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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03)화 (203/394)

203화 

“으……!”

볼에 닿아 오는 간지러운 느낌에 등줄기로 소름이 훅 치솟았다. 기겁하며 후다닥 물러서는 나를 순순히 놔준 하태헌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무, 무…슨…….”

얼굴에 입을 맞춰 오는 그의 행동에 엘로힘의 집에서 들었던 그 고…백 비슷한 것이 다시 떠올랐다. 갑자기 심장이 급격하게 뛰기 시작하며 온몸이 뜨거워졌다.

“…대가다.”

“예?”

“대가라고.”

이딴 게 무슨 대가야! 어이없는 심정을 숨기지 못한 채로 바라보자 하태헌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까맣게 잊은 줄 알았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가 보군.”

“……그걸 어떻게 잊습니까?”

“그래. 잊지 말고 계속 기억해라.”

품에서 볼로 타이를 꺼낸 하태헌이 들고 있던 SS급 검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러고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내게 손짓을 했다.

“그만할 테니까 가까이 와. 아직 할 얘기가 남았으니까.”

“…믿어도 되는 겁니까?”

“싫으면 내가 가겠다.”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다가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눈치를 보며 조금씩 걸어가자 내 팔을 붙잡아 확 끌어당긴 하태헌이 검 대신 쥐고 있던 것을 보여 주었다.

“이건…….”

하태헌의 품에 반쯤 안긴 채로 그가 내민 것을 받아 들었다.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물건. 한이결이 여동생에게 주기 위해 샀던 목걸이였다.

“이걸 왜 하태헌 씨가 가지고 있습니까?”

중앙에 보석이 깨진 목걸이는 차수연에게 넘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상태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달 전에 차수연 능력자가 길드로 찾아왔다. 너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걱정하더군.”

아. 그 말을 들으니 차수연에게 받았던 메신저 내용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하태헌 씨를 만났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목걸이는 그때 받으신 겁니까?”

“그래. 네가 예전에 맡겼다고 하던데.”

“제가 가진 인벤토리가 없어서요. 그래서 잠깐 부탁했습니다.”

“연락이 닿는다면 전해 달라고 해서 내가 대신 보관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차수연에게 부탁해 놓고 그대로 까먹고 있었다. 목걸이를 부순 사람이 하태헌이라는 게 새삼 기억났다.

한이결의 과거를 알기 전에는 목걸이도 어쩐지 함부로 다루기 어려워서 맡겼던 거지만… 지금은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이결과 여동생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돼서 그런가?

‘아니면 엘로힘의 말처럼 이제 한이결보다 내 기운이 더 강해져서 그럴지도 모르고.’

이유야 뭐가 됐든 이제는 필요 없어진 물건일 뿐이다. 그렇다고 버릴 정도는 아니고… 대충 아무 서랍에 넣어 놔야겠다.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걸이를 손에 쥐며 대답하자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던 하태헌이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하태헌 씨?”

단순한 포옹이라기에는 어딘가 서글픈 감정이 느껴져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를 안고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하태헌은 곧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네?”

“목걸이 부숴서. 너에게는 중요한… 물건 아닌가?”

“아니, 그건…….”

난감한 마음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하태헌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긴 한데.

“차수연 능력자 인벤토리에 따로 맡겨 둘 정도였으니…….”

“하태헌 씨가 알고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애당초 목걸이를 부순 이유도 제가 셔터 아이템이라고 속여서 그런 거고요.”

“그렇다 해도 부순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의기소침해진 하태헌을 최대한 열심히 위로했지만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저번에 나 뺨 때린 거로도 엄청 미안해하더니, 이제는 목걸이냐.’

이번에는 솔직하게 설명도 못 해 주는데. 한숨을 삼켜 내며 하태헌의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정말 괜찮습니다. 계속 신경 쓰시면 저도 불편해요.”

“…….”

그러니까 이 얘기는 그만하자. 지금 목걸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내 말에 조용히 얼굴을 비비적거리던 하태헌이 드디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과만 하려는 건 아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어리둥절해하는 내 볼을 가볍게 툭 두드린 하태헌이 볼로 타이에서 이번에는 생소한 것을 꺼내 들었다.

새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깔끔한 문양의 검푸른 색 스티커였다.

“아트 인벤토리다. 소지하기 편한 액세서리형 인벤토리는 경매장에 풀린 게 없더군. 차수연 능력자가 쓰는 가방 형태는 오히려 번거로울 것 같아서 대신 이거로 샀다.”

예전에 김우진에게 사 줬던 그 인벤토리와 같은 아이템이었다. 대신 그보다 생김새가 더 크고 화려했다.

“일반적인 아트보다 크기가 좀 더 큰 대신 10개까지 보관 가능하니까 여러모로 쓸 만할 거다.”

“…….”

“받아라.”

설마 하태헌에게 무언가를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너무 어색해서 손이 절로 움찔거렸다. 귀와 목덜미에 자꾸만 열이 올랐다.

“목걸이 때문에 주시는 거라면 전…….”

“거절하지 말고 받아 주면 좋겠군.”

“……으음, 감사합니다.”

어쩐지 하태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웅얼웅얼 대답했다. 내가 선물 줄 때 하태헌은 이 정도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러지.

“손에 붙이기에는 크기가 커서 다른 곳이 나을 것 같은데. 자주 사용할 게 아니라면 목 근처도 괜찮겠군.”

“저는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뒤돌아봐라.”

하태헌의 말대로 등을 돌리자 그의 커다란 손이 목뒤를 만져 왔다. 왼쪽 귀 뒤와 그 아래. 간질간질한 느낌에 자꾸만 어깨로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 새로 나온 제품이라 아이템이 표식 근처에 있지 않더라도 쉽게 넣고 꺼낼 수 있다는군.”

