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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11)화 (211/394)
  • 211화 

    차로 이동하는 동안 나는 뒷좌석에 미리 준비해 둔 클럽 내부 안내도를 살펴봤다. 1층부터 4층까지 간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는 건물 양 끝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반드시 한 명의 가드가 지키고 있어서 시크릿룸이나 VIP룸이 있는 3층과 4층은 확인 절차를 거쳐야만 갈 수 있다고 한다.

    “파티가 있는 날이니 내부 단속도 평소보다 강할 겁니다.”

    “그렇겠죠. 다른 때라면 일반인 틈에 섞이는 게 나았겠지만…….”

    안내도를 접으며 대답했다.

    “이번에는 시선을 최대한 끌어야 합니다. 상대가 누가 됐든 상관없이.”

    그래야 마약을 파는 놈들이 접근해 올 테니까. 내 말에 핸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던 박건호가 말문을 열었다.

    “그보다 이름은 뭐로 해야 하지?”

    “이름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어쨌든 우리 위치가 철없는 도련님 밤마실에 따라 나온 경호원이니, 존대는 써야겠지만… 이름을 아예 부르지 않으면 좀 이상해 보일 것 같군.”

    “가명을 정해 둬야 한다는 거군요.”

    “있다면 확실히 편하겠지. 나랑 우서혁 비서도 마찬가지고.”

    “지금 정하는 게 낫겠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이름 있으십니까?”

    원하는 이름이라….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장 익숙한 이름을 입에 올렸다.

    “권세현… 이거로 하겠습니다.”

    “권세현?”

    “권세현 말입니까?”

    괜히 낯선 이름으로 하기보다는 익숙한 이름으로 해야 어색함이 덜하겠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는 박건호와 우서혁에게 물었다.

    “네. 이상한가요?”

    “이상한 건 아니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박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 권세현. 부르기도 편하고. 그럼 지금부터 클럽을 나올 때까지 권세현으로 부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나야 나쁠 것 없었다.

    “나랑 우서혁 비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적당히 지을까. 박근호랑 우수혁 어때.”

    “…너무 대충 짓는 거 아닙니까?”

    “뭐 어때. 괜찮지, 우서혁 비서?”

    “상관없습니다.”

    의외로 우서혁은 별다른 말 없이 ‘우수혁’이라는 가명을 받아들였다. 이럴 때는 둘이 은근히 의견이 잘 맞는단 말이지.

    어느 정도 필요한 내용을 정리한 우리는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클럽 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

    클럽 바로 옆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밖으로 나오자 토요일 밤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 보였다. 손목시계로 11시가 훌쩍 넘어간 것을 확인한 내가 곧장 클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늦으면 안 되니까 바로 들어가죠.”

    한국에서 보기 드문 백금발을 한 나와 큰 체구를 가진 박건호, 우서혁이 클럽 건물로 다가가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렸다. 그중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자 몇 명과 스치듯 눈이 마주쳤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힐끔거리던 여자들이 나와 서로 시선이 부딪히자 자기들끼리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 거지? 어째 머쓱해져서 목덜미를 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빠른 입장을 위해 예약자는 반대편 문으로 오라더군. 그쪽으로 가지.”

    박건호의 말에 다 함께 건물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기자 가드들이 서 있는 파티 예약자 전용 입구가 나타났다.

    “초대권을 보여 주십시오.”

    가드의 말에 박건호가 보라색 초대권 세 장을 내밀었다.

    “들어가십시오.”

    확인을 끝낸 가드가 문을 가리고 있던 몸을 비켜섰다.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자 쿵쿵, 벽을 울리는 사운드와 함께 조명이 번쩍이는 메인 스테이지가 보였다.

    “엘리베이터로 바로 가자고.”

    가득 들어찬 사람들 사이로 틈을 만들어 준 박건호가 내게 말했다. 우서혁도 박건호와 마찬가지로 내 옆에 바싹 붙어 섰다.

    환호에 찬 외침과 웃음, 시끄럽게 엉키는 대화 소리,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

    나는 허리나 가슴 부근을 만지고 지나가는 타인의 손길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박건호와 우서혁이 곁에 있다 해도 모든 접촉을 막는 것은 어려웠다.

