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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10)화 (210/394)
  • 210화

      

    “색 변화로 변경해 주시죠.”

    어금니를 세게 문 채로 요청하자 루젤이 유감을 표하며 넥타이핀에 달린 보석을 꾹꾹 눌렀다.

    “혹시 원하는 색 있어요? 머리랑 눈 둘 다 설정할 수 있어요.”

    원하는 색이라. 잠시 고민하던 나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색을 말했다.

    “백금발에 밝은 은색 눈이요.”

    “백금발에 은색이요? 그럼 혼혈로 보일 텐데.”

    “상관없습니다.”

    내 대답에 루젤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보석을 몇 번 더 만지고 나서 넥타이핀을 돌려줬다.

    “말한 대로 설정했어요. 이번에는 진짜 색만 변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나와 루젤을 지켜보던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색이 너무 화려한 것 같은데. 평범하게 검은색이 낫지 않나?”

    “어차피 박건호 팀장님이랑 우서혁 씨가 옆에 있으면 이목이 어마어마하게 끌릴걸요.”

    쓸데없이 잘난 박건호와 우서혁의 외모에 한탄을 보내자 박건호가 픽 웃었다.

    “한이결 능력자한테 외모 칭찬도 받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헛소리 마시고요…….”

    박건호의 쓸데없는 말을 무성의하게 쳐 낸 나는 설명을 이었다.

    “어차피 눈에 띌 거라면 제대로 분위기 잡는 게 훨씬 좋습니다. 마약을 사 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했으니 그중 하나가 되는 겁니다.”

    “철없는 재벌 집 자제 행세를 하자?”

    “…뭐, 비슷합니다.”

    천사연의 질문에 대충 대답했다. 본보기로 삼으려는 상대는 재벌 집의 철없는 아들내미가 아니긴 하지만, 자세히 알려 줄 수는 없으니까.

    “그럼 나와 우서혁 비서는 우리 한이결 능력자의 경호원을 하면 되겠군. 밤마실 나온 도련님의 안위가 걱정돼서 따라온 충실한 보디가드인 거지. 어때?”

    “흠. 나쁘지 않네요.”

    사실 제일 자연스러운 건 비슷한 놈들끼리 모여서 가는 거지만, 열흘도 안 남은 상황에서 그런 준비까지 할 수는 없으니…….

    “그럼 두 분은 언제 출발하실 겁니까?”

    “글쎄, 어쩔까.”

    “이틀 뒤 밤이 금요일이니 그때 가 보는 게 적당할 것 같습니다.”

    “금요일 밤이면 아주 좋지.”

    우서혁의 제안에 박건호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 즐거워하는 꼴에 영 불안해졌다.

    “…팀장님.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거 정찰입니다. 신나게 놀고 오시면 안 돼요.”

    “당연하지. 한이결 능력자는 대체 날 뭐로 보는 건지?”

    뭐로 보긴, 한량으로 보고 있지.

    “일단 그럼 두 분 다녀오신 후에 다시 얘기 나누죠.”

    나는 하태헌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틀 후 새로 얻은 정보가 있으면 바로 알려 드릴게요.”

    “그래.”

    하태헌은 따로 길드 일이 있으니 매번 레퀴엠으로 부를 수는 없었다. 내 마음을 이해한 그가 덧붙여 답했다.

    “이틀 뒤는 힘들겠지만, 열흘 뒤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채울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마음이 느껴지는 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열흘 뒤.’

    날짜는 정해졌다. 이제 남은 건 마약이 든 술을 어떻게든 얻어 내는 것이다.

    꾹 쥔 손바닥 안쪽으로 차가운 넥타이핀의 감촉이 느껴졌다.

    ***

    짙은 남색 셔츠는 품이 살짝 넉넉했다. 평소와 달리 소매 부근을 깔끔하게 접어 올린 나는 천사연에게 받았던 팔찌를 빼고 대신 메탈 시계를 찼다. 방 전등 빛에 시계가 하얗게 반짝였다.

    답답해 보이지 않도록 목 부근은 단추를 두 개 정도 풀고, 앞머리는 가볍게 넘겨서 이마 위로 적당히 흘러내리도록 했다.

