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50. 사건 파악
피이익. 픽.
볼을 툭툭 건드려 오는 감촉에 천천히 눈을 떴다. 전날 밤, 머리맡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잤던 여우가 먼저 일어나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랑한 발바닥으로 볼을 꾹꾹 누르던 녀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피익.
“으음…….”
잠에 취한 상태로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나는 허리에 둘린 팔을 발견했다. 팔 주인은 당연히 김우진이었다. 나를 죽부인 삼아 껴안은 채로 자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분명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일자로 뻣뻣하게 누워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러고 있던 거지?
‘전에 소파에서 잤을 때랑 똑같네. 이게 잠버릇인가.’
지은 죄가 있으니 그때처럼 발로 차지는 못하겠군. 색색 숨소리를 내며 깊게 잠들어 있는 김우진의 팔을 풀고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왔다.
“잘 잤어?”
피익!
나를 따라 살랑거리며 날아온 여우에게 아침 인사를 보내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7시 33분. 꽤 일렀지만, 다시 눕기보다는 씻고 아침밥을 챙겨 먹는 게 나을 듯하다.
‘…뭐, 간단하게 차리는 거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김우진처럼 대단한 걸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샐러드나 계란프라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겠지.
머릿속으로 아침 식사를 만드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욕실로 가던 나는 발목에 질질 끌려오는 쇠사슬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은근히 불편하네.
아무래도 족쇄를 끊어 낼 방법을 하루빨리 찾아봐야겠다. 천사연이 풀어 주기를 기다리다가는 프라우스 신도단을 막기는커녕 검은 가면 끝자락도 보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절그럭. 절걱.
‘내 팔자야…….’
나를 쫓아오며 벽과 가구 여기저기에 죄 부딪히는 쇠사슬을 손에 들고 미간을 찌푸리는데, 현관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아침부터 뭐야.
“Good morning.”
“좋은 아침이에요, 이결 씨!”
“…….”
별생각 없이 문을 연 나는 복도에 옹기종기 서 있는 세 명과 마주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보고 어딘가 안도한 기색으로 웃는 민아린은 반가웠지만, 그 뒤에 있는 박건호와 우서혁은 어제 일이 떠올라 불편했다. 나는 일단 나머지는 무시하고 민아린에게 대답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민아린 씨.”
“여우 친구도 안녕. 저 들어가도 돼요?”
피이익. 픽.
“물론이죠. 들어오세요.”
와아, 민아린이 기뻐하며 구두를 벗었다. 유독 민아린에게는 순한 여우가 인사에 답하듯 공중에서 둥글게 날며 울었다.
“잠깐.”
민아린의 뒤를 따라 은근슬쩍 들어오려는 박건호 앞을 막아섰다.
“두 분은 갈 길 가시죠?”
“이런, 너무한데.”
“너무하고 뭐고 말로 할 때 나가세요.”
“이렇게 뇌물도 사 왔는데 진짜 안 들여보내 줄 건가?”
박건호가 부스럭거리며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들어 올렸다. 예전에도 한번 봤던 수제 도시락집 포장 봉투였다.
“직접 가서 포장해 온 도시락이라 아직 따듯한데. 맛있는 도시락으로 같이 아침 식사나 하지.”
“어제 저를 그렇게 깔아뭉개 놓고 같이 식사하자는 소리가 나옵니까?”
“깔아뭉개다니? 그냥 살짝 터치한 거지. 그리고 상사가 명령하는데 불복종할 수는 없지 않나?”
“그건 그쪽 사정이고요.”
시종일관 싱글벙글 신난 박건호를 밀치며 뒤에 서 있는 우서혁에게 물었다.
“우서혁 씨는 무슨 일입니까?”
백수나 다름없는 박건호와 달리 찾아온 이유가 분명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본 건데, 의외로 우서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왔습니다.”
“예?”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뜻밖의 대답에 내가 당황하는 사이 박건호가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저 자식이. 이따 두고 보자.
