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나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노려보는 이수진을 마주 보며 클럽에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지금으로부터 닷새 전, 클럽 잠입을 앞두고 마지막 회의를 위해 사람들이 23층 방에 모였다. 나는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른 문제 없이 마약이 든 술을 얻을 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만, 솔직히 그럴 가능성은 많이 낮습니다.”
내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천사연이 빙긋 웃었다.
“사고 칠 거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하는군.”
“아니, 그야… 수틀리면 뒤집어엎을 건 맞긴 한데요.”
“생각해 둔 건 당연히 있겠지?”
“있습니다… 조용히 좀 해 주시죠.”
진지한 분위기에 자꾸 초를 치고 있어. 짜증을 담아서 노려보자 천사연이 알겠다는 듯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가서 일 터뜨리지 않고 조용히 빠져나오는 상황은 한 가지뿐입니다. 놈들이 파는 마약을 돈을 주고 사는 것.”
민아린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런 거라면 확실히 어렵겠네요.”
“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야 좋죠. 판매하는 상품이면 술병에 든 액체가 마약인지 아닌지 그쪽에서 알아서 확인도 시켜 줄 테니까.”
하지만 그걸 기대하는 건 힘들었다. 그러니 다른 상황에도 대비를 해 둬야 했다.
“클럽 쪽에서 마약을 순순히 넘기지 않거나, 의심을 받거나, 프라우스 신도단 관계자를 만나면… 아무래도 조용히 끝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
“네. 특히 정체가 들키기라도 했을 때는 무력을 사용하는 한이 있어도 마약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다음 기회는 없을 테니까요.”
입가를 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던 박건호와 그 뒤에 서 있던 우서혁이 내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마약을 잡아내려는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알아채면 바로 모습을 감출 겁니다.”
“맞아요. 그러니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나는 천사연이 넘겨준, 위치 추적기가 심어진 손목시계를 들고 말을 이었다.
“싸워야겠다는 판단이 들면 제가 시간을 짚어 드리겠습니다. ‘30분 뒤면 11시네요.’ 이런 식으로요.”
박건호가 눈치 빠르게 내 말을 이해했다.
“11시에 싸우기 시작할 거라는 뜻인가?”
“그렇죠. 적이 근처에 있거나 도청당할 수도 있으니 대놓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천사연 마스터.”
시계를 천사연에게 넘겨주며 물었다.
“혹시 여기에 간단한 장치 하나만 추가할 수 있습니까?”
“간단한 장치라. 어떤 것을 원하는 거지?”
“버튼을 누르면 다른 곳에 신호가 간다거나 그런 거요.”
“세 개 다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테고, 하나 정도는 충분히 되겠군.”
“하나면 충분합니다. 클럽에 잠입한 저희가 신호를 보내면 바로 경찰이랑 구조대에 신고 좀 해 주세요. 전투로 건물이 무너질 수 있으니 그 전에 사람들을 대피시켜야겠습니다.”
나와 천사연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건호가 말했다.
“그럼 신호를 보내는 건 내가 하지.”
“저희도 신호를 보낸 이후에는 구조대가 도착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시계는 박건호가, 시작을 알리는 말은 내가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후, 클럽에 도착해서 이수진을 만난 뒤로도 나는 계속해서 상황을 살폈다. 신제품 테스트 제안과 지하가 아닌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결단을 내렸다.
“벌써 2시가 다 되어 가네. 슬슬 지루하니까 술만 얻으면 바로 나가자.”
엘리베이터에서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챈 박건호는 조용히 시계에 추가로 달린 버튼을 눌렀다. 레퀴엠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 신호를 보고 대신 신고를 해 주겠지.
***
이 방에 도착한 뒤로 40분이 흘렀다. 2시 10분을 넘어가는 시간을 확인한 나는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려 웃었다.
“다치기 싫으면 얌전히 항복하시고.”
내 말에 이수진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사납게 외쳤다.
“하…!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경찰 끄나풀이라도 되는 거야?”
“비슷한 거?”
