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로헌의 도움도 필요했다. 하태헌이 내 말을 들어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래도 만나서 얘기 정도는 해 보는 게 낫겠지.
도움을 바라는 처지에 보러 와 주길 바라는 건 너무 염치없으니 내가 직접 로헌으로 가야 했다. 그러려면 족쇄부터 풀어야 하고.
“흐음, 로헌 부마스터를 만나러 가야 하니 족쇄를 풀어 달라?”
……그런 의미로 한 말인데, 어째 거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뭐야, 이 반응들은.
“글쎄.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군.”
주변을 둘러보며 당황하는데, 천사연이 뭔가 많은 의미가 느껴지는 눈빛을 하고선 입을 열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널 묶어 둔 건 길드에 몰래 침입했기 때문이다. 쉽게 풀어 줄 수는 없지.”
“아니, 아직도 그 소리를…….”
“마스터 말씀이 맞군. 로헌 부마스터한테 기밀을 빼돌릴 수도 있잖아.”
어이없어서 한 소리 하려는데 박건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이 자식들이 진짜.
“맞긴 뭐가 맞습니까?”
“로헌 부마스터를 이토록 만나고 싶어 하니까 더 의심스러운데. 그렇지 않습니까, 마스터?”
“확실히. 하태헌 부마스터를 여기로 부르는 게 아닌 이상은 만나게 해 줄 수 없다.”
정말로 내가 기업 스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박건호와 천사연의 모습에 기가 막혀서 머리가 다 아팠다.
게다가 뭐? 하태헌을 여기로 부르라고? 레퀴엠 길드로?
“헛소리는 그쯤 하세요.”
다른 곳도 아니고 레퀴엠 길드 내부인데 부른다고 오겠냐고. 그냥 만나지 말라는 소리잖아. 이마를 짚은 내 꼴이 웃긴지 입술을 끌어 올린 천사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헛소리라니. 물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 아닌가?”
“당연히 거절하겠죠.”
“이것 참, 하태헌 부마스터도 불쌍하군. 이렇게 신뢰를 받지 못해서야….”
“…….”
하태헌의 사정을 다 알면서 저딴 말이나 하는 천사연이 너무나도 재수 없었다. 다른 사람 없이 둘이서만 있었으면 욕이라도 한번 시원하게 했을 텐데.
입을 꾹 다물고 욕 대신 노려보기라도 하는데,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던 민아린이 천진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근데 이결 씨, 한번 여쭤라도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거절할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운 좋게 시간이 된다면 오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민아린이 이 대화에 말을 얹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터라 조금 놀랐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머뭇거리자 이번에는 우서혁까지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로헌과는 현재 나쁘지 않은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으니 눈치 볼 필요 없습니다.”
“예? 아니, 저…….”
“무엇보다 한이결 씨는 하태헌 부마스터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지 않습니까? 가볍게 제안 정도는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천사연이 빙글빙글 웃으며 한마디 했다.
“그렇다는군.”
“…….”
내 편은 아무도 없나? 서글픈 현실에 어깨에 올라타 있던 여우가 피익, 하고 위로를 보내왔다. 고맙다, 정말.
“알겠습니다. 다들 그렇다면야 연락은 해 보겠는데… 만약 거절하면 그땐 어떡할 겁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도록 하지.”
풀어 준다는 대답은 끝까지 안 하네. 짜증 나는 새끼.
“그럼 저는 지훈 형이랑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요.”
“부탁할게.”
“네. 잘 꼬셔 볼게요.”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살살 눈웃음을 지은 권정한이 방을 나갔다. 부디 긍정적인 답변이 오기를 바라며 나도 하태헌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침에 차수연한테 연락 한번 하려고 했었지.’
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다. 분명 하태헌과 관련해서 나한테 할 얘기가 있어 보였는데.
“음…….”
어쩔 수 없다. 지금 차수연과 대화를 할 수는 없으니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미안한 마음을 밀어 두며 하태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 음이 들려오는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댄 나는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고 있는 모두의 시선에 눈가를 좁혔다.
“다들 안 바쁩니까? 저만 보고 있지 말고 각자 할 일 하시죠.”
“난 백수라서.”
그 말에 박건호는 오히려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고, 김우진은 머뭇거리며 눈을 피했다. 결론적으로 아무도 자리를 비키지 않는 모습에 한숨만 나왔다.
그런 와중에 전화는 하태헌이 받지 않아 통화 연결 음만 길게 이어졌다.
‘혹시 내 이름 뜬 거 보고 일부러 안 받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갑자기 자신감이 팍 꺾였다.
그와는 워낙 이런저런 일이 많았던 터라 내 연락을 피한다 해도 충분히 이해됐다. 게다가 엘로힘의 집에서 같이 지낼 때 그런…… 일도 있었고.
한참을 기다려도 받지 않는 상황에 슬퍼진 나를 보며 천사연이 깐족거렸다.
“받지 않는군. 하태헌 부마스터 쪽에서 피하는 건가?”
“…조용히 하세요.”
진짜 짜증 난다. 한 대만 때릴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
[……한이결?]
그때였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토록 기다리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너무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하태헌의 이름을 외쳤다.
“하태헌 씨!”
[하아…….]
내 부름을 들은 하태헌이 여러 감정이 느껴지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목소리는 본인이 맞군. 이 번호는 내가 준 핸드폰 같은데.]