“잘 잤죠. 정말 이게 끝입니까?”
“네. 별일 없으신 거 확인했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거짓말은 아닌지 우서혁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진짜로 내가 잘 잤는지 그거 하나 궁금해서 이 아침부터 여길 온 건가? 놀란 것도 잠시, 우서혁에게 부탁할 것이 떠오른 나는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 우서혁 씨.”
“말씀하십시오.”
“혹시 오늘 천사연 출근합니까? 이따가 잠깐 좀 만나고 싶은데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챈 우서혁이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입을 열었다.
“마스터께서는 어제 댁으로 돌아가시지 않고 길드에서 주무셨습니다.”
“네?”
“외부 일정은 없으니 편하실 때 대표실로 오시면 됩니다. 한이결 씨 방문은 제가 올라가는 대로 전달해 두겠습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온 대답에 어색하게 목덜미를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시면 좋죠.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그럼.”
가볍게 묵례를 해 보인 우서혁이 이번에야말로 방을 떠나갔다. 멀어지는 우서혁의 곧게 펴진 등을 바라보다가 현관문을 닫았다.
‘천사연이 길드에서 잤다고?’
그렇게 일이 바쁜가? 설마 프라우스 신도단 관련해서 무슨 문제라도 크게 터진 건 아니겠지?
역시 이따가 시간 내서 대표실 좀 올라가 봐야겠다. 천사연도 이제 와서 내게 뭔가를 숨기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프라우스 신도단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 앞으로의 계획도 좀 더 명확하게 세울 수 있겠지.
입가를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한 내가 거실로 돌아오자 식탁에서 박건호와 함께 도시락을 꺼내던 민아린이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먹어요, 이결 씨! 엄청 맛있을 것 같아요.”
“저 일단 씻고 나올게요. 먹고 계세요.”
“그럼 기다릴게요. 어차피 정한 씨도 곧 도착한다고 연락이 왔거든요. 혹시 우진 씨는 아직 위층 방에 계세요?”
“아, 김우진은…….”
그러고 보니 만난 걸 아직 얘기 안 했구나.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답했다.
“지금 제 침대에서 자고 있어요. 어젯밤에 화해해서요.”
“어머, 이결 씨 침대요…?”
“오…?”
내 설명을 들은 민아린과 박건호의 표정이 묘해졌다. 무슨 반응이지, 저건?
“예. 어쩌다 보니.”
“으음, 그럼 우진 씨는 아직 자고 있다는 건가요?”
“그렇죠. 제가 씻고 나서 깨울 테니까 일단은 더 자게 둡시다.”
항상 나보다 먼저 깨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김우진이 못 일어나는 걸 보면 그만큼 피곤이 쌓인 게 분명했다.
민아린이 납득하는 것을 보고 이번에야말로 욕실로 가려는데, 별안간 침실 안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
나만 들은 건 아닌지 식탁에 같이 서 있던 민아린과 박건호의 시선도 동시에 침실로 향했다. 곧이어 덜컹, 쿵! 바닥에 무언가 부딪히더니 닫아 놨던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우진 씨. 일어나셨어요?”
김우진이 창백하게 질린 채로 숨을 헐떡이며 침실 밖으로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딱 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급히 다가갔다.
“김우진. 왜 그래?”
“아…….”
사색이 된 얼굴로 민아린과 박건호를 바라보던 김우진은 이내 나를 발견하고 딱딱하게 굳은 미간을 풀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뭐 나쁜 꿈이라도 꿨냐?”
“아니…….”
“아니라기에는 식은땀을 너무 흘리잖아.”
나와 시선을 맞춘 김우진이 깊은숨을 내쉬며 그나마 조금 나아진 혈색으로 말했다.
“진짜 아니야. 그냥, 착각을 좀…….”
“몸 안 좋으면 더 자. 아직 9시도 안 됐어.”
