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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05)화 (205/394)
  • 205화

    52. 진상 규명 

    [오랜만입니다, 한이결 능력자.]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네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권지훈 마스터.”

    권정한에게 내 번호를 넘겨받은 권지훈이 걸어 온 전화였다. 지금부터 3시간 전, 의자에 묶인 남자 사진을 보냈던 권지훈은 통화 직전에 영상도 추가로 넘겨주었다.

    [저야 항상 잘 지내죠. 한이결 능력자는 여러모로 바빠 보입니다.]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영상이 도움이 되면 좋겠군요.]

    “물론이죠. 협조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한이가 신세를 지고 있으니 이 정도는 돕고 싶었습니다. 영상 본 후에 궁금한 점이 있다면 편하게 연락해 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권지훈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타이밍 좋게 현관문을 열고 하태헌이 들어섰다. 5일 만에 다시 보는 얼굴이었다.

    “하태헌 씨, 어서 오세요.”

    피익!

    급히 핸드폰을 집어넣고 하태헌에게 달려가자 어깨에 올라가 있던 여우가 민아린에게 후다닥 날아갔다.

    “오시는 데 별일 없었습니까?”

    “그래.”

    하태헌을 다시 레퀴엠으로 불러들였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물음에 불쾌하지 않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인 하태헌이 복잡한 표정으로 족쇄를 바라봤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천사연이 채워 놓은 족쇄 때문에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갔다. 그러니 하태헌이 영상을 같이 보기 위해 레퀴엠으로 온 건 어디까지나 나 때문이었다.

    “다 모였나?”

    하태헌이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사연이 뒤에 사람을 줄줄이 달고 방으로 들어왔다.

    “오, 하태헌 부마스터. 또 뵙습니다.”

    “예.”

    “한이결.”

    박건호는 오자마자 하태헌과 인사를 나눴고 김우진의 분신은 내게 쪼르르 달려와 안겼다. 그러자 민아린에게 얌전히 안겨 있던 여우가 높은 울음소리를 내며 득달같이 쫓아왔다.

    피이익! 피익!

    “으윽…….”

    어깨 위로 올라선 여우가 김우진의 분신을 향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자, 분신은 보란 듯이 나를 더욱 강하게 껴안았다. 아, 힘들어.

    “김우진, 분신 좀…….”

    “우진 씨. 어제 사 둔 과자 어디에 뒀어요?”

    “냉장고 옆 수납장에 있습니다.”

    “영상은 따로 보내 주겠다고 했는데 굳이 여기까지 오다니. 눈치가 없군, 하태헌 부마스터.”

    “글쎄요. 천사연 마스터께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서혁 비서님, 커피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피익! 피익!

    “…….”

    장난 아니게 정신 사납다. 모인 사람 수가 많아도 너무 많은 거 아닌가. 권정한이 권한 커피를 거절하던 우서혁이 여우와 분신 사이에 낀 채로 시들시들 말라 가는 나를 발견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모두 준비 끝나셨으면 이제 영상을 틀까 합니다.”

    “앗, 좋아요!”

    그 말에 과자 봉지를 꺼내던 민아린이 활짝 웃으며 거실로 돌아왔다. 김우진도 그제야 내 품에 안긴 분신의 목덜미를 낚아채서 떼어 내 줬다.

    ‘우서혁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거실에 모인 것을 확인한 우서혁은 들고 온 노트북과 TV를 능숙하게 연결했다. 그사이 권정한은 커피가 담긴 잔을 여기저기 나눠 주었다.

    “아, 고마워.”

    나한테도 주길래 당연히 커피인 줄 알았는데, 잔에 담긴 것은 오렌지 주스였다. 왜 나만 주스지?

    “어머, 영상 길이가 2시간이나 되네요?”

    “일단 원본 속도 그대로 틀겠습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튼튼한 의자에 상체와 양다리가 묶인 남자가 화면 중앙에 나타났다. 주변을 보아하니 낡은 폐건물을 사용한 것 같은데.

    [으으, 으…….]

    눈이 검은 천으로 가려진 남자가 묶인 몸을 꿈틀거리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화면 바깥에서 권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거지?]

    [현재 술을 마신 후부터 대략 1시간 정도 지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낯선 음성이 대답을 해 왔다. 사계 길드원인 것 같다.

    [상태는?]

