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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99)화 (199/394)
  • 199화 

    “좀 더 확실하게 알아낼 방법 없어?”

    “인천이나 부산은 어렵고, 서울은…….”

    양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리를 교차한 천사연이 나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관리 본부가 무너진 후로 아직도 제대로 복구가 안 된 상태라서 일 처리가 너무 느리더군. 그래도 손 놓을 수는 없으니 알아보고 있긴 하지.”

    “최소한 술이 어디에서 유통되는지만 알아내도 좋겠는데.”

    “쉽지 않아. 일단 문제가 생긴 능력자를 빼내 오는 것도 일이라.”

    “너 혼자라면 그렇지.”

    내 대답에 천사연이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그가 언짢아하는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로헌한테 얘기하자. 그리고 부산도 알고 있는 길드 마스터가 한 명 있잖아.”

    “흠. 로헌이라…. 그보다 부산이라면 설마 사계 길드를 생각하고 있는 건가?”

    “맞아.”

    부산에 있는 사계 길드의 마스터 권지훈. 권정한의 사촌 형이기도 한 그는 이미 여러 번 마주한 상대였다.

    “쉽게 응하지는 않을 텐데.”

    “일단 말이라도 해 봐야지.”

    반대할 줄 알았던 천사연은 의외로 별말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그 허락 같지도 않은 허락의 몸짓에 눈가를 좁혔다.

    “뭐가 이렇게 미지근해? 어차피 다른 좋은 방법도 없잖아. 이번 사건은 너도 처음이라며.”

    “처음이라서 그런 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제대로 된 파악이 필요해. 그 이유를 알기 전에는 섣불리 움직이고 싶진 않군.”

    냉정한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시간 속에 갇힌 천사연조차 지금껏 겪어 보지 못했던 상황이 생겨난 원인은 무엇인가.

    -지금으로서는 변수에 좀 더 집중하는 편이 좋겠구나.

    엘로힘과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변수.

    -우리가 짐작하지 못한 인물이 등장할 수 있어. 그리고 그건 굉장히… 위험하겠지.

    불쾌한 예감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정말로 이번 사건과 프라우스 신도단이 연관되어 있다면…….

    “모든 게 달라지면서 천사연, 너도 모르는 누군가가 끼어든 것 같아.”

    충분히 그럴 만했다. 애당초 내가 한이결의 몸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번 시간은 이전과는 다르니까.

    예상했다는 듯이 나를 담담하게 바라보는 천사연에게 말했다.

    “나와. 일단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

    ***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서 있던 김우진과 민아린은 우리가 침실을 나오자 대놓고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둘은 레퀴엠 소속이면서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건지 신기하네.

    피익.

    여우는 내가 나오자마자 민아린의 품에서 벗어나 곧장 날아왔다. 어깨 위로 내려앉은 여우를 쓰다듬으며 본론을 꺼냈다.

    “그… 권정한.”

    “네?”

    커피를 마시며 나를 흥미롭게 구경하는 권정한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주며 말문을 열었다.

    “권지훈 마스터께서는 요즘 어때. 잘 지내셔?”

    천사연에게 말이라도 꺼내 보는 게 낫겠다고 당당하게 대답했지만, 막상 부탁하려니 조금 머쓱하기는 했다.

    “지훈 형이요? 흠.”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눈을 몇 번 깜빡이던 권정한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왼쪽 눈 아래로 보이는 눈물점이 유독 돋보였다.

    “글쎄요. 저도 자주 연락하는 건 아니라서. 갑자기 지훈 형은 왜요?”

    “가능하다면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

    내 대답을 들은 권정한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무슨 일인지 알려 줄 수 있어요?”

    그 물음에 나는 옆에 서 있는 천사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권정한을 포함해서 지금 이 방에 있는 사람들에겐 말해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나와 의견이 같은지 천사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어제 만난 능력자와 비슷한 이들이 서울뿐만 아니라 인천과 부산에도 여러 번 나타났다고 합니다. 술에 만취한 상태로 민간인을 향해 흉기나 능력을 휘두르는 범죄죠.”

    “어머, 서울뿐만 아니라 인천과 부산도요?”

    “네.”

    민아린이 걱정스러운 눈치로 물었다.

    “큰일이네요. 관리 본부에서 뭔가 조처해 주지는 않는 건가요?”

    “관리 본부는 현재 복구 작업으로 일이 많이 밀렸다고 합니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잠자코 듣고 있는 권정한에게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어 갔다.

    “저랑 천사연은 술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 술을 마신 사람이 필요한데, 저희만으로는 힘들어서요. 시간도 오래 걸릴 거고.”

    “그래서 사계 길드에 도움을 청하려고 하는 거군요. 부산에도 비슷한 범죄가 있었으니까.”

    “맞아.”

    내 대답에 지금껏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던 박건호가 이해하기 힘들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 좋은데… 한이결, 그걸 왜 네가 부탁하는 거지? 그 범죄와 무슨 관련이 있어서?”

    “그건…….”

    “도와주기에는 설명이 너무 부족한 것 같군.”

    그들의 관점에서 따져 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나는 어떻게 말해야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천사연이 같은 시간대를 반복하며 프라우스 신도단 놈들과 싸워 왔다는 사실은 공개하기 어려웠고, 이번에 실패하면 내가 사라진다는 얘기도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괜히 말했다가 혼란만 줄 테니까…….’

    그래서 천사연에게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알아봤자 지금은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럴 바에는 모르는 게 낫겠지.

    솔직하게 대답할 수는 없으니 그럴싸한 핑계를 대야 한다. 나는 긴장으로 메마른 입술을 한번 핥고 나서 입을 열었다.

