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15)화 (215/394)

215화

  

“권세현!”

뜨겁게 치솟은 불길 너머에서 박건호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이수진을 등에 업었다.

‘버텨야 해…….’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시야를 가리는 불길을 밀어내고 걸어 나오자 바닥에 쓰러진 가드들과 나를 기다리고 있던 박건호, 우서혁이 보였다. 우서혁은 싸움이 끝나자마자 변신을 풀었는지 새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빨리 나가죠.”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안색이…….”

내 얼굴을 본 박건호와 우서혁이 동시에 안색을 굳혔다. 젠장, 그 짧은 사이에 벌써 티가 날 정도로 약 기운이 도는 건가?

“일단 나가요.”

“…….”

내 재촉에 우서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수진을 나 대신 업었다. 방을 빠져나오자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계획했던 대로 우리 신호를 들은 레퀴엠에서 신고해 준 모양이다.

“제 능력으로, 헉, 날아갑시다….”

“…괜찮겠습니까?”

“어쩔 수 없어요.”

날개 달린 여자와 이수진을 업은 상태라 사람이나 구조대원이 몰려든 정문으로 갈 수 없었다. 다행히 복도 창문이 꽤 커서 나가는 데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아, 지금… 약 기운이…….’

심장이 뻐근하고 몸속이 뜨거웠다. 입 안이 바싹 마르고 호흡이 갈수록 답답해져서 숨소리가 절로 거칠어졌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바람을 끌어모아 모두의 몸을 감쌌다.

“저를 놓지 마세요.”

각자 부상자를 등에 업은 박건호와 우서혁의 손을 잡고 창문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행히 정문 쪽에 인파가 몰렸는지 건물 뒤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모르니 위로 높게 날아오른 나는 차가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헉, 흐으… 으…….”

눈을 뜨고 있는데도 자꾸만 어딘가에서 어둠이 덮쳐 와 시야를 가렸다. 기운도 갈수록 불안정해져서 안정적으로 날 수가 없었다.

클럽과 주차장 간 거리가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비틀거리며 겨우 주차장에 도착한 나는 아래로 내려왔다.

“한이결.”

권세현이 아닌, 다시 한이결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부른 박건호가 휘청이는 내 어깨를 잡았다.

“왜 그러는 거지? 설명해.”

“윽, 마약을…….”

자꾸만 깜빡거리며 끊기는 정신으로 아까 이수진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수진, 저 여자의 능력이… 염동력이었습니다.”

“염동력? 염동력이라고?”

“B급인 데다 기운이 그리 강하지 않으니… 능력 사용에 한계가 있겠지만, 헉, 주사기를 저한테…….”

제대로 된 설명이 아닌데도 박건호와 우서혁은 곧장 이해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바로 출발하는 게 낫겠습니다. 주사기에 든 게 마약이 맞다면 한이결 씨 상태가 더 악화할 가능성이 큽니다.”

업고 있던 이수진을 뒷좌석에 내린 우서혁은 혹시 몰라 챙겨 온 셔터 아이템인 수갑으로 양손을 채우고 눈을 안대로 가렸다. 박건호도 그 옆에 날개 달린 여자를 조심히 내려놨다.

“한이결은 우서혁하고 같이 조수석에 앉도록.”

평소라면 나는 따로 날아갔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가다가 도중에 추락할 게 뻔했다. 욕심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때였다.

“아…….”

갑자기 몸에 힘이 쭉 빠지며 크게 휘청였다. 시멘트 바닥 위로 무너지려는 나를 우서혁이 급히 잡아 줬다.

시야가 마구잡이로 뒤틀렸다. 물에 잠긴 것처럼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의식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씨, 한이결 씨.”

“으, 흐윽, 아…….”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힘겹게 뜬 눈앞에 유리창이 보였다. 그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야경 불빛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누군가에게 안겨 있는 게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왜 이렇게 춥지?

“…더 버텨, 한이결… 곧… 하니까…….”

“듣고 있습… 괜찮…….”

익숙한 음성. 그제야 박건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길드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품에 안은 채로 조수석에 앉아 있는 우서혁의 존재도.

괜찮다고 말해 주려고 해도 입술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꾸만 의식이 뚝뚝 끊겨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가 힘들었다.

‘지금… 약이… 몸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된 거지?’

10분? 20분? 효과가 나타나려면 20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세현아.]

“……!”

두 눈이 절로 번쩍 떠졌다. 긴장으로 어깨가 딱딱하게 굳고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말도 안 돼. 설마. 그럴 리가… 어떻게 그 남자가…….

“한이결 씨?”

[세현아.]

우서혁과 그 남자가 동시에 나를 부른다. 입술을 피 나도록 깨물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니야…….’

이건 모두 가짜다. 약물이 만들어 낸 환청이고 환각이야. 지금 들려오는 저건, 그러니까….

‘침착해… 침착해야…….’

이제야 마약을 먹은 능력자들이 왜 그리 공포에 떨었던 건지 이해가 됐다.

‘기운이 점점…….’