바람의 강도를 높이자 방 안에 태풍이라도 몰아치는 것처럼 물건들이 모조리 나뒹굴기 시작했다. 강한 바람에 휘청이던 이수진이 외쳤다.
“우리라고 멍청하게 무작정 여기까지 부른 줄 알아? 닥터!”
살짝 어긋난 마스크를 커다란 손으로 매만진 닥터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벽에 있는 붉은 레버를 아래로 내렸다.
쿠구궁! 건물이 강하게 울리며 위잉, 하는 경고음이 크게 퍼져 나갔다. S급이라 나보다 청력이 좋은 우서혁과 박건호가 알려 줬다.
“복도 쪽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숫자는 7명 정도 되는군. 더 올 수도 있고.”
“다 때려눕히면 좋겠지만, 상황이 어렵다면 술은 이미 얻었으니 최대한 도망치는 쪽으로 해도 괜찮습니다.”
바지 주머니에서 쇠구슬을 꺼내 든 박건호가 미소 지으며 손을 들었다. 복장의 한계가 있어서 20개 정도밖에 챙겨 오지 못했으니 신중하게 사용해야 했다.
“그럼 빠르게 처리하고 빠져나가자고.”
기다란 손가락에 튕겨 나간 쇠구슬이 닥터와 이수진 사이로 정확히 날아갔다.
“으윽, 시발!”
긴장을 놓치지 않던 이수진이 재빨리 바닥으로 몸을 날려 쇠구슬의 폭발을 피해 냈다. 반대로 닥터는 무언가 투명한 막이 폭발로부터 신체를 보호해 줬다. 실드 아이템을 사용하고 있나 보군.
이수진과 달리 시종일관 여유로운 닥터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분명 상황이 이상해졌다는 것을 알 텐데,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거지?
‘분명 뭔가 있다.’
그런 와중에도 수십 개의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져서 이제 나도 들릴 지경이었다. 박건호가 쇠구슬을 날리는 사이에 뒤로 물러선 우서혁이 변신을 시작했다.
찌직, 입고 있던 흰 셔츠가 몸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졌다. 두 팔이 새까맣게 물들며 어마어마하게 커지고, 체구가 사람일 때와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크르렁! 순식간에 검은 늑대로 변한 우서혁이 내 팔뚝만 한 송곳니를 내보이며 짐승 울음소리를 냈다. 저 모습도 오랜만에 보네.
“뒤를 부탁드립니다, 우서혁 씨.”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잠겨 있던 두꺼운 철문이 벌컥 열리고 가드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느껴지는 기운을 보아 A급 이상은 없었지만, 수가 여럿이고 상대의 능력을 알지 못하니 조심해야 했다. 내 말뜻을 이해한 우서혁이 꼬리를 크게 한 번 살랑였다.
쿠궁! 쿵! 박건호가 추가로 날린 쇠구슬이 계속해서 터져 나갔다. 상자에 담겨 있던 술병이 모조리 깨져 바닥이 흥건하게 젖자 그걸 타고 불길이 번졌다.
“큭…….”
폭발에 휩쓸려 머리를 부딪쳤는지 이마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이수진이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그걸 담담히 마주 보다가 닥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맨손으로 걸치고 있던 위생 앞치마를 종이 찢듯 찢어서 바닥에 던진 닥터가 쉬익, 거친 숨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아주 개판이구만.”
등 뒤로 우서혁을 상대하고 있는 가드들의 경악과 비명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술을 타고 번져 온 불길이 우리에게 닿지 않도록 바람으로 조절하며 닥터에게 물었다.
“그쪽, 프라우스 신도단입니까?”
돌려 말하거나 협박이 통할 상대로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대놓고 물어보는 게 나았다. 그러자 닥터가 아주 재밌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낄낄거리고 웃었다.
“프라우스 신도단이냐고? 아, 시팔.”
“…….”
“이봐, 너야말로 그 애새끼 맞지?”
그는 내가 무어라 대답하든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바람 능력, 바람. 시팔. 어쩐지 아주 재밌을 것 같다는 냄새가 풍기더라니! 야, 너 새끼 하나 찾으려고 우리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
“…….”
