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51. 사건 주목
“어서 오십시오, 하태헌 부마스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표정이라고는 조금도 비치지 않은 상대의 무뚝뚝한 얼굴을 마주한 하태헌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현재 그가 있는 장소는 레퀴엠 길드의 중앙 홀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는 하태헌을 맞이한 것은 경호원 둘을 뒤로 거느리고 있는 멀끔한 인상의 남자였다.
‘이름이… 우서혁이라고 했던가.’
레퀴엠의 가장 유능한 비서이자 천사연의 오른팔. 강남 사건 이후로 제대로 된 만남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방문 목적은 전해 들었습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서혁은 중앙 엘리베이터가 아닌 오른쪽 복도 끝에 있는 관계자 전용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조용히 따르며 하태헌은 아까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게이트 테러로 사망한 유가족을 대상으로 추가 보상이 확정되어 그와 관련된 회의가 잡혔다. 외부 일정이 있는 이주하를 대신하여 참석한 하태헌은 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걸려 온 전화를 알아챘다.
무음으로 해 둔 터라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을 때마침 꺼내 들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뻔했다. 화면에 뜬 번호 주인의 이름을 본 하태헌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한이결. 그가 대체 어떻게 연락을 해 온 거지?
-하태헌 씨!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매 순간 그리워하던 목소리였으니까.
-으음, 네. 맞습니다.
자신이 아닌 레퀴엠부터 찾아간 한이결의 선택이 자못 섭섭했지만, 그래도 기쁜 마음이 더 컸다. 한이결이 드디어 돌아왔다. 한국으로.
-괜찮으시면… 레퀴엠 길드로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다 해도 레퀴엠으로 오라는 제안은 꽤 의외였다. 불쾌하기보다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가 저런 말을 괜히 할 리가 없었으니.
‘설마…….’
생각해 보면 애초에 한국에는 한이결을 노리는 놈들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하태헌이 프라우스 신도단을 떠올리고 미간을 찌푸린 그 순간이었다.
-여기서 계속해.
“…….”
갑자기 천사연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걸 들은 하태헌의 날렵한 눈썹이 불쾌하게 꿈틀거렸다.
-좀 놔 봐. 통화 마저 해야… 여보세요? 하태헌 씨?
턱 끝까지 올라온 질문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태헌은 앞뒤 재지 않고 가겠다는 대답부터 뱉어 냈다.
-네? 잠시만요, 하태헌 씨. 그게 아니라….
당황한 한이결에게는 미안했지만 바로 출발하려면 어쩔 수 없이 통화는 끝내야 했다. 어차피 곧 만날 테니까 그때 다시 대화하면 되겠지. 그렇게 하태헌은 곧장 로헌을 나와 레퀴엠으로 향했다.
“한이결 능력자는 어디 있습니까?”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하태헌이 묻자 우서혁이 23층 버튼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23층 방에 계십니다.”
“방?”
“예. 이전부터 줄곧 사용해 오신 방입니다.”
이전부터 줄곧 사용해 왔다고? 단순히 레퀴엠에 들를 때만 이용했다기에는 어딘가 묘하게 들렸다.
그러고 보니 한이결이 지금껏 어디서 어떻게 지내 왔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하태헌은 심장 한구석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연히… 돌아갈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척이나 가난했던 자신도 최소한 몸 하나 뉠 곳은 있었으니까.
-여동생한테 주려고… 산 거라고 해요. 그런데 여동생은 이미…….
일전에 차수연을 만났을 때 들었던 얘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가슴속이 뜨거우면서도 아릿한 고통이 퍼져 나갔다.
띠링.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23층에 도착했다. 위잉, 부드럽게 열린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새하얀 복도가 나타났다.
“이쪽입니다.”
우서혁을 뒤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하태헌은 복잡해진 마음을 힘겹게 추슬렀다.
뭐가 됐든 일단 만나자. 만나서 상황 설명도 듣고 목걸이도 돌려줘야겠다.
‘그리고…….’
정말로 지낼 곳이 여의치 않은 상태라면 제집으로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방이야 남아돌고, 지난번에 들르면서 입었던 옷도 깨끗하게 보관하고 있으니 지내는 데에 불편한 점은 없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하태헌은 문득 깨달았다.
‘…아주 괜찮은데.’
왜 진작 그러지 않았지? 한이결도 벌써 몇 번이나 들렀으니 별로 어색하지 않을 거다.
만나서 해야 할 말이 하나 더 늘었다. 한이결의 성격대로라면 분명 처음에는 괜찮다고 거절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차근차근 공을 들여서 설득하면 그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여러 문을 지나 도착한 곳은 23층 복도 가장 끝이었다. 제일 깔끔하면서 유일하게 도어 록이 달린 문을 앞에 두고 우서혁이 손짓했다.
“잠겨 있지 않으니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의 말대로 문손잡이를 잡은 하태헌은 망설임 없이 닫힌 문을 열었다.
끼익.
이음새에서 울리는 옅은 쇳소리와 동시에 제법 넓은 현관 입구가 드러났다. 그 너머에는 소파와 테이블, TV가 놓인 거실 안쪽이 얼핏 보였다.
“앗, 이결 씨. 오셨나 봐요.”
은은하게 퍼진 커피 향 사이로 일전에 들어 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누군가 급히 일어서서 제 쪽을 향해 달려 나왔다.
“하태헌 씨!”
그가 예상했던 대로, 혹은 기대했던 대로 달려 나온 상대는 한이결이었다. 낯선 곳을 경계하는 짐승처럼 현관 앞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하태헌의 굳은 어깨가 살짝 풀렸다.