    [갈수록 공격성이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끄윽, 가…가까이 오지 마!]

    그때였다. 묶여 있던 남자가 갑자기 발작하듯 몸을 떨며 비명을 내질렀다. 눈이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도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시, 시발! 오지 말라고… 오지 마!]

    [흐음.]

    [주, 죽, 죽여야 해… 죽여 버려야…. 안 돼, 후욱, 헉!]

    그 비정상적인 행동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권지훈이 영상과 함께 보내 준 남자의 정보를 떠올렸다.

    이름, 김영호. 37세 C급 능력자다. C급이기는 해도 식물을 움직이고 꽃을 피울 수 있는 능력이라 여기저기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저런 폐건물에 데려간 건가?’

    남자는 결혼 생활 5년째인, 3살배기 딸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오후 4시경, 술에 만취한 상태로 아파트 단지에서 산책 나온 노부부에게 달려들던 것을 때마침 순찰하던 사계 길드원이 겨우 막아서 끌고 왔다고 한다.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살려 달라고!]

    나는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입가를 매만졌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 갔다.

    [으윽, 끄으윽… 끄아악! 아악!]

    [뭐야, 왜 저래?]

    [확인해 보겠습니다.]

    [능력은 이제 쓰지 않는데, 뭐지?]

    [아아악! 머, 머리가…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시발, 살려 줘… 아파! 아파!]

    남자가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은 영상이 정확히 30분이 흘렀을 때였다.

    남자의 발버둥에 의자가 비틀리며 끽끽거리는 소리를 냈다. 조용히 비명을 듣던 나는 민아린의 안색이 점차 안 좋아지는 것을 발견하고 우서혁에게 부탁했다.

    “재생 속도를 높여 주세요.”

    “네.”

    빠르게 넘어가는 영상 속에서 남자는 갈수록 심하게 몸을 비틀며 비명을 내지르다 끝에 가서는 죽여 달라고 울부짖었다.

    [으윽, 윽… 죽고 싶어…. 미안, 여보. 하윤아. 나 더는…….]

    1시간이 넘도록 통증을 호소하던 남자는 영상이 끝나기 30분쯤부터는 자꾸만 자살을 암시하는 말들을 쏟아 냈다.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로 중얼거리던 그는 결국 정신을 놓고 기절했다.

    고개를 툭 떨구는 남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상도 끝이 났다. 싸한 침묵이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나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술에 마약을 넣었네요.”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영상을 보고 나니 확신이 들었다. 마약이 가진 위험성은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영상을 관심 있게 지켜본 박건호도 의외라는 표정으로 한 마디 얹었다.

    “각성 효과나 쾌락이 배제된 약은 흔치 않은데, 놀랍긴 하군.”

    확실히 일반적인 형태의 마약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환각, 그다음은 감당하기 힘든 통증, 마지막으로 우울증까지. 환각을 겨우 버텨 낸다 하더라도 통증 구간에서 다시 약을 찾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저런 마약은 여러 곳에서 악용될 소지가 다분했다.

    핸드폰에 온 메시지를 확인한 권정한이 말했다.

    “영상 속 남자를 깨워서 술을 어디서 마셨는지 물어봤는데,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한다고 해요. 아무래도 정신계 능력자가 가담한 것 같아요.”

    “음…….”

    제일 중요한 부분을 기억 못 한다니. 확실히 정신계 능력에 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하태헌에게 눈길을 돌렸다.

    “하태헌 씨, 우리 중국에 막 도착했을 때요.”

    루젤이 만들어 준 좌표 변환기를 이용해서 중국 게이트로 막 빠져나왔던 그 순간,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진동했던 것을 떠올렸다.

    “일반적인 마약과 몬스터에게서 추출한 환각 체액을 합쳐 낸 마약이 있다고 설명했었는데, 기억하십니까?”

    “그래.”

    “중국에서 변형된 마약이 많이 만들어지는 것 같던데요. 혹시 종류가 어느 게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알아보도록 하지.”

    “서울 쪽도 멈추지 말고 계속 찾아보죠. 부산에서 발견한 것도 물론 좋지만, 결국 서울도 해결을 봐야 하니까…….”

    말을 하던 나는 시선을 느끼고 옆을 돌아봤다. 그러자 어딘가 묘한 미소를 단 채로 날 바라보고 있는 천사연이 눈에 들어왔다.

    “뭡니까?”

