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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96)화 (196/394)

196화 

내 인사에 김우진의 고동색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그걸 보며 조용히 물었다.

“들어가도 돼?”

그제야 정신을 차린 김우진이 멍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창문 아래로 내려온 나는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피이익.

나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온 여우도 테이블 위로 내려앉으며 몸을 탈탈 털었다. 비가 하도 많이 와서 아주 잠깐 나가 있었는데도 온몸이 흠뻑 젖어 버렸다. 물을 뚝뚝 흘리는 내 모습에 김우진이 허둥거렸다.

“다, 닦을 거라도… 아니, 아예 씻을래?”

“아냐, 수건 하나만 줘. 이게 욕실까지 갈 정도로 길지는 않아서. 이따 내 방으로 돌아가면 씻을게.”

머쓱하게 웃으면서 발목을 들어 채워진 족쇄와 쇠사슬을 보여 줬다.

“아래층 소파에 연결되어 있어. 셔터 아이템이라 능력도 못 쓰고….”

“뭐?”

설명을 듣던 김우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지금 여기를 어떻게 올라온 거야? 밖에 비도 오는데?”

“저 아이가 날 수 있거든. 도움을 좀 받았지.”

테이블에 누워서 길게 하품하는 여우를 가리키며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로 가볍게 대답했지만, 김우진의 표정이 오히려 더 어두워졌다.

‘아직 사과는 꺼내지도 못했는데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눈치를 보자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작게 내쉰 김우진이 손을 뻗었다.

“일단 몸부터 닦자. 감기 걸리겠어.”

“…….”

“기다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을 닦아 준 그가 몸을 돌렸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자 김우진이 욕실에 기본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새하얀 수건을 두어 개 들고 와 건네줬다.

“고맙다.”

입고 있던 새하얀 상의는 이미 젖을 대로 젖어서 살이 다 비쳤다.

아무리 그래도 벗는 것보다는 입은 상태로 닦는 게 낫겠지… 평소라면 상관없지만 사과하러 와서 옷 벗는 것도 좀 이상하니까.

수건으로 몸을 닦는데, 김우진이 앞에 서서 남은 수건을 내 머리 위로 툭 씌웠다.

“대충 해도 돼. 어차피 다시 창문으로 내려가야 하니까.”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 준 김우진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다시는 이러지 마. 위험하잖아.”

얼굴을 들고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김우진과 시선을 맞췄다.

“이번 한 번만 봐줘. 빨리 만나고 싶어서.”

“어… 뭐?”

“만나고 싶었다고.”

손을 뻗어서 김우진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비를 맞아서 몸이 식은 나와 달리 닿아 오는 김우진의 피부는 꽤 뜨끈했다. 어깨를 움찔 떤 녀석이 귀 끝을 발갛게 물들였다.

“김우진.”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 쏟아지는 빗소리, 차갑게 식은 손끝을 녹여 주는 김우진의 체온. 그 모든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아무 말 없이 떠나서 미안하다.”

나지막이 꺼낸 사과에 김우진이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나한테 실망한 것도 이해해. 오늘은 욕심부려서 억지로 보러 왔지만… 앞으로는 너 화 풀릴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게.”

“…….”

“그러니까 나중에 화 풀리면 이전처럼 같이 밥도 먹고 놀고 그러자.”

김우진이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숙였다. 기대했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속이 쓰렸다.

역시 쉽게 용서받을 수는 없겠지. 억지로 받아 달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싸늘한 침묵에 쓰게 웃으며 잡고 있던 김우진의 손목을 놔주었다.

“이 얘기 하려고 온 거야. 이제 더 방해 안 할 테니까…….”

어색하게 이어 가던 말은 손목을 급히 잡아채 오는 김우진의 행동에 그대로 끊겼다. 방금과는 반대되는 상황에 눈을 깜빡이는데, 숙였던 고개를 든 김우진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렇게…….”

