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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202)화 (202/394)
  • 202화 

    은근히 내 시선을 피하는 듯한 하태헌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데, 천사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한이결을 묶어 둔 이유는 허락도 없이 길드에 몰래 침입했기 때문이다. 아주 도둑이 따로 없더군.”

    아니, 대체 언제까지 저 소리를 할 셈이지? 나는 허리를 붙잡고 있는 하태헌의 딱딱한 팔을 힘줘서 밀어내며 외쳤다.

    “오해입니다. 그리고 두 분 다 무기는 좀 치우세요.”

    “그래. 이해했으면 이제 슬슬 들어오는 게 좋을 것 같군. 설마 현관에서 이러고 대화하려는 건 아니겠지?”

    “…….”

    나와 천사연을 번갈아 보며 미간을 찌푸린 하태헌이 고민 끝에 나를 놔주며 검을 없앴다. 그에 맞춰 천사연도 인벤토리에 S급 검을 집어넣었다.

    “끝났습니까?”

    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하태헌이 구두를 벗고 들어서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우서혁이 내게 물어 왔다. 아이고, 미안해라.

    “네, 죄송해요. 들어오세요.”

    “무슨 일 있었어요?”

    때마침 통화를 끝낸 권정한도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은 나는 둘을 데리고 거실로 걸어갔다.

    “헉…….”

    아무 생각 없이 하태헌에게 다가가려던 나는 숨 막히게 어색한 거실 분위기에 흠칫 놀라며 멈춰 섰다.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서 있는 하태헌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천사연. 거기에 김우진과 박건호, 우서혁에 권정한까지.

    커다란 덩치의 사내놈들이 우글우글하니 처음으로 거실이 좁아 보였다. 그 사이에 낀 자그마한 민아린은 무슨 꽃사슴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모이는 건 처음이긴 하네.’

    방을 가득 채운 침묵에 식은땀이 다 흘렀다. 안 되겠다. 나라도 나서서 서로 인사를 시켜 줘야겠다.

    “흠흠. 그러니까, 음. 이쪽은… 로헌의 하태헌 부마스터입니다.”

    “…….”

    “…….”

    창피함을 무릅쓰고 입을 열었건만 돌아오는 호응이 없다. 한마디 말없이 멀뚱히 나만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에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대체 왜들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 정도로 사교성이 없지는 않았잖아. 뭐가 문제냐.

    “반가워요, 하태헌 부마스터. 저번 게이트 때 한 번 뵀었죠? 레퀴엠 소속 민아린 힐러입니다.”

    그때,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내려왔다. 레퀴엠 놈들과 하태헌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뒤로 물러서 있던 민아린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예. 물론 기억합니다. 지난번에는 신세 졌습니다.”

    힐끗 나를 한번 본 하태헌이 순순히 민아린의 인사에 답했다.

    “신세라뇨. 저야말로 여러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역시 민아린이다. 분위기가 아까보다 훨씬 나아져서 불안했던 마음이 좀 놓였다.

    “이쪽은 박건호 팀장님이고 제 경호원인 권정한 능력자입니다. 우서혁 비서님은 이미 알고 계시죠?”

    온종일 인사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냥 한 명 한 명 짚어 가며 빠르게 설명했다. 김우진도 인사를 시키려고 했지만, 녀석이 내 시선을 노골적으로 피했다.

    “로헌의 부마스터 자리를 맡고 있는 하태헌입니다.”

    어떻게든 경직된 공기를 풀어 보려는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하태헌이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태헌 부마스터. 레퀴엠 소속 특수작전부 팀장 박건호입니다.”

    그제야 내게서 시선을 돌린 박건호가 씩 웃으며 하태헌과 악수했다. 진작 좀 이럴 것이지.

    “인사는 여기까지 하죠. 하태헌 씨, 저랑 얘기 좀 합시다.”

    한시라도 빨리 이 답답한 공간에서 하태헌을 분리하고 싶었다. 권정한과도 할 얘기가 있었지만, 일단은 하태헌이 우선이었다.

    피익!

    하태헌의 팔 한쪽을 품에 끌어안듯 붙잡으니 어깨에 얌전히 있던 여우가 질색하며 민아린에게로 포르륵 도망쳤다.