    천사연이 준비해 준 옷과 액세서리를 모두 착용한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옷도 시계도… 엄청 비싸 보이는데.’

    가격은 모르지만, 피부에 닿아 오는 촉감부터가 보통 옷과는 달랐다. 물론 값나가는 옷을 걸치고 가야 하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긴 한데.

    고개를 드니 거울에 멋쩍은 표정으로 서 있는 한이결이 보였다. 옷을 입으려고 일부러 가져다 둔 전신 거울이었다.

    아, 어색해. 괜히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차림새에 신경 써 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오늘로부터 8일 전. 미리 계획했던 대로 박건호와 우서혁은 함께 에이튼 클럽을 다녀왔다.

    -사람 장난 아니게 많고 복잡합니다. 무턱대고 돌아다니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째 너덜너덜한 차림새로 돌아온 박건호가 드물게 지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우서혁의 상태도 박건호와 딱히 다르지 않았다.

    -확인해 본 바, 2층까지는 일반인도 출입이 가능하지만 3층부터는 룸을 빌리거나 따로 예약한 이들만 갈 수 있었습니다.

    우서혁의 보고에 천사연을 돌아봤다. 팔짱을 낀 채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곧 입을 열었다.

    -어차피 파티에 가려면 초대장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니… 수소문을 해서 초대장 얻어 두고, 추가로 룸 예약도 하도록. VIP건 시크릿 룸이건 상관없다.

    -예.

    파티 초대장은 이미 배포가 끝나서 다른 이에게 웃돈을 주고 넘겨받아야 했다. 시간이 촉박해서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지만 어쨌든 기본적인 구색은 다 갖춰졌다.

    이제는 익숙해진 한이결의 깔끔한 얼굴을 잠시간 응시하던 나는 팔찌를 인벤토리에 넣고 테이블에 올려 둔 넥타이핀을 들었다.

    끼워서 착용하기만 하면 아이템은 정상적으로 작동되니 최대한 눈에 안 띄는 바지 주머니에 고정되도록 꽂아 넣었다. 파직! 이전에 한번 겪은 것과 같이 머리와 눈 부근이 따끔하며 전류가 흘렀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

    백금발과 은회색 눈동자로 변한 한이결의 얼굴이 비친 거울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내 예전 얼굴이라면 진짜 별로였을 텐데, 한이결은 워낙에 예쁘장하니 그 남자와 조금은 비슷한 느낌이 났다.

    불빛에 하얗게 반짝이는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역시 그 남자를 완벽하게 따라 하는 건 불가능하구나.

    ‘하긴. 키도 체구도 이 몸보다 훨씬 크니까…….’

    길게 내려오던 남자의 속눈썹이 떠올랐다. 끝이 살짝 올라간 매끈한 입술도.

    세현아. 나를 부르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툭툭,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는 뼈가 도드라진 흰 손가락. 그 모든 것을 차근히 기억해 낸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잘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 남자와 똑같이는 힘들겠지만, 반의반만큼이라도 따라 할 수 있기를.

    심호흡을 크게 한 후에 거울에 붙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서 침실 밖으로 나갔다.

    피이익! 픽!

    거실로 나오자마자 민아린의 품에 안겨 있던 여우가 높은 울음소리를 내며 후다닥 날아왔다. 모습이 바뀌어서 몰라보면 어쩌나 했는데.

    “와아, 이결 씨! 너무 잘 어울려요!”

    거실에서 기다리던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민아린이 밝은 얼굴로 외친 말에 셔츠 소매 단추를 채우던 박건호가 맞장구를 쳤다.

    “확실히 있는 집 자제 느낌이 나는군.”

    “그럼 다행이고요.”

    간단하게 대답하며 나란히 서 있는 박건호와 우서혁을 살펴봤다. 나와 마찬가지로 겉모습에 변화를 준 둘은 평소와 헤어스타일이 달랐다.

    박건호는 머리카락을 넘겨서 이마를 훤히 드러냈고, 우서혁은 반대로 앞머리를 모두 내렸다. 그것만으로도 인상 차이가 컸다.

    “옷은 잘 맞나?”