    “뭐가?”

    “왜 그렇게 보시냐고요.”

    영 신경 쓰여서 따지듯 묻자 천사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남의 길드원 부려 먹는 데에 아주 도가 텄군.”

    “…도와주신다면서요.”

    “그냥 그렇다는 건데.”

    그럼 왜 시비를 걸고 지랄이지.

    “불만이면 이거 풀어 주시죠? 도움 없이 제가 찾아다닐 테니까.”

    족쇄가 채워진 다리를 들며 대꾸하자 천사연이 박건호와 김우진, 우서혁을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우리 한이결 능력자가 말한 대로 다들 더 힘써 보도록.”

    “…….”

    이 자식이….

    영상을 끄고 TV와 노트북의 연결을 끊어 낸 우서혁이 입을 열었다.

    “일반적인 마약이 아니라 몬스터 체액이 합쳐진 물건이라면 중화하거나 해독할 약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정말요?”

    뜻밖의 좋은 정보에 되묻자 민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물론 중화제나 해독약을 만들려면 마약이 들어간 술을 얻어야겠지만요.”

    “제작 능력자가 만들 수 있습니까?”

    “으음, 글쎄요. 마약에 들어간 재료를 파악해야 하니까 무기 제작 쪽은 어려울 것 같아요.”

    약 제조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건가. 그렇다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하지.

    “그래도 해결할 방법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범죄 사건 수와 실제로 저 술을 마셨을 피해자의 수가 같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최악의 경우, 이미 중독된 사람들이 여럿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술을 얻어 내서 중화제나 해독제를 만들어야 한다.

    “새로 알아낸 정보가 생기면 바로 전달하겠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방문한 하태헌은 내 얘기가 끝나자마자 벗어 놨던 정장 재킷을 다시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조심해서 가세요, 하태헌 씨.”

    품에 안긴 여우를 잠시 민아린에게 넘겨주고 현관으로 향하는 하태헌의 뒤를 따라가 인사를 건넸다. 그가 손을 들어 내 눈꼬리를 한번 쓸어 만지고는 대답했다.

    “또 연락하지.”

    하태헌이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거실로 돌아오자 그새 과자를 하나 까서 먹고 있던 박건호가 내게 물었다.

    “저번부터 느낀 건데 한이결, 하태헌 부마스터랑 엄청 친해 보이는군.”

    “…뭐, 조금요.”

    피이이, 날아오는 여우를 안아 주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사실 딱히 친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어색한 사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우리 대할 때랑 차이가 너무 크지 않나?”

    “맞아요. 우리는 현관까지 마중 나오지도 않으면서…. 이결 형, 너무해요.”

    박건호의 말에 가만히 있던 권정한이 섭섭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어차피 매일 찾아오니까…….”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모두 입을 다물고 나만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분위기지, 이건?

    “왜, 왜 그렇게 보는지…?”

    머쓱함에 목덜미를 쓸며 주위를 둘러보자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던 천사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한이결, 아까 마약에 관련해서 하태헌 부마스터와 했던 얘기 말인데.”

    “예?”

    “듣자 하니 중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운 상대가 하태헌 부마스터인 것 같더군?”

    “……?”

    뭘 새삼 묻는 거지? 다들 진작 알아챈 거 아니었나?

    “그렇죠.”

    “흠. 단둘이?”

    중간까지는 루크가 동행했었지만, 그 사람 이름을 여기서 말할 수는 없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예, 뭐…….”

    얌전히 내 옆에 서 있던 김우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하태헌도 중국에서 꽤 오래 있다가 돌아온 거로 아는데. 그동안 계속 함께?”

    계속되는 질문에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천사연은 워낙에 눈치가 빠르니 좀 걱정스러운데.

    “그래서 그런가? 사이가 굉장히 돈독해 보이는군.”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같이 다니는 동안 별일 없었나?”

    당연히 없지, 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불현듯 호텔에서 내 눈가에 입을 맞추던 하태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호텔에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심지어 술에 취해서 한 것도 아니었고. 고백이 워낙 충격적이라서 잊고 있었다.

    “……물론이죠.”

    혼란스러운 속을 간신히 억누르고 한참 만에 대답하자 날 바라보는 모두의 눈동자에서 오묘한 빛이 감돌았다.

    “…….”

    더는 못 버티겠다. 도망치자.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시선들을 외면하고 침실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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