서글프게 일그러진 얼굴로 더듬거리던 김우진이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그렇게 말하지 마… 내, 내가… 윽….”

“김우진?”

“내가 잘못했어…….”

길게 내려온 속눈썹이 나비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렸다. 결국 울음을 터뜨린 김우진의 얼굴이 금세 축축해졌다.

“왜, 왜 네가 사과를 해…? 나는…….”

“…….”

“네가 나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싫어할까 봐 너무… 으윽, 무서웠…….”

얼마나 서러웠던 건지, 흐느끼는 와중에도 힘겹게 말을 하는 모습에 놀라며 급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왜 싫어해. 그럴 리가 있냐.”

발목 문제로 김우진이 불편한 마음일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심했다.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바짓단을 들어서 멀쩡해진 발목을 보여 줬다.

“봐, 김우진. 완전 멀쩡하지? 별로 아프지도 않았어.”

“…….”

“그러니까 그만 울어. 너 아까도 울었잖아… 그러다 탈수 오겠다.”

장난치듯 한 말에 고요하게 눈물만 흘리던 김우진이 천천히 몸을 숙이고 무릎을 꿇어앉았다. 침대에 앉아 있는 나보다 시야가 낮아진 김우진의 행동에 당황하는데, 그가 이번에는 뜨끈한 손으로 발목을 조심스럽게 쓸어 만졌다.

“다시는… 다시는 너 아프게 안 할게.”

“…….”

“미안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하는 말에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김우진이 내뱉은 사과와 내 사과는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뭐지?’

김우진이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도 받아들일 각오로 찾아왔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이 기뻐야 할 텐데…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바늘이 돌아다니듯 쿡쿡 쑤셔 왔다.

무슨 기분이지, 이게. 어딘가 불안하면서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으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내 기분 이상한 걸 따져 물을 수는 없고…. 한숨을 삼켜 내며 일단 필요한 대답을 꺼냈다.

“…그만해, 김우진. 그렇게까지 사과할 필요는 없어.”

발목을 바라보던 김우진이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봤다. 새하얀 얼굴에서 눈가만 발갛게 물들인 채로 눈물을 뚝뚝 떨구는 김우진의 모습에 몸을 움찔 떨었다.

예쁘기는 엄청 예쁘네. 김우진도 외모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 친구끼리는 싸우고 화해하고 그러는 거야. 서로 잘못했으니까 이제 사과는 그만하자.”

“용서…해 주는 거야?”

“용서고 뭐고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니까.”

달래듯 말하자 김우진이 입술을 삐죽이며 새침하게 중얼거렸다.

“거짓말…….”

“뭐?”

“아니야. 이건… 마스터가 채운 거지? 언제까지 하고 있어야 해?”

“글쎄. 모르겠다. 쉽게 풀어 줄 것 같지는 않아서.”

“그래?”

“…….”

족쇄를 만지작거리던 김우진이 옅은 미소를 스치듯 지었다. 어째 이 자식도 족쇄가 마음에 드는 눈치인데….

“김우진.”

“어?”

“우리 얘기 잘 끝난 거 맞냐? 내일 내 방으로 올 거야?”

서로 못다 한 이야기가 아직 많았지만, 슬슬 몸이 한계였다. 이다음은 내일 마저 했으면 좋겠는데.

드디어 눈물을 그친 김우진이 이제는 눈가만이 아니라 볼과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이고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갈래….”

“지금?”

“너 다시 창문으로 내려가야 한다며. 위험하잖아… 내가 도와줄게.”

“그러든가.”

그것도 나쁘지 않지. 젖어서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티셔츠를 펄럭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바로 가자. 젖은 채로 있으니까 점점 더 추워진다. 씻고 옷 갈아입어야겠어.”

“으, 응.”

김우진이 녹슨 기계처럼 뻣뻣한 몸짓으로 내게서 등을 슬쩍 돌렸다. 붉어진 귀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럼… 침실에 가 있을게. 제발 조심해서 내려와.”