    서류를 보고 있던 천사연이 빙긋 웃으며 물어 왔다. 나는 조금 갑갑한 시계를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습니다.”

    “시계는 무슨 일이 있어도 풀지 말도록. 위치 추적을 넣어 놨으니.”

    “네.”

    나뿐만 아니라 박건호와 우서혁이 차고 있는 시계에도 위치 추적을 심어 놨다. 마약을 퍼뜨리는 이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는 거니 여러모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한이결.”

    천사연과 대화가 끝나자 초조한 기색으로 내 주변을 맴돌던 김우진이 바싹 다가왔다.

    “…조심해야 해.”

    저번 회의부터 지금까지,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나보다도 더 불안해하던 김우진은 안색이 여전히 창백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서 살짝 짙어진 눈가가 유독 시선에 박혀 들었다.

    녀석은 내가 원하면 체인징 아이템으로 여자가 되어서라도 자기가 대신 가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여자로 변해서 클럽에 잠입하겠다니. 절대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이런 번거로운 일은 때려치우고 쉬고 싶은데 말이지.’

    마약도 문제였지만, 프라우스 신도단은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내 목숨이 달린 일이었으니.

    복잡한 생각을 끝낸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김우진에게 여우를 안겨 줬다.

    “당연하지.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그동안 여우 좀 부탁한다.”

    피이익.

    여우의 불만스러운 울음과 함께 김우진의 고동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입술을 꾹 깨문 김우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알았어…. 기다릴게.”

    “…….”

    내 말이면 뭐든 알겠다고 답하는 녀석의 행동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하다, 김우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어.

    “한이결. 슬슬 출발하지.”

    “네.”

    박건호의 말에 시간을 확인했다. 밤 9시 50분. 차를 타고 10시쯤에 출발한다 치면 11시 전에는 클럽 내부로 진입할 수 있을 것 같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형.”

    권지훈과 쉬지 않고 연락하며 상황을 주고받던 권정한이 급히 핸드폰을 귀에서 내리고 인사를 보내왔다.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하라는 뜻에서 손을 휙휙 흔들어 주고 현관으로 움직였다.

    “바로 지하로 내려가서 차를 타면 됩니다.”

    텅 빈 복도를 가로질러 건물 구석에 있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데, 저편에서 익숙한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태헌 씨.”

    연락이 없어서 못 오는 줄 알았는데. 반가움에 활짝 웃으며 반기자 하태헌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출발하는 건가?”

    “네. 설마 여태 일하다 오신 겁니까?”

    “그래.”

    주말인데도 야근이라니. 아직 폭발 테러의 여파로 이래저래 처리할 게 많이 남아 있나 보다.

    “조금만 늦었으면 얼굴도 못 보고 보낼 뻔했군.”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은데요.”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여러 의미가 담긴 눈빛을 한 하태헌이 내 뒤에 조용히 서서 구경하는 박건호와 우서혁에게 말했다.

    “문제 생기지 않도록 잘 부탁합니다.”

    “……?”

    왜 내 안위를 저 두 명한테 부탁하는 거지? 아, 경호원 역할이라서?

    입가를 매만지던 박건호가 그 얘기에 장난기로 눈동자를 반짝 빛내며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아, 그럼요. 눈을 떼지 않겠습니다. 하태헌 부마스터도 아시다시피 ‘우리’ 한이결 능력자가 워낙에 사고뭉치라.”

    그가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내 어깨에 무거운 팔을 턱 올렸다. 한동안 안 그러나 했더니, 또 시작이네.

    “팔 치우시죠.”

    낑낑거리며 힘겹게 박건호의 팔을 쳐 낸 나는 하태헌과 시선을 맞췄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방에서 기다리고 있지.”

    방에서? 하태헌을 저 사람들 사이에 둬도 괜찮을지 모르겠네. 본인이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알겠습니다. 쉬고 계세요.”

    그렇게 하태헌과도 인사를 마친 우리는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박건호가 운전석에 앉으며 씩 웃었다.

    “그럼 우리 도련님, 클럽까지 잘 모시겠습니다.”

    “하아…….”

    그 능청스러운 말에 조수석에 앉은 우서혁이 안전벨트를 매며 지친 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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