“맞아요, 우진 씨. 혹시 체하셨어요? 약 가져올까요?”
“괜찮습니다.”
메말라 가는 식물처럼 버석버석해진 김우진의 모습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설마 눈떴는데 내가 옆에 없어서… 이러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 말고는 떠오른 게 없어서 입 안이 썼다. 이러다 나중에 혼자 외출도 못 하겠네. 목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억지로 삼켜 내며 김우진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더 안 잘 거면 너도 같이 아침 먹자. 나 씻고 나올 테니까.”
“으응.”
욕실 한번 들어가려다가 방해를 몇 번이나 받는 건지 모르겠다. 리모컨으로 쇠사슬을 불투명하게 만든 나는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
막 도착한 권정한이 사 온 케이크 박스를 거실 테이블에 내려 두며 씻고 나온 내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이결 형.”
“그래.”
진짜 왔네. 근데 왜 자꾸 이 방으로 모이는 거지? 방 주인인 나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다들 너무 자연스럽게 오잖아. 어째 중국에 가 있는 동안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씻는 동안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씻고 온 김우진까지 껴서 다 함께 박건호가 사 온 도시락으로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박건호는 문제가 많았지만 맛있는 음식은 죄가 없었으니 하나도 남김없이 말끔히 먹어 치웠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밥은 내가 준비하려고 했는데.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네.
“맛있나, 한이결?”
마지막 남은 계란말이를 입에 넣자 맞은편에 앉은 박건호가 턱을 괸 채로 빙긋 웃으며 물었다. 재수 없는 놈…. 나는 심드렁히 대꾸했다.
“예, 뭐.”
“이거로 나랑도 화해하는 거지?”
“싫습니다.”
“역시 한 번으로는 안 되는군. 앞으로 10번 더 사다 주지.”
“필요 없어요.”
다른 사람들도 얼추 다 먹은 것을 확인한 나는 찬물로 입가심을 한 후에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께 물어볼 게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여우에게 안 먹고 남은 생당근을 물려 주며 말했다.
“밖에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설명을 좀 듣고 싶습니다.”
“아, 그건…….”
잠깐 주변 눈치를 살피던 민아린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사실 근래 며칠간 서울에서 비슷한 범죄가 계속 발생해서요.”
“범죄요?”
“네. 이결 씨가 찍힌 영상이랑 비슷해요. 술에 취한 능력자가 일반인에게 흉기를 휘두르거나 능력을 사용하는 범죄예요.”
그 말에 전날 마주쳤던 주정뱅이를 떠올렸다. 무슨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취한 채로 학생에게 식칼을 휘둘렀었지. 지금 와서 떠올려 보면 행색이 제법 깔끔한 데다 정장 재킷을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여러모로 대낮부터 술에 취해서 학생에게 달려들 만한 차림새는 아니었다.
‘뭐, 물론 범죄와 옷은 큰 관련은 없기는 하지만…….’
내가 주는 생당근을 짭짭거리며 잘 받아먹는 여우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제가 겪은 게 처음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거군요.”
“맞아요. 이번처럼 영상이 찍히거나 언론에 뜬 것만 해도 벌써 6건이 넘었어요. 그중에 길드에 소속된 능력자도 몇 명 있었고요.”
“설마 레퀴엠 소속도 있습니까?”
“아뇨. 다행히 우리 길드는 없지만… 제이나에서는 한 명 걸렸어요. 나머지는 스톰 길드와 넥스트 길드 소속자예요.”
스톰과 넥스트라면 제이나보다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나름 이름이 알려진 길드였다.
‘……느낌이 좋지 않은데.’
술에 취해서 난동을 피우는 능력자들이라. 가뜩이나 프라우스 신도단 때문에 문제가 많은 이 시점에서 저런 사건이 반복되다니. 단순히 타이밍이 겹쳤다기에는 찝찝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아무래도 이따가 천사연을 만나면 이 부분도 제대로 짚어 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