    “제가 아무도 모르게 이곳을 떠난 건 중국에 있는 지인을 만나기 위해서도 있지만, 저를 납치했던 SS급 정신계 능력자에게서 잠시간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질 만한 내 말에 박건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권정한이 다치고, 어린 에드워드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결할 방법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방법을 찾았다는 건가?”

    찾기는 했지. 그러나 내 개입 능력도 만능은 아니었다.

    “네. 하지만 불안정하고 완벽하지 않아요. 그러니 안전을 고려한다면 그 능력자를… 죽여야 합니다.”

    죽여야 한다는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하태헌과 같이 지냈던 엘로힘의 작은 집에서 발견한 붉은 책. 그곳에 적힌 끔찍한 전투.

    -그런 너에게 선물을 하나 줄까 한다.

    크게 다친 박건호의 뒷머리를 틀어쥐고 목에 검을 들이대던 사마엘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하하… 하하하! 하하!

    머릿속에 울리는 광기 어린 웃음소리. 나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오히려 다행이지. 짧은 파편이었지만 그걸 본 덕분에 앞으로 얼마나 철저하게 싸워야 하는지 조금은 알게 됐으니까.’

    이제 물러설 곳은 없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뿐이었다. 이미 게이트 폭탄 테러와 아벨이라 불린 인형술사의 습격으로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다.

    “그 정신계 능력자가 또 접근해 올 거라고 확신하는 건가?”

    이 질문에 대한 답만큼은 자신 있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며 살짝 웃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가 얼마나 쓸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여기 계신 분들은 다 아실 텐데요.”

    예상했던 대로 그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당당한 내 모습에 박건호가 재밌다는 듯이 입꼬리를 시원하게 끌어 올렸다.

    “그리고 접근은 이미 했습니다. 신규 게이트인 D45 구역 앞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가 그중 하나죠.”

    천사연과 함께 D45 구역 게이트에 들어갔었던 민아린이 그때 기억을 떠올리듯 어두운 얼굴을 했다.

    “정신계 능력자의 패거리 중 한 명이 벌인 짓입니다. 아벨이라고 불리는 SS급 인형술사죠. 출장 갔던 박건호 팀장님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강남 사건 때 보셨을 겁니다. 여자 인형이요.”

    “나는 나중에 돌아와서 뉴스와 영상으로 소식을 전해 들었지.”

    입가를 매만지며 무언가 생각하던 박건호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한이결은 강남 사건뿐만 아니라 정신계 능력자에게도 납치를 당했었군. 이후에는 말도 없이 중국으로 홀랑 도망가고.”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합니까?”

    괜한 부분을 짚은 박건호 때문에 민아린이 토끼같이 순한 눈망울이 아닌 불만 어린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아무튼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상대는 이미 활동을 시작했어요. 길드 관리 본부 습격 영상을 보셨으면 알겠지만, 정신계 능력자나 인형술사 둘 다 프라우스 신도단 소속입니다.”

    “프라우스 신도단이라…….”

    “그들은 능력자와 일반인 사이가 나빠지도록 일부러 분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프라우스 신도단의 얘기가 나온 순간부터 굳은 얼굴을 하던 박건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능력자를 인사불성으로 만든 후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도록 만드는 이번 사건과 분명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얘기를 들어 보니 확실히 그럴 만하긴 하군.”

    “네. 아무튼… 여기까지는 이성적인 판단에서 내린 이유고요.”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목덜미를 쓸어 만지며 말을 이었다.

    “감정적으로는…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프라우스 신도단이 정말 술에 무슨 짓을 한 게 사실이라면 빨리 막아야 합니다. 나중에는 퍼지는 속도를 감당 못 할 테니까.”

    “…….”

    “지금껏 벌어진 사건들은 모두 능력자가 술 때문에 이성을 잃고 범죄를 저지른 겁니다. 나중 가면 우리 중의 한 명도 당할 수 있어요. 그러니 막아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좋아요.”

    끼어들지 않고 내 설명을 얌전히 듣던 권정한이 밝은 목소리로 냉큼 대답했다.

    뭐가 좋다는 거지? 떨떠름하게 쳐다보자 권정한이 어깨를 살짝 으쓱이고는 입을 열었다.

    “지훈이 형한테 연락하겠다고요. 사실 그 형도 저번부터 이결 형 소식을 물어보고는 해서요. 안부 나눌 겸 전화해 보죠, 뭐.”

    “그래 주면 고맙지.”

    “아니에요. 솔직히 말하자면 이유 설명 안 해 줘도 들어드리려고 했어요. 전에 저 크게 실수한 거 그냥 넘어가 주셨잖아요. 경호 일 자르지도 않고.”

    사마엘에게 납치당했을 때를 말하는 건가? 아니, 잠깐만.

    “그럼 왜 물어본 거야?”

    “말 안 해 줄 분위기면 넘어가려고 했는데 술술 대답하시길래 가만히 있었어요.”

    “…….”

    “큭.”

    옆에 서 있는 천사연에게서 작게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건호는 이미 얼굴을 숙인 채로 킥킥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도와준다는 거지?”

    “네. 최선을 다해서요. 하지만 확답은 힘들어요. 얘기를 들어 보니 지훈이 형 개인적인 힘이 아니라 길드가 움직여야 할 규모 같아서요.”

    “알아. 말 전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거로도 한시름 놓였다. 안도의 숨을 내쉰 나는 뒤를 돌아 천사연에게 시선을 보냈다.

    “천사연 마스터.”

    “뭐지?”

    “이제 이것 좀 풀어 주시죠.”

    쇠사슬이 치렁치렁하게 매달려 있는 족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로헌 부마스터를 만나러 가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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