    내부 가장 오른쪽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도착하니 가드가 우리에게 묵례하며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몇 층으로 가시겠습니까?”

    예약자 확인 절차는 박건호와 우서혁에게 맡겨 두고 나는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그때였다.

    “으, 크악……!”

    “……?”

    귀를 울리는 노래 사이로 이질적인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방향으로 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보이는 것은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뿐이었다.

    ‘분명… 비명이었는데.’

    불길한 예감에 손이 차갑게 식었다.

    클럽 자체에서 마약을 풀고 있으니 아무것도 모르고 즐기러 와서 당하는 사람이 충분히 나올 법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일반인 접근이 불가능한 4층으로 올라가면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더 힘들어질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때, 스테이지 위로 크게 튀어나온 복층 난간을 발견했다. 저기 올라가면 1층을 전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결정을 내린 나는 초대권을 꺼내려는 박건호의 손을 잡아 막으며 살짝 웃었다.

    “바로 룸으로 들어가기에는 좀 아쉬운데.”

    내 말에 담긴 의미를 빠르게 알아챈 박건호가 짙은 미소와 함께 물었다.

    “다른 마음에 드는 곳 있습니까?”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곧장 복층 계단으로 향했다. 사전에 설명하지 않은 내 행동에도 박건호와 우서혁은 순순히 뒤를 따랐다.

    예상보다 훨씬 넓은 복층 위는 테이블과 소파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여기도 그럼 자릿값이 있겠군.

    내 손짓에 박건호와 우서혁이 상체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까 희미하지만 비명 소리를 들었습니다.”

    “비명 소리?”

    “네.”

    내 설명에 박건호와 우서혁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게다가 바로 룸으로 가면 오히려 클럽 내부 상황을 알기가 어려워질 것 같아서요. 관계자의 시선도 끌 겸, 여기서 좀 살펴보는 게 어떻습니까?”

    “확실히 그게 낫겠군. 테이블을 잡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오지.”

    고개를 끄덕인 박건호는 자리를 뜬 지 얼마 가지 않아 돌아왔다. 다행히 딱 한 테이블이 남아 있다고 한다. 큰 문제 없이 자리를 얻어 낸 나는 소파 중앙에 앉아 등을 길게 기댔다.

    “그럼 이제 돈지랄을 한번 해 볼까요?”

    클럽 관계자의 이목을 끌려면 역시 돈을 펑펑 쓰는 게 제일이겠지. 어차피 천사연의 돈이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내가 화사하게 웃으며 명령하자 곧 테이블 위로 여러 술병과 안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클럽 조명에 다양한 술병이 영롱하게 빛났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샴페인을 콸콸 따르자 옆에 앉아 있던 우서혁이 손목을 가볍게 잡아 왔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십시오.”

    아, 맞아. 지금은 한이결이지. 소맥 몇 잔에 나가떨어졌던 예전 일이 떠올라 머쓱하게 병을 내려놓자 박건호가 입가를 가리고 큭큭거렸다.

    “놀러 온 게 아니니까 자제 좀 하시죠, 권세현 도련님.”

    “…알고 있습니다.”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며 아래로 보이는 스테이지에 집중했다. 그새 바뀐 노래는 방금보다 더 정신없이 시끄럽고 빠른 비트였다.

    ‘수상한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아래층에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샴페인을 홀짝이며 박건호나 우서혁과 잡담을 나눴다. 그렇게 시간이 30여 분 정도 흐른 그때였다.

    “안녕, 오빠들.”

    붉은색 미니 원피스를 입은 화려한 미인이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보냈다. 뒤로는 비슷한 스타일의 여자 두 명이 서 있었다.

    “아까부터 봤는데, 다른 일행 없이 셋이서만 놀아서. 우리도 셋인데. 어때요? 합석할래요?”

    옥구슬 굴러가듯 예쁜 목소리로 제안한 여자가 검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싱긋 웃었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서는… B급 능력자인가. 지금쯤이면 저 여자도 우리들의 기운을 느꼈겠지.

