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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06)화 (206/394)
  • 206화

      

    가로수 길 근처에 있는 주택 단지.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편의점을 빠져나온 남자의 손에는 생수 한 병이 들려 있었다.

    “후…….”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를 내리고 물을 들이켠 김우진이 뜨거운 숨을 훅 뱉어 냈다.

    34도를 넘나드는 한낮의 쨍한 햇빛에 온몸이 열로 뜨끈했다. 생수 한 병을 다 비우고 쓰레기통에 넣은 김우진이 마스크를 다시 올려 얼굴을 가리고 다시 움직였다.

    술을 마시고 난동을 피우는 이들은 밤낮 관련 없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어서 24시간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실제로 먼저 찾은 사계 길드도 4시에 잡아냈으니 오히려 밤보다 낮이 가능성이 더 클지도 모른다.

    벌써 며칠째 더위를 버텨 가며 신사동 주변을 돌아다닌 터라 아무리 체력 좋은 A급이라 해도 어쩔 수 없이 피로가 쌓여 갔다. 그럼에도 김우진은 기분이 꽤 좋았다.

    「한이결: 오늘은 어제보ㄷ다 더 덥다던데 괜찮ㅅ아?」

    「한이결: 무리하지 마. 적다ㅣㅇ히하고 들어ㅏ와」

    「김우진: 응, 알겠어.」

    2시간 전에 온 메시지를 벌써 몇 번째 들여다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타 가득한 메시지에 마스크 위로 보이는 김우진의 기다란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랜 김우진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눈앞에 보이는 골목만 마저 살펴보면 길드로 돌아갈 수 있다. 곧 한이결을 본다는 생각에 벌써 행복했다.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던 김우진은 무언가 싸한 감각을 느끼고 모자를 살짝 올렸다.

    “……?”

    이상하다. 아무리 대로변에서 떨어진 골목길이라 해도 사람이 이렇게 없나. 바로 근처에 주택 단지도 있는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정도로 뜨거운 날씨에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적나라한 시선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고동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가 천천히 멈춰 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낯선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뭡니까?”

    “길 막아서 미안한데,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얘기?”

    김우진이 딱딱하게 되묻자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정면에 마주 선 남자가 비릿하게 웃으며 단검을 꺼내서 위협적으로 내밀었다.

    “얌전히 따라와. 뒤지기 싫으면.”

    어떡할까. 김우진은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 상황을 보니 지금껏 문제를 일으킨 능력자들이 대낮에 어디서 술을 마시게 된 건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됐다. 이런 식으로 끌고 가서 억지로 입에 밀어 넣은 건가.

    ‘그렇다면…….’

    지금 이놈들을 때려눕혀서 잡아가면 어떤 식으로든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거다. 순순히 끌려가서 기회를 엿보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러면 자칫하다간 마약을 마시게 될 위험이 컸다.

    고민을 끝낸 김우진은 손을 들어 올렸다. 아트 인벤토리에서 새하얀 연기가 흘러나와 금세 형태를 갖추었다.

    혹시 몰라 소음기를 장착해 둔 아이템 총이었다. 정체가 밝혀질 수 있으니 분신 능력은 쓸 수 없었다.

    “어이고, 우리랑 싸우시게?”

    “어려서 그런가? 분위기 파악을 영 못 하네.”

    김우진이 무기를 쥐자 그를 둘러싼 남자들이 비웃음을 흘리며 한 마디씩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우진은 별다른 동요 없이 차분하게 상황을 살폈다.

    상대는 모두 네 명. 그중 무기를 든 이는 정면과 오른쪽, 두 명이다.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이미 막혔다. 느릿하게 심호흡을 한 김우진이 권총을 겨누는 동시에 사방에서 적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들었다.

    타앙, 첫 번째 총알은 예상했던 대로 빗나갔다. 단검을 든 정면의 남자가 거리를 훅 좁혀 왔다.

    후웅!

    어깨를 노리고 들어오는 검 끝을 앞으로 상체를 숙여 피한 김우진이 땅을 손으로 짚고 다리를 길게 뻗어 훅 돌렸다. 크악! 김우진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던 두 명이 다리에 걸려 바닥에 엎어졌다.

