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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13)화 (213/394)
  • 213화

    54. 잠식

    내가 이수진에게 내건 조건은 총 세 가지였다.

    술을 마시는 자리에는 내 경호원들도 동행해야 하며,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마약을 먼저 넘길 것.

    “그리고 마약이 든 게 확실한지 확인도 당연히 해 줘야겠지? 그게 가짜인지 진짜인지, 눈으로는 구분이 안 될 텐데.”

    “…….”

    입을 꾹 다물고 내 말을 듣던 이수진이 핸드폰을 꺼내 잠시간 화면을 두드렸다.

    “하아, 시발.”

    두 번째 담배도 재떨이에 비벼 끈 그녀가 욕설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건을 받아들이죠. 원래는 절대 안 되는데, 우리 닥터가 만나 보고 싶다 그러네?”

    하여간, 멍청한 새끼. 나지막이 중얼거린 속삭임에는 지긋지긋하다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운 좋은 줄 알아요. 내 위치가 조금만 더 높았으면 조건이고 뭐고 당신 그냥 엎어 놓고 새 제품을 입에 쑤셔 넣었을 거니까.”

    “미안한데, 난 거친 사람은 좀 별로라서.”

    “나랑 반대네. 전 좋아하거든요, 거칠게 하는 거. 따라와요.”

    이수진이 앞장서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도 몸을 일으켜 룸 밖으로 나왔다.

    “음?”

    문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서 있던 박건호와 우서혁이 나와 이수진에게 시선을 보냈다. 눈을 깜빡인 박건호가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술 얻으러. 가자.”

    간단하게 대답하고 멈추지 않고 걷는 이수진의 뒤를 쫓았다.

    복도 끝까지 걸어간 이수진은 벽에 핸드폰 뒤를 갖다 댔다. 그러자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얇은 벽이 열리고 숨겨져 있던 엘리베이터가 나타났다.

    “타세요.”

    우리가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이수진이 숫자 2라고 적힌 버튼을 눌렀다. 우웅, 가동을 시작한 엘리베이터는 아래가 아닌 위로 향했다.

    “이 건물 자체를 사용하고 있는 건가?”

    “맞아요. 지상에 있는 1층과 2층도 모두 저희가 쓰고 있죠. 닥터가 직접 데려오라고 했으니 2층으로 바로 갈게요.”

    좋은데? 지하가 아닌 지상이라니. 뜻밖의 상황에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수진의 설명에 잠자코 서 있던 박건호가 상체를 숙여 속삭였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소리를 낮춰도 어차피 들릴 테니 나는 감출 생각 없이 평소처럼 말했다.

    “거래하기로 했어. 서로 대가를 치르고.”

    대가라는 단어에 박건호의 반듯한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대가라니, 그게 무슨…….”

    “이미 얘기 다 끝낸 사항이니까 잔소리는 하지 말고.”

    나는 몸을 살짝 돌려 박건호와 우서혁을 향해 손목시계를 툭툭 두드렸다.

    “벌써 2시가 다 되어 가네.”

    “…….”

    “슬슬 지루하니까 술만 얻으면 바로 나가자.”

    빙긋 웃는 내 얼굴을 바라보던 박건호와 우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다는 뜻이었다.

    때마침 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이쪽이에요.”

    엘리베이터 너머로 드러난 복도는 마치 병원을 연상시키듯 온통 새하얗고 깔끔했다. 좁고 어두웠던 지하 클럽과는 굉장히 상반됐다.

    복도를 여러 번 꺾어 도착한 가장 안쪽 방. 회색빛 철문에는 새빨간 글씨로 큼지막하게 ‘방해 금지’라 써진 종이가 붙어 있었다. 이수진은 문을 열기 전에 철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닥터! 안에 있어요? 저 들어가요?”

    그 외침에 철컥, 잠금이 풀리며 문이 저절로 열렸다. 평범한 철문이 아닌 모양이다.

    “후, 내 팔자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짜증스럽게 뒤로 넘긴 이수진이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어둠이 짙게 내린 방 안쪽은 어쩐지 쉽사리 발을 들이기 힘든 분위기가 흘렀다.

    “…들어가실 겁니까?”

    나와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느낌을 받은 우서혁이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수도 없잖아.”