    상대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던 나는 곧 여자의 귀에 걸린 독특한 생김새의 귀걸이를 발견했다. 다이아몬드 모양에 반절이 검은색으로 채워진 문양. 귀걸이가 조명에 반짝이는 것을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러든가.”

    일부러 심드렁히 대꾸하자 여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뒤에 서 있던 여자들은 각각 우서혁과 박건호 옆에 앉았고, 유일한 능력자인 붉은 원피스의 여자는 내 곁에 붙었다.

    “후후, 술이 별로 줄지 않았네요?”

    자연스럽게 샴페인 병을 든 여자가 내 잔을 채워 줬다. 이것까진 마셔도 괜찮겠지. 주량이 약하니까 마실 때마다 고민해야 하는 게 참 불편했다.

    “우리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여자의 말을 무시한 나 대신 박건호가 대답하며 얼음이 가득 찬 아이스 버킷에서 새 술병을 꺼내 들었다.

    “그럼 우리 여성분들은 술을 잘하시나? 와인부터 맥주까지 다양하게 있으니 마시고 싶은 거 있으면 꺼내 마셔.”

    “어머, 이거 다요? 안주도?”

    “물론. 감사 인사는 저기 있는 우리 도련님께 하고. 다 저분 지갑에서 나온 거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장난스럽게 입을 연 박건호가 나를 가리키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저 자식이.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대충 손을 휙휙 젓자 여자들이 활짝 웃으며 과일 안주에 팔을 뻗었다.

    테이블 위로 술잔이 오가기 시작하자 딱딱했던 공기가 빠르게 풀어졌다. 미리 정해 뒀던 가명으로 소개를 마친 박건호는 옆에 앉은 여자와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내 온 것처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고, 우서혁도 간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세 분은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친구라기에는 어딘가 묘한데.”

    박건호의 농담에 깔깔거리고 웃던 여자가 문득 궁금해졌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왜? 마음에 들어?”

    자연스러운 하대에 여자가 살짝 당황했다. 가슴이 뜨끔했지만, 지금 나는 망나니 도련님 역이라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여자는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보기 드문 미남에다가 매너도 좋고. 설마 진짜로 친구 사이? 그쪽 분은 근호 씨에 비하면 좀 어려 보이는데.”

    무성의한 작명 센스로 박근호가 된 박건호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우리 돈줄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도련님의 아버님이 우리를 고용하셨지. 경호 일을 하거든.”

    “와… 그럼 근호 씨랑 수혁 씨 두 분 다 경호원?”

    “정답. 오래 일해 와서 서로 친해.”

    경호원이라는 말에 우서혁의 옆에 앉아서 그를 연신 힐끔거리던 여자가 수줍게 웃으며 말을 얹었다.

    “어쩐지 몸이… 엄청 좋으시더라고. 운동을 전문적으로 배우신 분 같았는데, 경호원이라니. 완전 이해돼.”

    “그치, 그치? 근호 씨도 팔뚝이 장난 아니야. 키도 크고.”

    “그런 얘기 많이 들어.”

    칭찬에 박건호가 과하지 않게 받아치자 여자들이 다시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 간의 칭찬으로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옆에 앉은 여자의 팔이나 목덜미 부근을 몰래 살폈다.

    “계속 술만 마시네. 그러지 말고 안주도 먹지 그래요?”

    습관처럼 샴페인 잔을 입가로 가져가려는 내 행동을 막은 여자가 빙긋 웃으며 오른손을 쭉 뻗어서 과일 안주가 담긴 접시를 내게 가까이 끌어당겼다.

    “…….”

    그 짧은 순간, 여러 개의 팔찌 사이로 손목의 작은 타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본 나는 슬쩍 미소 지었다.

    ‘팔찌로 가린 거였군.’

    똑같은 문양의 귀걸이와 손목 타투. 그리고 B급 능력자. 이 정도 증거면 충분했다.

    “시시한 장난은 이제 그만하지.”

    여자의 허리를 확 끌어당겨 안으며 상체를 숙여 속삭였다.

    “슬슬 위층으로 올라갈까 하는데. 따라올 건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그 남자를 통해 익히 봐 왔다.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뜬 여자가 볼을 옅게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딘가 넋을 놓은 것처럼 보이는 박건호와 우서혁에게 눈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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