    “뭐 하는 거야, 병신 새끼들아!”

    버럭 소리를 지른 남자가 이를 악물고 단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그것을 고개를 꺾어 아슬아슬하게 피한 김우진이 상대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고 어깨에 총을 쐈다.

    “끄아아악!”

    자칫하다간 죽일 수 있으니 최대한 급소는 피해야 했다. 어깨에서 터져 나오는 피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 남자가 단검을 떨어트리며 주저앉았다. 김우진은 재장전 버튼을 누르며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발로 차서 멀리 밀어냈다.

    “시, 시발. 뭐야?”

    한 명이 순식간에 당하자 남은 세 명이 당황하며 주춤 물러섰다.

    “설마 B급 이상이야? 이 좆같은… 뭐라도 해 봐!”

    가장 키가 큰 남자가 잭나이프를 든 남자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화려한 모양새에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 평범한 무기는 아니었다.

    “으, 윽! 으아아…!”

    창백하게 질린 채 주춤거리던 남자가 억지로 떠밀려 김우진을 향해 달렸다. 잭나이프의 날카로운 날이 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번쩍였다.

    채앵, 기기긱.

    눈을 아래로 내리깐 김우진이 총신을 비틀어서 잭나이프를 막아 냈다. 잭나이프의 날카로운 검날 끝이 총 방아쇠 고리와 정확히 맞물렸다.

    히익, 가까운 거리에서 김우진을 마주한 남자가 신음을 내뱉으며 어깨를 흠칫 좁혔다. 그것을 지켜본 김우진이 총 끝을 오른쪽으로 휙 꺾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방아쇠에 걸려 있던 잭나이프 끝에 손가락이 베이며 상대의 허벅지로 향한 총구에서 총알이 가차 없이 발사됐다.

    “끅, 으, 흐아아악!”

    허벅지를 관통당한 남자가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챙그랑, 잭나이프가 그 앞에 떨어졌다.

    “시발, 튀어!”

    상황을 지켜보던 남은 두 명이 기겁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쯧…….”

    김우진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모조리 잡아들이기 위해 멀어지는 두 명의 등을 향해 총을 든 그 순간, 오싹한 감각이 밀려왔다. 김우진은 다급히 상체를 훅 뒤로 뺐다.

    “윽…!”

    맨 처음 나서서 어깨에 총을 맞은 놈이 그사이 바닥에 떨어진 잭나이프를 쥐고 휘둘렀다.

    “좆같은 새끼, 시팔! 꼴좋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옆구리가 길게 베인 김우진이 화끈한 통증에 눈가를 좁혔다.

    실수했다. 아까 단검처럼 건드릴 수 없도록 멀리 쳐 냈어야 했는데.

    “허억…….”

    예상했던 대로 잭나이프는 평범한 무기가 아니었는지 머리가 핑 돌며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 틈에 상대가 피가 흐르는 어깨를 쥔 채로 허겁지겁 자리를 떠났다.

    네 명 다 잡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이야. 김우진은 축축하게 젖어 드는 옆구리를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여기에 남은 것은 자신과 허벅지를 뚫린 채 기절한 놈뿐이었다.

    “하아…….”

    빠르게 굳어 가는 몸에 겨우 힘을 줘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상대는 오래가지 않아 골목 앞으로 차를 끌고 나타났다.

    “고생이 참 많군.”

    혹시 몰라 총을 쥔 채로 기절한 놈 옆에 앉아 있던 김우진이 박건호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사이 흘린 식은땀으로 목덜미가 축축했다.

    “민아린 힐러에게 연락 넣어 놨으니 조금만 더 버텨 봐.”

    “…그 정도는 아닙니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김우진은 박건호의 뒤를 쫓았다. 기절한 남자를 질질 끌어다 차 안에 던져 놓은 박건호는 김우진이 조수석에 제대로 탄 것을 확인하고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

    다른 직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지하 주차장 가장 안쪽에 차를 세우자 미리 대기 중이던 민아린과 우서혁이 재빨리 다가왔다.

