졌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