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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04)화 (204/394)

204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천사연의 가슴팍을 밀쳐 내고 거실로 돌아오자 고소한 향이 맡아졌다. 김우진이 만들고 있다는 간식이 벌써 완성되어 가고 있는 듯했다.

“오, 맛있는 냄새.”

한량처럼 소파 위를 뒹굴뒹굴하던 박건호가 눈을 반짝 빛냈다. 나와 달리 여전히 출출한가 보다. 이것도 다 체격 차이인가.

주방 안을 살펴보니 나란히 서서 요리하는 김우진과 우서혁의 널따란 등이 보였다. 김우진이야 워낙에 요리를 잘하니 놀랄 것도 없지만 우서혁은 좀 의외였다.

생각이 얼굴에 나타났는지 민아린이 곁에 붙어서 속삭였다.

“우서혁 비서님, 취미가 베이킹이라고 하시던데요.”

“정말요?”

“네. 저도 처음 듣고 놀랐어요. 손재주도 제법 좋으신가 봐요.”

저 무뚝뚝하고 덩치 큰 남자가 베이킹을 하고 손재주가 좋다니. 우서혁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얘기 끝났어?”

때마침 하던 것을 끝낸 김우진이 뒤에서 구경하던 나를 알아채고 물어 왔다.

“응. 하태헌 씨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셨어. 그보다 뭘 만든 거야?”

“콘 치즈랑 감자 크로켓이야. 거실로 가져다줄게. 먹어 봐.”

앞치마를 풀어낸 김우진이 완성된 요리가 담긴 접시를 들고 우서혁과 함께 거실로 나왔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식탁보다 훨씬 큰 거실 테이블을 이용하는 편이 나았다.

“하태헌 부마스터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모인 것을 확인한 나는 하태헌과 침실에서 나눈 대화의 결과를 알려 줬다. 당연히 이전에 그가 했던 고…백 비슷한 것과 검을 준 내용은 모조리 뺐다.

“물론 이주하 마스터께서 허락해야겠지만요. 어쨌든 정해지는 대로 연락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내 말에 감자 크로켓 하나를 순식간에 먹어 치운 박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헌이 협력해 준다면 이래저래 편해지긴 하겠군. 그쪽도 실력 좋은 능력자나 인력이 꽤 많을 테니.”

“네. 그리고 로헌도 프라우스 신도단에게 당한 게 있으니까요.”

“D45 구역 테러 말이죠?”

민아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주하 마스터께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로헌 길드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네요.”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 또한 신전에서 지내며 로헌의 소식을 들었던 터라 민아린의 말에 숨겨진 뜻을 쉽사리 눈치챌 수 있었다.

가해자가 명백한데도 언론이나 네티즌은 앞다퉈 로헌을 비난했다. 문제를 일으킨 자가 아닌 만만한 쪽을 몰아세우는 하이에나 같은 그 모습이 참 씁쓸했다.

“섣불리 확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로헌의 주인이 이주하 마스터인 만큼, 그분께서 끼어들지 않겠다고 결정하면 하태헌 부마스터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래. 로헌은 두고 보도록 하고.”

일이 얼추 정리됐는지 태블릿PC를 끈 천사연이 권정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사계 길드 쪽은 어떻게 됐지?”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천사연의 질문에 권정한이 평소처럼 미소를 띤 얼굴로 대답했다.

“지훈 형도 저와 같이 이결 형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흔쾌히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고마운 마음이라니. 권정한을 경호원으로 계속 내버려 둔 이유는 어디까지나 능력 때문이었던 터라 저런 얘기를 듣는 게 과분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권정한은 사마엘의 납치 사건으로 크게 다치지 않았나. 권지훈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와서 곁에 있어 줬던 기억이 난다.

“오늘부터 바로 찾아보겠다고 하셨어요. 뭔가 알게 되면 저한테 연락해 주실 겁니다.”

“좋네. 얘기가 잘 끝나서 확실히… 읏!”

사계 길드의 협조를 얻어 내서 안심하던 그때, 갑자기 귀에 느껴지는 차가운 손길에 어깨를 움츠렸다.

“무, 무슨 짓입니까?”

“가만히 있어.”

귀를 만진 사람은 옆에 앉아 있던 천사연이었다. 이 새끼가 미쳤나, 갑자기 남의 귀는 왜 잡아당기고 지랄이야?