    아, 맞아. 여우가 SS급은 싫어한다고 했지. 하태헌을 침실로 끌어당기며 민아린에게 말했다.

    “여우 좀 부탁드립니다, 민아린 씨.”

    “걱정하지 마세요.”

    여우를 민아린에게 맡겨 놓고 순순히 끌려오는 하태헌과 함께 침실로 들어섰다. 저번에 천사연과 대화를 나눌 때처럼 쇠사슬을 불투명하게 만들어 문까지 꼭꼭 잘 닫았다.

    “으음, 따로 얘기할 만한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요.”

    “상관없다.”

    다른 사람 없이 하태헌과 단둘이 되자 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이 들었다. 나는 미처 묻지 못했던 안부를 꺼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한국에는 언제 돌아온 거지?”

    “도착한 지 하루밖에 안 됐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지갑과 핸드폰이 다 여기 있어서 바로 연락을 못 했어요.”

    나는 하태헌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게이트 폭탄 테러로 걱정을 좀 했었는데 다행히 크게 달라진 점은 없어 보였다.

    안부는 여기까지 하고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자. 하태헌과는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레퀴엠으로 불러서 죄송합니다. 사실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말해.”

    “요 며칠 서울에서 비슷한 범죄가 반복되고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능력자가 술에 취해서 능력이나 무기를 휘두르는 사건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하태헌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들어 보긴 했다. 반복되고 있다는 건 지금 처음 알았고.”

    “서울뿐만 아니라 인천과 부산도 상황이 똑같다고 합니다. 서울이 9건, 인천과 부산은 각각 5건과 7건째예요.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통틀어 21건인가? 이만한 숫자라면 확실히 그렇겠군.”

    “네, 그래서…….”

    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하태헌을 상대로는 뭔가를 부탁하기가 항상 힘들었는데, 레퀴엠으로 불러 놓고 도움을 청하려니 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혹시 괜찮으시면요.”

    “한이결.”

    목덜미를 쓸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하태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이 눈치 보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라. 나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그건 그렇죠….”

    “정 신경 쓰이면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나도 대가를 챙길 테니, 일단 말을 해.”

    대가를 챙긴다고? 확실히 그러면 부담이 좀 덜해지긴 하지.

    하태헌이 이렇게까지 달래 줬으니 나도 더는 망설일 수 없었다.

    “앞으로 또 비슷한 범죄가 발생한다면 관련 능력자를 우리 쪽으로 데려오고 싶습니다. 신고당해서 끌려가기 전에요.”

    “…술에 무언가 들어갔다고 생각하나 보군.”

    역시 하태헌이다. 설명하지 않은 부분까지 정확히 파악하는 모습에 나는 미소 지었다.

    “실은 어제 한국에 오자마자 평범한 학생들에게 식칼을 휘두르던 남자 한 명을 제압했습니다. 풍기는 기운은 C급 정도의 능력자였고 술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이미 만나 본 건가?”

    “네. 그때는 단순한 주정뱅이라고 생각했는데… 천사연을 만나서 설명을 듣고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태헌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역시 이 정도 설명으로는 설득하기 힘드네.

    ‘어디까지 말해 줘야 하지?’

    프라우스 신도단에 관한 내용까지는 알려 줘도 될 것 같긴 한데. 이럴 줄 알았으면 천사연과 미리 상의를 좀 해 둘 걸 그랬다.

    “하태헌 씨, 저…….”

    “알겠다.”

    “네?”

    “로헌도 협력하겠다. 마스터께 설명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하지.”

    “……네?”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지? 잘못 들었나? 그게 아니면 꿈이라도 꾸는 건가?

    “잠깐만요.”

    “확실하게 포획하는 방법은 따로 계획해 둔 게 있나?”

    “아뇨. 그건 아직…….”

    얼떨결에 대답하던 나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 하태헌의 어깨를 붙들었다. 왜 자꾸 혼자서 돌진하는 거야. 미치겠네.

    “제 말 좀 마저 들어 주세요.”

    “해라.”

    “선뜻 도와준다고 해 주셔서 감사한데요,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관리 본부가 무너져서 어쩔 수 없이 나서려는 거 아닌가?”

    …거기까지 알아챈 거야? 새삼 대단했다. 그러고 보면 어비스에서도 눈치 하나만큼은 천사연 못지않게 빨랐지.