    박건호는 심문할 자를 끌고 갔고, 민아린과 우서혁은 다친 김우진을 부축해서 병실로 옮겼다.

    “마비 독이네요. 그래도 깊게 베이지 않고 피부에 들어간 독도 소량이라서 치료는 바로 되겠어요. 다행이에요.”

    옆구리의 상처를 확인한 민아린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해독제를 가져왔다. 해독제를 마시고 민아린의 능력으로 옆구리와 손가락을 치료하자 몸 상태는 훨씬 나아졌다.

    “어때요?”

    “괜찮습니다.”

    마비 독으로 창백하게 질려 가던 김우진의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민아린이 그제야 빙긋 웃었다. 베인 흔적 하나 없이 멀쩡해진 옆구리를 매만진 김우진이 치켰던 상의를 다시 내린 그때였다.

    “김우진.”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번쩍 든 김우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옆에 있던 민아린도 마찬가지로 깜짝 놀랐다.

    “한이결?”

    “어머, 이결 씨?”

    자신을 찾아온 이는 놀랍게도 한이결이었다. 그 뒤에는 언제나처럼 느긋한 미소를 띠고 있는 천사연도 함께였다.

    족쇄 때문에 23층에서 나오지 못할 텐데.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한이결의 발목은 깔끔했다. 설마 마스터가 족쇄를 풀어 준 건가? 대체 왜?

    김우진과 민아린의 표정에서 의문을 읽어 낸 천사연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도 무섭게 화를 내서 더 잡아 둘 수가 없더군. 안 된다고 한 번 말했다가 어찌나 혼을 내던지.”

    “조용히 하시죠.”

    딱딱한 음성으로 천사연의 장난을 쳐 낸 한이결이 보기 드물게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민아린 씨.”

    말투에서 숨길 수 없는 냉기가 흘렀다. 멍하니 한이결을 바라보던 민아린이 그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앗, 음. 옆구리와 손끝이 칼에 베이고 독이 소량 묻어서 마비 반응이 있었어요. 지금은 모두 완치됐어요.”

    “하아…….”

    완치됐다는 답에 그때서야 한숨을 푹 내쉰 한이결이 김우진을 향해 말했다.

    “김우진, 넌?”

    “어? 응?”

    처음 보는 모습에 넋을 놓고 구경하던 김우진이 눈을 깜빡였다.

    “몸 상태 어떠냐고. 다친 곳은 거기가 다야? 더 없어?”

    “응. 이제 멀쩡해.”

    “확실한 거지?”

    “……응.”

    재차 묻는 말에 김우진이 묘한 표정으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결 씨, 우진 씨 보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족쇄가… 아, 여우는요?”

    “다쳤다니 당연히 와 봐야죠. 여우는 방에 두고 왔고요. 족쇄는 어차피 풀어야 했습니다.”

    23층 방에서 심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한탄하듯 중얼거린 한이결이 복잡한 눈빛으로 김우진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쉬고 있어. 민아린 씨, 김우진 좀 부탁합니다.”

    “잠깐, 어디 가게?”

    “네가 잡아 온 놈 보러 가야지. 권정한은 이미 보내 놨어.”

    “그럼 나도…….”

    “안 돼.”

    따라나서려는 김우진을 한이결이 시선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며칠 돌아다니느라고 힘들었잖아. 더 쉬어. 끝나면 다시 올 테니까.”

    그걸 끝으로 한이결은 천사연, 우서혁과 함께 병실을 떠나갔다. 차마 더 붙잡지 못한 김우진이 망설임 없이 닫힌 병실 문을 보며 눈꼬리를 아래로 축 내렸다.

    “으음, 우진 씨가 다쳐서 이결 씨가 엄청 놀랐나 봐요.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

    “이결 씨 말도 맞아요.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돌아다녔잖아요. 이따 다시 온다고 말씀하셨으니까 그동안은 쉬는 게 좋겠어요.”

    민아린의 말에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욕실은 어디 있습니까?”

    한이결이 돌아올 동안 씻기라도 해야겠다. 땀과 피에 범벅이 돼서 꼴이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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