천사연의 손목을 잡고 떼기 위해 힘을 줬지만 무슨 돌덩이처럼 꿈적도 하지 않았다.

“놓으시죠…….”

“이게 뭐지?”

“윽!”

피익!

아예 내 목덜미를 붙잡아 아래로 확 짓누른 천사연이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난데없는 행동에 어깨에 얌전히 올라가 있던 여우가 놀라서 펄쩍 뛰어올랐다.

“아까까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하태헌 작품인가?”

“한이결!”

김우진이 놀라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들도 보고 있는데 뭐 하는 짓이야.

“작작하세요, 좀.”

짜증을 담아서 천사연의 손을 쳐 내자 그가 이번에는 순순히 귀를 놔주었다.

“하태헌 부마스터가 준 아트 인벤토리 아이템입니다.”

“하태헌이 줬다고?”

“…뭐 문제 있습니까? 그냥 선물… 인데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천사연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천사연이 하태헌의 감정을 눈치챌 것 같아서 영 신경 쓰였다.

“이, 인벤토리 필요 없다고 했잖아.”

안절부절못하며 내 주변을 맴돌던 김우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불쑥 끼어들었다.

“그렇긴 한데… 선물을 주는데 어떻게 거절하냐. 고맙게 받아야지.”

“나도 사 줄 수 있어….”

아니, 인벤토리가 두 개나 필요하지는 않는데. 게다가 김우진에게 이런 비싼 걸 받고 싶지는 않았다.

“됐어. 여기에 10개나 들어간대.”

“그럼 인벤토리 말고 따로 필요한 건…….”

“없어, 없어.”

단번에 거절하자 녀석이 눈꼬리를 축 내리며 크게 실망했다. 거참. 내 선물을 사는 게 아니라 본인한테 돈을 좀 쓰면 좋겠는데.

“근데 티 많이 납니까? 전 아직 보지를 못해서.”

목덜미를 만지며 묻자 호기심 어린 얼굴로 뒤를 서성이던 박건호가 대답했다.

“짙은 색이라서 눈에 좀 들어오긴 하는군.”

그 정도인가? 옷에 가려지는 부위에 할 걸 그랬다. 이제 와서 뗄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찜찜해진 내게 민아린이 위로를 건넸다.

“문양이 예뻐서 타투처럼 보여요. 잘 어울리는데요?”

“그럼 다행이네요.”

이따 거울로 확인해 봐야겠다. 아무튼 지금은 인벤토리가 중요한 게 아니다.

“권정한, 사계 길드 쪽에서 연락이 오면 바로 말해 줄 수 있어? 늦은 밤이라도 상관없어.”

술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있으니 유흥가에서 발견될 가능성도 제법 컸다. 내 부탁에 권정한이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네. 그렇지 않아도 지훈 형한테 잡게 되면 언제든 전화 달라고 말해 놨어요.”

“미안하다. 신경 쓰게 해서.”

“괜찮아요. 이왕 은혜 갚는 거 확실하게 해야죠.”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 어쨌든 권정한과 사계 길드가 도와줘서 든든한 건 사실이었다.

‘이제부터는 최대한 빨리 잡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네.’

부산은 사계가 맡아 준 만큼 서울은 우리가 나서야 했다.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문제의 능력자를 피해자가 생기거나 신고를 당하기 전에 잡아 와야 하는 일이니 분명 쉽지 않겠지.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왔다.

***

다음 날부터 바로 행동에 나선 우리는 강남 주변을 시작으로 조금씩 영역을 넓혀 가며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관찰했다.

여전히 족쇄를 풀어 주지 않은 천사연 때문에 23층에 갇힌 나와 전투가 힘든 민아린, 권정한을 제외하고 김우진과 박건호, 우서혁이 주로 움직였다.

겨우 시간을 내서 연락한 차수연에게는 짐작했던 대로 아주 단단히 혼이 났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달래자, 차수연이 잔뜩 토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외출은 여전히 힘든 거야?]

“음, 아무래도 그렇죠….”

발목에 단단히 감겨 있는 족쇄를 힐끔 내려다보며 대답하자 잔뜩 불신에 찬 말이 귀를 찔러왔다.

[나랑 만나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 아냐?]

“에이, 설마요.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말은 잘하네. 나를 아주 까맣게 잊고 있었으면서.]

“하, 하하…….”

그건 명백히 내 잘못이라 할 말이 없었다. 어색하게 웃음만 흘리자 차수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맛있는 파스타 전문점 새로 알아 놨는데.]