다 붙였는지 하태헌이 손을 떼고 물러섰다. 혼자서는 볼 수 없는 부위라 제대로 된 확인은 이따 욕실에서 해야 할 것 같다.

“흠, 한번 해 볼게요.”

마침 목걸이도 있으니 시험 삼아 써 보기에는 제격이었다. 손에 올려진 목걸이를 넣겠다고 생각을 하자 귀밑 부근이 시원해지면서 목걸이가 연기로 변해 흩어졌다.

‘제대로 된 건가?’

사용법을 확실히 익히기 위해 이번에는 목걸이를 떠올리자 새하얀 연기가 목걸이 형태로 변해서 손바닥 위에 올려졌다. 생각만 하면 물건이 튀어나온다니, 신기하긴 했다.

“쓸 때마다 푸른색으로 빛나는군.”

“엄청 편하네요. 잘 쓰겠습니다.”

“그래.”

손으로 만져 봤을 때는 평소랑 별다를 게 없었다. 아트 인벤토리가 붙은 목덜미 부근을 만지작거리는 나와 시선을 맞춘 하태헌이 말했다.

“궁금한 건 아직 많다만… 다음에 마저 하기로 하지.”

그 말에 잠시 눈을 굴렸다. 하긴. 부탁할 것도 했고 필요한 것도 서로 나눴으니 이 정도면 당장 급한 얘기는 끝냈다고 봐도 되겠지.

“알겠습니다. 슬슬 나가죠.”

***

피이익!

거실로 나오자마자 민아린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여우가 재빨리 달려왔다. 내 어깨 위로 올라와 자신을 노려보는 여우의 모습에 하태헌이 눈가를 좁혔다.

“어딘가 익숙한 놈이군.”

“엘과 함께 지내던 하얀 아이 중 막내입니다. 허락 맡고 데려왔어요.”

내 대답에 하태헌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그놈들.”

“네. 토끼랑 고양이의 동생입니다. 이렇게 작아도 할 줄 아는 게 제법 많아서 도움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여전히 하태헌을 경계하는 여우를 품에 안아 등을 쓰다듬자 녀석이 내 팔 사이로 얼굴을 푹 박았다.

하태헌 엄청 무서워하네…. 같은 SS급인 천사연 상대로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역시 분위기 차이인가?

“이결 씨.”

나와 하태헌의 대화가 얼추 마무리됐다는 것을 알아챈 민아린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게 물었다.

“우진 씨가 지금 간단한 간식 만들고 있는데, 먹을 거죠?”

간식?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먹었던 식사와 디저트를 떠올렸다. 박건호가 포장해 온 도시락과 권정한이 산 케이크, 김우진의 쿠키까지.

‘여기서 더 뭔가를 먹는다고?’

다들 배 안 부른가. 진심으로 궁금해진 나는 거실을 둘러봤다. 소파에 드러누워서 TV를 시청하는 박건호와 그 옆에 앉아서 태블릿PC로 일을 하는 천사연, 핸드폰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권정한이 보였다.

김우진과 우서혁은 주방에 가 있는 건가. 하태헌과 얘기를 제법 길게 했음에도 아무도 떠나지 않은 게 꽤 의외였다.

“아뇨, 전 배가 불러서… 그보다 아까 먹던 쿠키도 아직 남아 있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우진 씨가 워낙 만들고 싶어 하는 눈치라서요. 혹시 조금만 먹는 건 어떠세요?”

민아린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곧장 알아들은 나는 살짝 웃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먹어야죠.”

“좋아요! 곧 완성된대요. 으음, 하태헌 부마스터께서도 괜찮으시면 드시겠어요?”

어색하게 건넨 제안에 하태헌이 고개를 저었다.

“다음 기회에 먹겠습니다. 이제 길드로 돌아가 봐야 해서.”

깔끔한 거절에 민아린은 오히려 활짝 미소 지으며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머, 그런가요? 아쉽네요.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

할 말이 없어진 하태헌과 웃고 있는 민아린 사이에서 묘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뭐지, 이건. 어째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 하태헌을 급히 현관 쪽으로 잡아끌었다.

“오늘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태헌 씨.”

정장 구두를 신은 하태헌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자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다음에 올 때는 더 오래 있다가 가지.”

“무리 안 하셔도 괜찮은데요.”

“널 볼 수 있으면 뭐든 상관없다.”

“예……?”

설마 하태헌이 이런 소리를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나는 충격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혼란에 빠진 나를 내버려 두고 하태헌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말을 이었다.

“아까 얘기한 사건 관련 내용은 마스터와 상의를 끝낸 후에 바로 연락하겠다.”

“알겠습니다. 기다릴게요.”

“그리고 다른 부분은…….”

거기서 잠시 멈춘 하태헌이 천천히 방 안을 살폈다.

“하태헌 씨?”

“어쨌든 지금은 여기가 편해 보이니…….”

이해하기 힘든 말을 중얼거린 그가 시선을 내려 내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바라봤다.

“당분간은 이대로 있어도 나쁘지 않겠군.”

“네?”

“족쇄. 풀지 말라는 뜻이다.”

“…….”

“전화하겠다.”

천사연의 편을 드는 하태헌의 모습에 나는 두 번째로 큰 충격을 받았다.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힌 나를 두고 하태헌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철컹, 쿵.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슬그머니 내 뒤로 걸어온 천사연이 즐거운 음성으로 한 마디 했다.

“역시 하태헌 부마스터는 내 깊은 뜻을 이해하는군.”

“…닥치시죠.”

정말이지 한국에 돌아온 후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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