“어디 숨어 있었어? 엉? 아… 아니지, 아니야. 됐어. 오늘은 이거로 충분해.”
갑자기 허공에 새까만 구슬이 생겨나 닥터의 손 위에 얹어졌다. 인벤토리에서 나타난 아이템이었다.
“기다려…!”
길드 관리 본부 습격 사건에서 사마엘이 사용한 아이템과 똑같다는 것을 알아챈 내가 급히 바람을 끌어모았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바닥으로 빠르게 떨어진 구슬이 액체로 변하며 거대한 구멍이 생겨나 닥터의 몸을 집어삼켰다. 아슬아슬하게 그를 잡지 못한 나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나. 그렇다 해도 저런 식으로 빠져나간다면 우리로서는 막기 힘들었다.
“권세현!”
박건호가 내게 달려드는 가드를 발로 강하게 차 내며 외쳤다.
“슬슬 나가자. 술 때문에 불이 예상보다 빨리 번지고 있어.”
“알겠습니다.”
박건호의 말이 맞았다. 닥터를 놓친 것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움직일 때였다. 나는 급히 방 안쪽으로 달려가서 갇혀 있는 여자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숨은 제대로 쉬고 있어.’
능력으로 쇠창살을 벌리고 여자의 몸을 묶고 있는 것들을 모조리 풀어 줬다. 조심스럽게 들어 안자 오래 시달린 흔적이 역력한 데다 마약까지 마신 여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좀 맡아 주세요.”
박건호에게 여자를 넘기고 이수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겨우 몸을 일으켜서 벽에 기대고 서 있던 이수진이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시발, 이래서… 끌어들이기 싫었는데… 닥터, 이 좆같은 새끼가…….”
동료에게 버림받은 이수진은 금방이라도 기절을 할 것처럼 상태가 무척 나빠 보였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의 양도 아까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걸 바라보며 고민했다.
‘데려가기는 해야 하는데.’
이미 방 안은 타오르는 불로 가득했다. 그대로 두면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든가 크게 다치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심문을 하려면 함께 가야 한다.
굳이 기절 직전인 상대에게 폭행을 가하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은 터라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만 애쓰고 잠이나 푹 주무시죠? 알아서 잘 끌고 가 줄 테니까.”
“하하… 지랄하네.”
“시간 끌면 그쪽만 후회하게 될 텐데요. 고작 이딴 곳에서 타 죽고 싶습니까?”
내 말에 이수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을 보아하니 더는 버틸 수 없어 보였다.
“고집 그만 부리세요.”
귀찮아 죽겠네. 한숨을 내쉬며 일정 거리를 두고 이수진과 마주 섰다. 그녀의 능력이 뭔지 모르니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시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힘겹게 버티던 이수진이 갑자기 나를 향해 눈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탁! 나는 휘둘러진 이수진의 손목을 단번에 붙잡았다.
“윽……!”
이수진의 손에는 아까 철제 테이블 위에 가득 놓여 있던 주사기 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목에 힘을 주자 그녀가 비명을 내지르며 주사기를 떨어트렸다.
“마약입니까?”
술병에 든 게 다가 아니었나. 이 난장판에서 용케 안 깨지고 멀쩡한 걸 찾아냈네.
“이제 그만…….”
말을 하는 도중에 목 근처에서 오싹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헛숨을 삼키며 급히 상체를 틀자마자 어깨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 마약이지.”
허공에 혼자 날아와 어깨에 꽂혀 든 주사기가 보였다. 주사기 안에 든 액체가 속절없이 내 몸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거, 설마…….
‘염동력자?’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몇 없는 염동력자 중 하나가 이수진이라고?
낭패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내게 이수진이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아무것도 섞지 않은 마약 그 자체라고! 하하, 넌 이제 뒤졌, 쿨럭! 으윽…….”
숨을 헐떡이며 말하던 이수진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침착하게 주사기를 뽑아냈다. 눈앞이 크게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