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다 먹은 도시락을 치우고 거실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권정한이 사 온 케이크에 커피를 곁들였다. 인기 많은 수제 디저트 가게에서 사 온 거라는 권정한의 말대로 케이크는 맛이 제법 좋았다.
피이익?
호기심 어린 기색으로 내 케이크 조각 주변을 맴돌던 여우가 코끝을 들이밀었다.
“야, 잠깐만.”
아무리 고스트 몬스터라지만 그래도 동물 모습을 하고서 케이크 같은 걸 먹어도 되나? 알 수가 없어서 일단 급히 녀석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생각해 보니 신전에서 지낼 때는 케이크는 먹지를 않아서 여우에게 줘도 되는지 확인을 못 했다. 엘로힘한테 연락할 방법도 없는데. 괜히 줬다가 큰일 날 수 있으니까 아예 주지 말아야겠다.
피이익! 피이익!
여우가 얼굴이 눌린 와중에도 케이크를 향해 앞발을 쭉 뻗어서 휙휙 휘둘렀다. 그 열정적인 행동에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얘가 왜 이래? 케이크가 뭐라고 이러는 거야?
결국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여우를 품에 안았다.
“갑자기 케이크 욕심을 내고 그러냐? 가만히 좀 있어라.”
허벅지 위에 올리고 양 앞발을 붙잡아 살살 흔들자 여우가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항의하듯 울었다.
피익, 피익.
“안 된다니까….”
“저, 이결 씨.”
“예?”
그래도 안아 주니까 조금은 얌전해진 여우를 쓰다듬는데, 맞은편에서 커피를 마시던 민아린이 나를 불렀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나를 묘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뭡니까?”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있는 김우진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여우를 노려봤다. 얘는 또 왜 이래.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요….”
잔을 내려놓은 민아린이 뭔가 고민하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이결 씨. 얼마 전까지 중국에 가 계셨던 거 맞죠?”
중국이라기에는 애매했지만, 예언자에 대해 알려 줄 수 없으니 일단은 그렇다고 답했다.
“혼자… 지내셨던 거예요?”
“아닙니다. 애초에 만날 사람이 있어서 여길 떠난 겁니다. 큰 문제 없이 잘 만났고, 해야 할 일도 잘 처리하고 왔습니다.”
여우의 배를 살살 긁어 주자 녀석이 내 손을 장난처럼 약하게 깨물어 왔다. 딱히 아프지는 않아서 내버려 둔 채로 민아린에게 물었다.
“그보다 어제부터 묻고 싶었는데, 제가 중국으로 간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민아린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김우진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말했다.
“로헌 부마스터가 중국으로 휴가를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아무래도 이결 씨 성격상 혼자 무리하게 떠나진 않을 것 같아서 직접 만났을 때 물어봤어요.”
“아, 그러고 보니 새로 생긴 게이트에 천사연 마스터와 함께 다녀오셨죠? 뉴스에서 봤습니다.”
“맞아요. 솔직히 하태헌 부마스터 입장에서는 무시해도 됐을 텐데, 친절하게 알려 주셔서 고마웠어요.”
민아린이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해 주는 설명을 듣자 기분이 어딘가 묘해졌다.
생각해 보면 하태헌과 민아린은 ‘어비스’에서 꽤 좋은 감정을 가지는 사이로 발전하지 않나. 민아린은 하태헌 때문에 레퀴엠에서 로헌으로 이적했을 정도니까.
그랬던 둘이 아직도 저런 어색한 사이라니. 새삼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만에 ‘어비스’의 내용을 떠올리는데, 민아린이 두 눈을 반짝 빛내며 입을 열었다.
“이결 씨. 그럼 저 아이도 중국에서 만난 건가요?”
“네. 얘가 이런저런 능력이 많아서요. 그래서 허락 맡고 데려왔습니다.”
대답을 들은 권정한이 의외라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쓸모 있어서 데려온 것치고는 엄청나게 잘해 주시네요.”
“그랬나?”