    마음을 다잡고 방 안에 발을 들이자 철문이 굉음을 내며 저절로 닫혔다.

    “잠겼습니다.”

    혹시 몰라 문손잡이를 당겨 본 박건호가 낮게 말했다. 갇힌 건가.

    “뭐 해요, 안 오고.”

    먼저 들어갔던 이수진이 다시 돌아와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거래만 잘 끝나면 열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따라오세요. 설마 무섭다고 도망치려는 건 아니죠?”

    “설마.”

    나를 의심스럽게 노려보던 이수진이 먼저 등을 돌렸다. 어차피 저런 철문쯤이야 능력을 쓰면 쉽게 부술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생각 이상으로 넓은 방 안이 구두 굽 소리로 가득 울렸다. 방 곳곳엔 다양한 서류와 상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닥터.”

    방의 중앙, 커다랗고 긴 철 테이블 앞에 서 있는 거구의 남자를 향해 이수진이 다가섰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상태인데도 남자가 내뱉는 거친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어엉?”

    “아까 연락했던 실험체. 데려왔어요.”

    그 말에 닥터라 불린 남자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매끈한 민머리에 기계가 달린 검고 투박한 마스크로 코와 입을 모두 가린 그는 어마어마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민소매 아래 드러난 두툼한 팔 근육이 내 얼굴만 했다.

    그리고 제법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 정도면 A급인 나보다도 훨씬 강했다.

    ‘저건… 위생용 앞치마인가?’

    또한 정육점에서나 쓸 법한 방수 앞치마를 매고 있었는데, 검붉은 얼룩이 가득해서 굉장히 지저분해 보였다.

    “흠…….”

    실험체라는 말을 들은 닥터의 두 눈이 내게로 향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삐딱하게 서서 시선을 피하지 않자 그가 위생 장갑을 벗으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기운이 꽤 크긴 한데. A급 맞아?”

    “맞아요. 제가 아슬아슬하게 A급이 안 되는 수준인데, 저보다 훨씬 크니까.”

    “뒤에 있는 놈들은?”

    “우리 실험체 오빠가 키우는 개들. 아까 문자로 다 얘기했잖아요?”

    나는 차분하게 닥터 주변을 살폈다. 철제 테이블 위에는 무언가 수술이라도 한 것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핏덩이가 올려져 있었고, 그 옆에는 주사기가 가득 놓여 있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만큼 악취도 풍겼다.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닥터가 대뜸 물었다.

    “이봐. 그쪽이 마실 건가?”

    “그렇다면?”

    “왜지? 데려온 개들이 마시도록 하면 되는데. 개들 먹일 거면 두 병을 주고.”

    “…….”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는 닥터의 질문에 나는 불쾌한 감정이 훅 치솟았다.

    “우린 A급 이상이면 되니까 그쪽 대신 개가 마셔도 상관없다.”

    “……하.”

    짜증스러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닥터라는 놈이 어떤 의도로 저딴 소리를 하는 건지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더 기분이 더러웠다.

    “어디서 씨발, 남의 걸 탐내고 자빠져 있어.”

    거칠게 내뱉은 대답에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박건호와 우서혁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뜨겁게 눌어붙어서 부글거리는 속을 겨우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거래의 기본이 안 되어 있네. 어디 정신 나간 새끼가 거래 바로 앞두고 이딴 좆같은 소리를 하지?”

    “잠깐만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지자 이수진이 급히 끼어들었다.

    “진정해요, 닥터도 그냥 궁금해서 꺼낸 말일 거예요. 실험은 애초 얘기했던 대로 세현 씨만 먹어 주면 돼요.”

    “그래. 내가 원래 호기심이 많아. 그러니까 이것저것 만드는 거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닥터가 아래에 놓여 있던 박스를 꺼내서 철제 테이블 위로 거칠게 내려놨다. 박스 안에는 술병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럼 하나만 꺼내면 되겠군. 아, 원래 쓰던 것도 달라고 했던가?”

    그는 푸른색 술병과 녹색 술병을 하나씩 꺼냈다.

    “파란 게 기존에 쓰던 거. 녹색이 새로 만든 거다. 효과가 강해지긴 해도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는 아직 모르고.”