“걱정하지 마.”

먼저 방을 떠나는 김우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 누워 있는 여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김우진이 대화하는 동안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얌전히 기다리던 여우는 김우진이 떠나자마자 감고 있던 눈을 뜨고는 벌떡 일어섰다.

“이리 와. 돌아가자.”

피이익. 픽.

내 손짓에 곧장 날아온 여우가 반쯤 열려 있는 창문으로 나가서 주변을 맴돌았다. 창문 밖에는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으…….”

체온이 떨어진 상태로 다시 비를 맞으려니 몸이 절로 덜덜 떨렸다. 그래도 올라갈 때보다야 내려갈 때가 더 쉬워서 다행이었다.

등을 안정적으로 받쳐 주는 여우의 도움을 받아 아래 창문으로 훌쩍 내려오자 미리 도착해 있던 김우진이 급히 팔을 벌려 내 허리를 붙잡아 줬다.

“괜찮아?”

“엄청 추워…….”

본인 옷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나를 품에 안은 김우진이 급히 창문부터 닫았다.

“욕조에 뜨거운 물 틀어 놨어. 감기 걸리지 않게 바로 씻어.”

오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나는 추위도 잊고 활짝 웃었다. 오래간만에 받아 보는 김우진 표 케어가 제법 반가웠다.

“넌 안 씻어도 되냐?”

“난 아까 씻었어….”

그렇군. 욕실로 걸어가며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의를 벗었다. 그러자 뒤를 졸졸 쫓아오던 김우진이 화들짝 놀라며 급히 멈춰 섰다.

“나 좀 오래 씻을 것 같은데, 기다릴 거야?”

오늘 하루 중에서 가장 붉은 얼굴로 김우진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기, 기다릴게.”

나쁘지 않지.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에 둥둥 뜬 채로 날 따라오는 여우를 잡아챘다.

“너도 들어와.”

피익?

“비 맞았으니까 씻어야지.”

피익! 피이익! 픽!

여우가 그 말을 듣고 기겁하며 마구 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안 된다. 빗물이 얼마나 더러운데.

싫다고 칭얼거리는 여우와 함께 목욕을 마치고 욕실을 나오자 주방에 들어가 있던 김우진이 머그잔을 들고 다가왔다.

“마셔. 따듯한 물이야.”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라 고맙게 받아 마시며 김우진에게 물었다.

“김우진, 안 피곤하냐?”

어느새 자정이 훌쩍 넘은 늦은 시각이었다. 내 질문에 김우진이 우물쭈물하더니 다 마신 머그잔을 도로 가져가며 대답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

“흠.”

“왜? 피곤해?”

“피곤하긴 하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제일 간편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냥 자고 가.”

“뭐?”

“자고 가라고. 너 여기 있는 거 천사연도 모를 텐데.”

예전에는 천사연의 수행원들이 12시 전에 데리러 와서 강제로 내쫓겼지만, 오늘은 다르지 않나.

“소, 소파에서?”

“더블 침대인데 굳이 소파에서 자게? 그냥 침대에서 자. 예전에도 같이 잤잖아.”

“그래도 돼?”

“너만 괜찮으면 상관없어. 할 얘기도 많은데 자고 일어나서 같이 아침 먹으면 되겠다.”

나야 어차피 하태헌이랑 몇 번이고 같이 잤던 터라 새삼 불편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내려오는 거 도와주고 씻는 것까지 기다려 줬는데 바로 돌려보내는 건 너무 매몰찬 것 같다.

근데 왜 대답이 없지. 멀뚱히 쳐다보자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던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고 갈래.”

“그래라.”

강제로 씻겨서 있는 대로 삐친 여우를 품에 안고 김우진과 함께 침대로 향했다.

종일 겪은 일이 많아서 그런지 무척이나 피곤했다. 오늘 밤은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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