“네. 방금도 귀여워 죽으려고 하시던데.”
“내가 보기에도 그러더군.”
권정한의 의견에 박건호가 곧장 맞장구를 쳤다.
‘케이크 먹지 말라고 혼낸 게 다인데.’
거참, 이해할 수가 없네. 그사이 내 손에서 후다닥 벗어난 여우는 민아린에게로 날아갔다. 녀석이 이 중에서 유일하게 따르는 상대였다. …혹시 수컷인가?
“와아, 예뻐라.”
피익.
제 곁으로 다가온 여우에게 손을 내민 민아린이 활짝 웃었다. 그 광경을 멀뚱히 바라보며 고민했다.
여우에 대해서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네. 무작정 데려오기 전에 이것저것 좀 알아 둘 걸 그랬다.
뒤늦게 후회하며 벌써 케이크 한 접시를 다 비운 박건호를 향해 물었다.
“혹시 프라우스 신도단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 없습니까?”
“프라우스 신도단?”
“네. 프라우스 신도단에 소속된 자가 일으킨 범죄요. 언론에 뜬 것 외에 뭔가 더 있습니까?”
물론 내가 마주쳤던 주정뱅이 능력자도 프라우스 신도단일 가능성이 있었지만, 증거가 나온 것은 아니었으니 섣불리 확정 지을 수는 없었다.
“글쎄. 내 기억으로는 없군. 웬만한 것은 뉴스나 기사에 다 나온 것 같고.”
“음…….”
“확실히 알고 싶으면 마스터께 여쭤보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이따 가 보려고 했습니다.”
대답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10시가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점심시간 지날 때쯤이면 천사연도 여유롭겠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며 입가를 매만졌다.
“2시 정도면 적당할 것 같네요. 우서혁 씨가 말도 전해 준다고 했으니까.”
천사연이 있어야만 풀리는 문제들이 여러모로 많았다. 레퀴엠부터 들른 건 나쁘지 않은 판단인가.
이렇게 된 이상 천사연을 만나서 프라우스 신도단에 대한 정보를 얻은 다음에 족쇄 풀고 하태헌을 만나러 가야겠다. 일이 술술 풀리는 느낌에 기분 좋게 웃으며 케이크를 한 입 더 먹었다.
***
“꿈도 야무지군.”
“…….”
“2시는 무슨….”
비웃음과 함께 나온 말에 나는 앞에 앉아 있는 상대를 싸늘하게 노려봤다.
“뭡니까?”
“뭐가 말이지?”
“뭔데 여길 오신 겁니까?”
1시가 되자마자 천사연은 뒤에 우서혁을 달고 아주 자연스럽게 내 방을 찾아왔다.
알려 준 적도 없는 도어 록 비밀번호를 자연스럽게 누르고 들어서는 모습에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짜증을 꾹꾹 누르며 묻자 천사연이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며 입꼬리 끝을 살짝 올렸다.
“나를 애타게 찾았다고 전해 들었는데. 아닌가?”
“뭔 개소리를…….”
경악하며 뒤에 서 있는 우서혁에게 시선을 돌리니 그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역시 거짓말이잖아.
“장난 그만하고. 진짜 왜 온 겁니까?”
“장난 아닌데. 찾은 건 맞지 않나?”
대체 무슨 속셈이지? 의심스러운 내 시선에도 빙긋 미소 지은 천사연은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그나저나 시장 바닥이 따로 없군. 다들 한이결 방에 모여서 뭐 하는 거지? 이러라고 준 방이 아닐 텐데.”
그 까칠한 지적에 권정한이 잽싸게 대답했다.
“저는 열심히 일하는 중입니다.”
김우진의 옆에 서서 여우를 안고 있던 민아린도 이어 말했다.
“저랑 우진 씨는 오늘 연차예요.”
모두의 이목이 이번에는 박건호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일이 없는데 어떡합니까? 제가 한이결 능력자랑 친해지는 게 불만이면 일을 주십쇼, 마스터.”