    “내가 원하는 술이 맞는지 확인은 어떻게 시켜 줄 거지?”

    “다 방법이 있지.”

    낄낄거리며 천박한 웃음을 흘린 닥터가 술병 두 개를 내려놓고 철제 테이블 뒤로 걸음을 옮겼다. 어마어마한 체격에 비해 몸놀림은 그다지 둔해 보이지 않았다.

    빛 한 점 들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거리낌 없이 걸어간 닥터가 벽에 스위치를 눌렀다. 먼지 쌓인 백열등에 새하얀 빛이 들어오며 어둠에 가려졌던 것이 드러났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쇠창살이 빽빽하게 세워진 네모난 형태의 작은 우리였다. 그리고…….

    “날개?”

    창백한 불빛에 비치는 것은 거대한 새 날개였다. 그것을 등에 단 여자가 얼굴과 손발이 천으로 묶인 채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새가 갇힌 새장을 떠올리게 하는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신기하지? 갖고 싶어도 못 줘. 겨우 만든 거다.”

    “…만든 거라고?”

    “몬스터 날개를 등에 이식한 거지. 대부분 이식 부위가 썩거나 몬스터 피에 중독되어 죽지만.”

    쉬익, 쉭, 닥터가 마스크 밖으로 내뱉은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대화 소리를 들었는지 여자의 눈 위에 감긴 천이 물기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저건 C급이긴 해도 자가 치유 능력이 있어서 살아 있는 거다. 흠, 내일은 눈을 바꿔 볼까… 마침 몬스터 눈알이 새로 들어왔는데.”

    닥터가 파란색 술병을 따서 뭐가 담겼던 건지 모를 지저분한 잔에 콸콸 따랐다. 대충 절반 정도 채워진 잔을 들고 걸어간 그가 우리 문을 열었다.

    “으, 읍. 으…….”

    철컹거리는 소리에 어깨를 흠칫 떤 여자가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커다란 손으로 여자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은 닥터는 재갈을 풀어내고 술을 억지로 입 안에 쏟아 넣었다.

    같은 사람이 아닌 짐승을 대하는 무자비한 손길이었다.

    “쿨럭, 으, 억, 흐…!”

    “보통 반응이 오기까지 10분에서 20분 정도 걸리는데, 이건 어제부터 먹은 게 없으니까 바로 나타날 거다.”

    기어코 잔을 모두 비워 낸 닥터가 여자에게 다시 재갈을 물리고 우리 문을 잠갔다. 그 모든 과정을 가만히 서서 바라본 나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다르다.’

    이수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끔찍한 냄새가 닥터라는 남자에게서 풍겨 왔다. 프라우스 신도단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으으, 흑, 어억, 윽……!”

    우리 속에 들어가 있던 여자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걸 심드렁하게 보던 이수진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어때요? 이 정도면 제대로 확인시켜 준 것 같은데. 필요하면 재갈이라도 풀어 드려요?”

    “아니. 충분해.”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여기요. 가져가요.”

    이수진이 철제 테이블 위에 놓인 파란색 술병을 쥐고 내밀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서 술병을 건네받은 나는 즉시 아트 인벤토리를 사용했다.

    “어머, 목에 그건 타투가 아니라 인벤토리였나 보네요?”

    술병이 연기가 되어 사라지자 살짝 놀란 이수진이 이내 목덜미에서 빛나는 문양을 보고 픽 웃었다.

    “우린 세현 씨가 제안한 조건을 모두 했어요. 이제 당신 차례예요.”

    이수진이 이번에는 초록색 술병을 들었다.

    “한 병 모조리 다 마실 것. 저를 실망시키지 마세요.”

    “…….”

    전등불에 매끈히 빛나는 술병이 보였다. 그것을 쳐다보던 나는 시선을 내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얘기가 쓸데없이 길어져서 2시가 넘었네요.”

    “네?”

    “미안합니다. 바로 하죠.”

    “무슨… 윽!”

    갑작스러운 내 말에 미간을 찌푸리던 이수진이 내 몸에서 강하게 터져 나온 바람에 몸을 비틀거렸다.

    나는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박건호와 우서혁의 기운을 느끼며 담담히 말했다.

    “여기 있는 관련자를 모조리 끌고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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