“한이결.”
하태헌이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자 한이결이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꽃이 피는 것처럼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새하얗고 작은 얼굴을 꼼꼼히 살피던 하태헌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어깨에 뭔 희멀건 것을 달고 있긴 하지만 최소한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여기고 안심하려던 그 순간.
“……?”
하태헌의 시선이 한이결의 발목에 내리꽂혔다.
***
간식을 가져다주겠다는 김우진은 말 그대로 처음 보는 쿠키를 접시에 담아 왔다. 곰돌이 모양의 작은 쿠키였는데 굉장히 고소하고 맛있었다. 간식이라고 하길래 아까 권정한이 사 온 케이크나 더 가져올 줄 알았는데.
“쿠키가 갑자기 어디서 생긴 거야?”
자꾸만 쿠키에 얼굴을 들이미는 여우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묻자 김우진이 시선을 피하며 머뭇거리더니 어물어물 대답했다.
“그냥, 사 둔 건데… 며칠 전에…….”
“그냥 사 뒀다고?”
“…네가 혹시 돌아오면 주려고…….”
“아.”
그 말에 소파에 앉아 있던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어쩐지 순식간에 굉장히 부끄러워졌다. 뭐랄까, 가엾은 강아지를 괴롭힌 나쁜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가슴이 따끔거리는 건 양심이 아파서 그런 건가?’
옆에 앉아 있던 천사연이 그대로 굳어 버린 내 귓가에 웃음기를 담아 작게 속삭였다.
“쓰레기.”
“…….”
닥쳐.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한테는 듣고 싶지 않아.
보는 눈이 있어서 욕도 못 하고. 울분을 담아 쿠키를 입 안에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그러자 김우진이 기쁜 얼굴로 우유가 담긴 머그잔을 내 쪽으로 밀어 줬다.
“그렇게 맛있어? 천천히 먹어.”
“…….”
가슴이 아까보다 더 아파졌다.
‘미안하다, 김우진…. 내가 다음에는 꼭 말하고 갈게.’
앞날은 모르니까 떠나지 않겠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지만.
피이익! 피익!
그런 와중에도 여우는 계속 쿠키에 욕심을 부렸다. 머리가 잡힌 와중에도 계속 칭얼거리며 접시를 향해 앞발을 뻗어 대는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분명 엘로힘이 먹을 걸 챙겨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그보다 다른 건 다 무시하고 유독 디저트에만 이러는 걸 보면 배고픈 상태가 아닌 건 확실했다.
“그만 좀 해.”
여우를 허벅지 위에 올려서 앞발을 양손으로 붙잡아 만세를 시키던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앗, 이결 씨. 오셨나 봐요.”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여우를 어깨에 올리고 곧장 일어섰다. 여기저기 부딪혀서 차르륵 울리는 쇠사슬을 달고서 현관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하태헌 씨!”
일하다 왔는지 감색 빛 정장을 갖춰 입은 하태헌의 검은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얼굴을 찬찬히 살핀 그가 친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이결.”
그 부름에 반가움이 밀려들었다. 제대로 만난 게 대체 얼마 만이지.
“바쁜데 힘들게 오신 거 아닙니까?”
“…괜찮다.”
한 박자 느리게 대답한 하태헌이 돌연 미간을 험악하게 구겼다.
…왜 그러지? 방금까지 기분 좋아 보였는데. 역시 레퀴엠이라서 그런가? 나는 일단 통화가 끊겨서 못다 한 사과부터 꺼냈다.
“혹시 제가 부담을 드린 건 아닌가 해서요. 이미 오셨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모로 불편하실 텐데. 다음번에는 제가 꼭…….”
“한이결.”
“예?”
“그건 됐고.”
말을 끊어 낸 하태헌이 내 발목에 걸린 족쇄를 손으로 정확히 가리키며 한마디 했다.
“이건 뭐지?”
“아, 이건…….”
천사연 개자식. 풀어 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 다 무시하다니. 얼굴에 뜨거운 열이 훅 퍼지는 것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음,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다?”
“네. 그냥 셔터 아이템입니다.”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그와 나를 둘러싼 분위기는 한층 더 서늘해졌다.
“저도 풀고 싶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죄송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반겨서.”
“…….”
가만히 내 얘기를 듣던 하태헌에게서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풍기며 손 근처로 검은 먼지가 빠르게 모여들었다.
“하, 하태헌 씨?”
능력을 쓸 정도로 내가 꼴 보기 싫었던 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당황한 사이에 새까만 검을 만들어 쥔 하태헌이 돌연 내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윽……!”
나를 품에 안은 하태헌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카앙! 검날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인사가 꽤 거칠군, 하태헌 부마스터.”
어느새 뒤에 와 있는 천사연이 S급 검으로 하태헌의 공격을 막으며 살짝 웃었다. 검은 대체 언제 꺼내 든 거야.
“무슨 짓을 한 거지? 설명해라.”
“설명할 게 있나? 보이는 그대로인데.”
능숙하게 검을 쳐 낸 천사연이 도리어 뻔뻔하게 물었다.
“왜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군. 한이결이 레퀴엠이 아닌 로헌을 찾아갔으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 같은데. 안 그런가, 하태헌 부마스터?”
듣던 내가 다 어이가 없었다. 누구랑 누구를 같은 취급을 하고 있어? 하태헌은 이런 쓸모없는 짓 절대로…….
“……당장 풀어.”
“…….”
…왜 부정을 안 하세요, 하태헌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