“그러지. 한이결과는 미리 인사하도록. 내일부터는 털끝 하나 못 보게 될 테니.”
“두 분 다 그만하시죠….”
길드원들 다 있는 데서 뭐 하는 거야, 지금. 창피하지도 않나.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멀쩡한 대화를 이어 나갈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냥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음대로.”
“따라오세요.”
내 제안에 천사연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나는 천사연을 데리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김우진과 민아린을 지나쳐서…….
침실로 들어섰다.
“…….”
“…….”
천사연의 시선이 나와 새하얀 침대 사이를 오갔다. 뭐. 왜. 응접실이 없는 걸 어떡하라고. 바닥에 질질 끌려온 쇠사슬을 리모컨으로 불투명하게 만든 후에 침실 문까지 닫자 방 안은 차가운 침묵으로 가득 차올랐다.
“…앉으시죠.”
어색한 공기를 버티지 못하고 결국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디에?”
“그냥, 침대에 걸터앉으세요.”
손짓에 따라 천사연이 순순히 침대 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것을 보고 나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옆에 앉았다.
침대에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나눠야 하는 이상한 상황에 천사연이 웃음을 띤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평소에도 담소를 나눌 때 이렇게 하나?”
“이렇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내가 특별하다는 거군.”
“하…….”
얘기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피곤이 몰려왔다. 이마를 짚은 채로 울컥거리는 속을 겨우 진정시킨 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프라우스 신도단에 대해서 정보를 좀 얻고 싶은데.”
이제 듣는 사람도 없으니 존댓말을 쓸 이유가 없었다. 평소대로 편하게 묻자 천사연이 팔짱을 끼고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정보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언론에 공개 안 된 정보 말이야. 뉴스나 기사 뜬 건 다 봤어.”
혹시 몰라서 신전에서 지내는 동안에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 봤다. 대부분 자질구레한 것들이었지만.
“글쎄. 딱히 말해 줄 만한 건 없는데. 그나마 신경 쓰이는 건 술에 취한 채로 난동을 피우는 능력자 사건 정도군.”
“그 부분은 민아린 씨에게 대충 들었어. 내가 어제 잡은 능력자와 비슷한 놈들이 몇 명 나타났다며.”
“16일 전을 기점으로 언론에 잡히지 않은 기록까지 합치면 서울은 총 9건, 인천은 5건, 부산은 7건째다.”
“뭐? 인천이랑 부산까지?”
예상치 못한 정보에 급히 되물었다. 그러자 천사연이 손목시계를 툭툭 두드려서 태블릿PC를 꺼내 들었다. 저 자식은 무슨 저걸 인벤토리에 넣어 놨냐.
“범죄 방식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똑같아. B급 아래 능력자가 술에 취해서 일반인을 상대로 능력이나 흉기를 휘두르다 붙잡히더군.”
“…이 일은 너도 잘 모르는 거야?”
여러 의미가 담긴 질문에 천사연이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래.”
그가 넘긴 태블릿PC 화면에는 사건을 정리한 그래프와 설명이 띄워져 있었다.
“다행히 아직 사망자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위험한 것은 사실이지.”
“이게 가능해? 21명이나 되는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동일하게 행동한다는 게?”
“네 말대로 거슬리는 부분이 많아. 그래서 프라우스 신도단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21명이 동일하게 술에 취해서 능력이나 흉기를 휘두른 거라면…….”
천사연과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떠올린 생각을 천사연이 하지 못했을 리 없다. 나는 확신을 하고 입을 열었다.
“술에 무슨 짓을 했다는 건가?”
“그렇겠지. 술이라면 뭘 넣든 쉽게 감춰질 테니.”
“내가 어제 만난 능력자도 술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서 다른 건 확인하기가 어려웠어. 무엇보다 단순한 주정뱅이라고 여겼고.”
“남들도 다 그렇게 여기겠지.”
“잠깐…….”
그 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술을 모르고 마셨거나 강제로 마신 거라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마주 본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가 무거운 빛을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