느끼한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의문이 들었지만, 눈치 없이 따져 볼 만한 일은 아니었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나중에 꼭 시간 내겠습니다. 이번에는 정말입니다.”

[솔직히 믿음은 안 가지만… 좋아. 착한 내가 마지막으로 기회 한 번 더 준다.]

“감사합니다. 역시 차수연 씨가 최고예요.”

온 힘을 다해 아양을 떨자 기분이 훨씬 좋아진 차수연이 다음에 또 연락하라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화가 좀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다. 핸드폰을 내리며 안도하자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내가 하는 꼴을 지켜보던 천사연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저 자식이…….

“한이결.”

그 적나라한 비웃음에 한소리 하려던 그때였다. 근처 유흥 거리를 한 바퀴 둘러보고 온 김우진이 눌러썼던 모자를 벗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날이 갈수록 더워져서 모자에 마스크까지 낀 김우진은 조금 지쳐 보였다.

“고생했어.”

김우진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선 분신이 자연스럽게 내게 안겨 들었다. 그 행동이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아서 분신의 붉은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쭈뼛거리며 서 있던 김우진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여러 장소를 정찰해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 김우진의 분신 능력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천사연의 명령으로 물리지원팀 일정을 모두 멈춘 김우진은 벌써 며칠째 밤낮 구분 없이 강남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언제 어느 때 나타날지 모르는 그 술을 마신 능력자를 찾기 위해서.

문제는 김우진이 어느 정도 얼굴이 알려진 상태라 가벼운 차림으로 돌아다니기는 어렵다는 점이었다. 가뜩이나 더운데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까지 가려야 한다니…….

“내가 날아서 확인하는 게 빠르고 좋다니까요.”

답답한 마음에 이미 여러 번 했던 말을 다시 꺼내자 보고서를 읽고 있던 천사연이 느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지금도 충분한데 뭐 하러?”

“다들 안 해도 될 고생을 하고 있잖습니까.”

“글쎄.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만.”

팔락. 서류를 한 장 넘긴 천사연이 시선을 돌려 김우진에게 물었다.

“어떤가, 김우진. 정 힘들다면 대신 한이결을 내보내도록 하지.”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

단호하게 대답하는 김우진의 태도에 천사연은 그것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재수 없는 놈.

내 품에 찰싹 안겨 있는 분신을 없앤 김우진이 땀에 살짝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수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능력자로 추정되는 몇이 보이긴 했지만 특별한 것 없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덜미를 잡기 어려울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김우진이 씻으러 간 사이에 천사연의 태블릿PC로 로헌이 보내 준 관리 기록을 살펴봤다.

하태헌은 레퀴엠을 들렀던 그날 저녁에 전화로 공식적으로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로헌은 이주하가 특히 믿는 길드 직원 세 명과 하태헌이 직접 나서서 사람들이 유독 많이 몰리는 장소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홍대 입구, 클리어. 신촌도 클리어. 잠실 부근도 이상 없음.’

문제없다는 결과만 줄줄이 적혀 있는 관리 기록을 보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16일간 9건이나 터지던 사건이었는데 잡으려는 마음을 먹자마자 이렇게 모습을 감추냐. 이건 너무하잖아.

태블릿PC를 붙잡고 끙끙거리는 나를 본 천사연이 알 만하다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성급하게 굴어 봤자다. 마음을 좀 비우는 게 좋을 텐데.”

“그거야 알긴 하는데요.”

“마스터 말씀이 맞아요, 이결 씨.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1층에 있는 길드 카페에서 디저트와 커피를 사 온 민아린이 바닐라라테를 내게 건네줬다.

“분명 꼬리가 잡힐 거예요. 웬만한 곳은 다 뒤져 보고 있잖아요. 부산 쪽도 그렇고.”

“…그렇죠. 커피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봄날 햇살을 연상시키는 다정한 위로에 조급하게 달려 나가던 생각이 조금은 진정됐다. 역시 민아린이다. 천사연과는 다르다니까.

“이결 형.”

커피에 꽂혀 있는 빨대를 막 입에 물려던 그때였다. 핸드폰을 들고 자리를 비웠던 권정한이 드물게 굳은 얼굴로 나를 불렀다.

“지훈 형에게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그가 딱딱한 말과 함께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사진 하나가 띄워져 있었다.

“잡았다고 합니다. 술에 취한 능력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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