잔뜩 긴장한 몸에 기운이 본능적으로 날카롭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발 빨리 도착해라. 제발.

혹시라도 그 남자의 얼굴을 보고 능력을 써 버릴까 봐 눈을 꾹 감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차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1분 1초가 억겁처럼 느껴졌다.

“한이결 씨. 도착했습니다.”

나지막이 속삭인 우서혁이 나를 안아 들고 차 밖으로 내렸다. 나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바로 23층으로 데려가, 우서혁 비서. 나도 곧 뒤따라갈 테니.”

이수진과 다친 여자를 차 안에 그대로 두고 갈 수는 없는 터라 누군가가 남아서 정리를 해야 했다. 박건호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은 우서혁이 나를 안고 주차장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까지 가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시야가 점멸했다. 무엇보다 그 남자의 목소리가.

[세현아.]

계속해서 내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으…….”

극한으로 치달은 불안감으로 기운이 계속해서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대로 나를 안고 있으면 다칠 수도 있는데도 우서혁은 결코 나를 놓지 않았다.

“한이결 씨, 도착했습니다.”

우서혁이 도어 록 비밀번호를 다급하게 눌렀다. 문이 열리자 피익, 하는 여우 울음소리와 함께 익숙한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결 씨!”

“한이결!”

“다친… 다친 겁니까?”

“마약에 당했습니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서 대답한 우서혁이 소파에 조심스럽게 몸을 내려 줬다. 걱정하는 말들이 여럿 들려왔지만, 그 어떤 것에도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아…….”

가슴에서부터 번져 나간 뜨거운 불이 모든 것을 좀먹어 가고 있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점점 더 내 통제를 벗어난 바람이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해칠 것처럼 날카롭게 휘몰아쳤다.

안 돼, 이대로 가다가는…….

두 팔에 힘을 주고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나는 눈물에 흐릿한 시야로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창백하게 질린 채로 나를 바라보는 김우진과 민아린, 급히 내게 다가오는 하태헌,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을 한 권정한, 무어라 말을 하는 우서혁. 그리고…….

쿠웅,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떨어지듯 소파 아래로 내려온 나는 주저앉은 채로 눈앞의 이를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다.

“처, 천사연.”

“…….”

“족쇄, 허억, 족쇄… 다시…….”

셔터 아이템이 필요했다. 이대로 가다간 마약에 당했던 이전 피해자들처럼 능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모두를 공격할 것 같았다.

그건 정말… 죽어도 싫어서.

“제발, 천사연. 나 좀…….”

“…….”

나 좀 도와줘.

내 간절한 애원에 굳은 듯이 서 있던 천사연이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그가 이전처럼 시계 중앙 부분을 두드리자 허공에서 쇠사슬이 연결된 족쇄가 뚝 떨어졌다.

부탁을 들어준 천사연의 표정은 시야가 너무 흐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쇠사슬이 불투명한 상태인 것을 확인한 나는 족쇄를 들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휘청이는 몸을 잡아 주는 누군가의 손을 뿌리치며 천천히 침실로 걸었다.

[세현아.]

침실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자마자 문 너머에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하얗게 질린 손이 흠칫 떨렸다.

“…….”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망설인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방심해서…….”

“한이결.”

[세현아.]

마약으로 혼탁해진 머릿속에 자꾸만 환청이 울려 퍼져서 하태헌의 부름이 귀에 닿지 않았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과호흡이 온 것처럼 숨이 가쁘게 터져 나와 자꾸만 설명이 끊겼다. 바싹 마른침을 겨우 삼켜 내며 제일 중요한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제가… 제가 나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들어오지 마세요.”

해독제도 중화제도 없다. 내게 주어진 길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약 기운을 견뎌 내는 것뿐이었다.

1차는 환각과 환청. 2차는 온몸에 가해지는 끔찍한 고통. 3차는 깊은 우울증. 하지만 나는 그 어떤 것에도 희석하지 않은 마약이 체내에 들어왔으니, 아마 더 오래가거나 강도가 심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남에게 보여 줄 만한 모습은 절대 아니다…….

나는 재차 모두에게 당부했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으, 절대로….”

[세현아.]

“…….”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누구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도망치듯 침실 문을 열었다.

덜컹, 쿵. 철컥.

방 안으로 들어와 침실 문을 걸어 잠근 나는 문에 기댄 채로 주저앉았다. 천사연에게 받은 족쇄를 발목에 채우자 계속해서 주변을 감돌던 바람이 뚝 멈췄다.

“하하…….”

그제야 안도감이 들면서도 자신의 꼴이 웃겨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리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검은 구두를 신은 상대가 내게 다가와 뼈마디가 두드러진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새하얀 빛을 등지고 나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미간이 찌푸려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조용히 그를 불렀다.

“이사님.”

빛에 하얗게 부서지는 백금발이 아름다웠다. 내 태도에 만족스러운 감정을 담아낸 은회색 눈동자도.

“세현아.”

아…….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얼굴을 감쌌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거침없이 목을 틀어쥔다.

지옥의 시작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