그제야 예전에 하태헌에게 부탁해서 핸드폰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머쓱하게 목덜미를 쓸며 입을 열었다.
“아, 네. 맞습니다.”
[한국인 건가?]
“앗, 네. 맞습니다.”
[…설마 레퀴엠 길드로 간 건 아니겠지?]
“으음, 네. 맞습니다.”
딱딱한 음성에 눈치를 보며 어물어물 대답하자 하태헌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쩐지 원망이 느껴져서 변명을 덧붙였다.
“여기 레퀴엠 방에 지갑하고 핸드폰을 두고 가서요. 찾으려고 왔는데 어쩌다 보니까 이게…….”
[나한테 왔으면 둘 다 새로 줬을 텐데.]
“에이, 그럼 너무 아깝잖아요.”
[지금 아까운 게 문제인가?]
…그럼 뭐가 문제지? 단호한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과 눈이 딱 마주쳤다.
“흠, 흠.”
언제 올린 건지 모를 입꼬리를 샥 내리며 어색한 헛기침을 뱉어 냈다. 오랜만에 하는 하태헌과의 통화가 기뻐서 나도 모르게 그만….
아무튼 이럴 때가 아니다. 나는 애써 얼굴을 굳히고 본래 목적을 꺼냈다.
“하태헌 씨, 지금 바쁘세요?”
[말해라.]
“괜찮으시면… 레퀴엠 길드로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레퀴엠?]
되묻는 말에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엄청 긴장되네.
‘역시 힘들 것 같다니까.’
가뜩이나 하태헌한테는 미안한 것도 많아서 도움 청하기가 쉽지 않은데….
기분 나빠진 하태헌이 전화를 끊을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급히 입을 열었다.
“그, 사정이 있어서요. 제가 천천히 설명해 드릴게요.”
아무래도 여기서는 대화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침실에 들어가서 마저 하려고 등을 돌리자마자 천사연이 팔을 잡아 왔다.
“뭐야?”
“여기서 계속해.”
[…….]
핸드폰 바로 옆에서 말한 탓에 천사연의 목소리가 하태헌에게도 들렸을 것 같다.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이래?
“좀 놔 봐. 통화 마저 해야… 여보세요? 하태헌 씨?”
[가겠다.]
“네?”
[간다고 말했다. 레퀴엠 길드로. 지금 바로 출발하지.]
“……네?”
갑자기? 방금까지는 거절할 분위기 아니었나?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나는 원하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혹시 내가 무의식중에 강요하는 느낌이라도 줬나? 이런 일로 하태헌을 부담스럽게 하고 싶지는 않은데.
“잠시만요, 하태헌 씨. 그게 아니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라.]
“하……!”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뚝 끊어졌다. 이게 뭐지.
허탈한 심정으로 멍청하게 서 있는 내 옆에서 천사연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우서혁에게 명령했다.
“대충 30분 내외로 도착하겠군. 미리 홀에서 대기하다가 하태헌 부마스터 도착하면 이쪽으로 안내하도록.”
“알겠습니다.”
우서혁이 방을 나가는 소리에 겨우 제정신을 차린 나는 그제야 겨우 상황을 이해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거절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하태헌이 지금 당장 이곳으로 온다고 했다. 그럼 난…….
거기까지 생각하자 시선이 절로 발목에 걸려 있는 족쇄와 쇠사슬로 향했다. 이 꼴을 하고 만나야 한다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태헌을?
‘그건 좀 창피한데…….’
하태헌이 질색하는 얼굴을 떠올리자 절로 목덜미에 열이 몰렸다. 나는 거실 소파 다리와 이어진 쇠사슬을 들고 천사연에게 급하게 부탁했다.
“이, 이거 좀 풀어 주시죠.”
“안 돼.”
천사연이 나를 보지도 않으며 부탁을 단번에 끊어 냈다.
“도망 안 갈 테니까 좀 풀어요! 어차피 하태헌 씨도 이쪽으로 오잖습니까.”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어차피 도망갈 것도 아닌데 굳이 풀 필요가 있나?”
이 새끼가…….
그럼 최소한 족쇄는 내버려 두고 쇠사슬만이라도 빼내 달라고 요구하려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발목에 족쇄만 달고 있으면… 그건 그대로 좀 묘하지 않나? 무슨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것 같잖아.
피이익, 픽!
내가 안절부절못하자 여우가 뭐라도 돕고 싶었는지 쪼끄마한 입을 벌려서 쇠사슬을 물고 잡아당겼지만, 조금의 흠집도 나지 않았다.
“하태헌 부마스터가 도착하면 사건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만으로도 바쁠 텐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얌전히 있도록.”
천사연은 이제껏 본 것 중에서 가장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부탁하면 어느 정도는 들어줬으면서, 대체 왜? 도망가지 않겠다고 말도 했는데.
“한이결, 진정해. 간식이라도 갖다줄까?”
“맞아요, 이결 씨. 의기소침하지 마세요. 생각보다 엄청 이상해 보이지는 않아요.”
“그냥 포기하지 그래. 로헌 부마스터도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겠지.”
“…….”
나와 천사연의 대화를 듣던 김우진과 민아린, 박건호가 한 차례씩 말을 얹었다. 이번에도 역시 내 편은 한 명도 없었다.
아직도 쇠사슬을 물고 낑낑거리는 여우만이 온전한 내 편이었다. 과연 하태헌은 도착하면 내 편을 들어 줄까?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