    “그리고 어차피 프라우스 신도단과 관련이 있는 것 같으니 로헌에서 나설 이유는 충분하다.”

    “로헌이 왜… 아, 그러고 보니.”

    로헌과 프라우스 신도단의 연관성을 떠올려 보던 나는 곧 신생 게이트 D45 구역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를 기억해 냈다. 같은 것을 생각한 하태헌이 눈가를 굳힌 상태로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프라우스 신도단에 대한 정보를 모으던 참이었다. 당한 것은 갚아 줘야겠지.”

    “하태헌 씨도 이번 사건과 프라우스 신도단이 관련이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이따 돌아가서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확신이 드는군.”

    역시 나와 의견이 비슷하네. 정말 이번 사건에 프라우스 신도단이 엮여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프라우스 신도단의 뒤를 쫓고 있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니 미안해할 것 없다.”

    나를 배려해 주는 말에 쓰게 웃었다. 결국 대가 없이 부탁을 들어주려는 하태헌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이 사람에게는 항상 도움만 받는구나.

    “아.”

    나도 무언가 해 줄 게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숨겨 놨던 검이 떠올랐다. 마침 잘됐다. 하나를 설명하면 열을 이해하는 하태헌 덕분에 얘기가 빨리 끝났으니 이 틈에 검을 주면 되겠다.

    나는 후다닥 침대로 달려가서 커다란 매트리스를 끙끙거리며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눈을 깜빡이며 구경하던 하태헌이 능력으로 매트리스를 번쩍 들어 줬다.

    “감사합니다.”

    머쓱하게 웃으며 겨우 검을 꺼낸 나는 난장판이 된 침대는 일단 뒤로하고 하태헌에게로 돌아가 들고 있던 검을 내밀었다.

    “받으세요, 하태헌 씨. 선물입니다.”

    “…선물이라고?”

    “네! 완전 멋있죠? SS급 검입니다.”

    하지만 하태헌은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 검을 받아 가지 않았다. 어째서지? 나는 당황하며 급히 설명을 이었다.

    “하태헌 씨가 가져야 하는 아이템 맞습니다. D17 구역 게이트 기억합니까? 저랑 같이 지하로 떨어졌었던 그곳이요.”

    “기억한다.”

    “그때 방에 장미 문양 있었잖아요. 아, 장미가 아니라 작약이었긴 한데… 어쨌든 제가 예상했던 대로 아이템이 있었습니다.”

    “그게 이 검이라는 건가?”

    “맞습니다. 레퀴엠에 오기 전에 엘로힘의 도움으로 얻었어요. 하태헌 씨가 소유하고 있는 게이트에서 찾아낸 아이템이니까 받아 주세요.”

    제발 받아 주면 안 될까. 네가 거절하면 다시 매트리스 들어서 숨겨 놔야 한다고. 내 간절한 바람이 드디어 닿았는지 하태헌이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제법 무거웠는데 하태헌은 마치 나뭇가지를 쥔 것처럼 가볍게 들었다.

    “오자마자 숨겨 놔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쓰셔도 괜찮아요.”

    내 말을 들으며 검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하태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이결. 너도 알다시피 나는 능력으로 무기를 만들 수 있다.”

    “무기를 만들면 그만큼 신경도 써야 하고 기운도 소모해야 하잖아요. SS급 검이니까 능력으로 만든 검 이상으로 쓸 만할 겁니다.”

    그 말에도 하태헌의 딱딱한 얼굴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거절하면 큰일인데. 나는 그에게 바싹 다가가 한 번 더 설득했다.

    “하태헌 씨가 아니면 줄 사람도 없습니다. 저한테는 너무 무겁고요. 그러니까 받아서 잘 써 주세요. 저는 그거면 됩니다.”

    “……알겠다.”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하태헌이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아닙니다. 그간 저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검을 쥔 하태헌의 모습이 예상보다 훨씬 더 잘 어울려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신난 기분을 감추지 못하는 나를 잠시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쪽, 가볍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눈꼬리에 묘한 감촉이 스쳐 지나갔다.

    “……?”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웃는 그대로 바싹 얼어붙은 내 얼굴을 붙잡은 하태헌이 다시 한번 더 볼에 입을 맞춰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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