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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95)화 (195/394)
  • 195화

      

    “그럼 난 이만 돌아가 보지. 우서혁, 따라오도록.”

    “예.”

    족쇄와 쇠사슬의 성능을 확인한 천사연은 우서혁을 데리고 미련 없이 방을 떠나갔다. 그에 비해 박건호와 권정한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은 안 갑니까?”

    “이런. 나는 일이 없어진 지 오래라.”

    “전 아직 형 경호원인데요?”

    “뭐?”

    “마스터께서 자르지 않으셔서요.”

    이건 좀 놀라웠다. 여러모로 쓸 만한 능력이라 천사연이 진작 다른 곳에 보냈을 줄 알았는데.

    “형이 저를 버리고 간 동안 할 일이 어찌나 없던지….”

    “버린 건 아닌데….”

    “앞으로는 찰싹 달라붙어 있으려고요.”

    “하, 하하…….”

    눈을 사르륵 접으며 화사하게 말하는 권정한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슬쩍 뒤로 물러서서 민아린에게 다가갔다.

    “저, 민아린 씨.”

    “네?”

    “혹시 괜찮으시면 방에 혼자 있는 김우진의 상태 좀 보고 와 주실 수 있습니까?”

    내 물음에 민아린이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저도 좀 걱정스러운 참이었어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발목 멀쩡하다는 얘기도 꼭 좀 해 주세요.”

    나와 민아린의 대화를 듣고 있던 권정한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김우진 선배님은 바로 위층 방에 계세요. 제대로 걷지 못하셔서 원래 지내던 방까지 갈 수가 없었어요.”

    “…….”

    제대로 걷지 못했다는 말이 가시가 되어 가슴 한구석을 아프게 찔러 왔다. 주저앉아서 멍하니 울던 김우진의 모습이 떠오르자 불안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래도 민아린이 잘 얘기해 줄 테니까 믿어 보자. 내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때는 꼭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봐야겠다. 사과도 하고.

    민아린이 자리를 비우고 박건호과 권정한은 주방에 들어간 틈에 재빨리 침실로 향했다. 질질 끌려오는 쇠사슬 때문에 방문을 잠글 수가 없어서 최대한 닫은 다음 소리 낮춰 입을 열었다.

    “여우야.”

    피익!

    내 부름에 테이블 위에 앉아 있던 여우가 투명화를 풀었다. 내 짐작대로 검과 함께 잘 숨어 있는 것을 보니 안도의 숨이 절로 나왔다.

    “잘했어. 이 틈에 검은 다른 곳에 옮겨 두자.”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던 나는 결국 이전에 하태헌의 핸드폰을 숨겼었던 침대 매트리스를 다시 들어 올렸다. 셔터 아이템 때문에 능력을 쓰지 못해서 낑낑거리며 직접 해야 했다.

    최대한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신중하게 매트리스를 반절 들어 올린 후, 그 아래에 검을 내려놨다. 설마 여기를 뒤져 보지는 않겠지. 매트리스를 드느라 구겨진 시트도 깔끔하게 정리한 나는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나중에 하태헌 만나러 갈 때까지만 저기에 두자.’

    피이익.

    투명화를 할 필요가 없어진 여우가 살랑살랑 날아와 어깨 위로 착지했다. 검을 깔끔하게 숨기고 나서야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침실을 나간 내게 권정한이 물어 왔다.

    “이결 형. 배 안 고프세요?”

    그러고 보니 오늘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뒤늦게 밀려오는 허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식탁으로 나를 이끌었다.

    “먹어요.”

    식탁 가득 차려진 샌드위치를 본 나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혹시 방금 사 온 거야?”

    “그럴 리가요. 냉장고에 있던데요.”

    냉장고에 있었다고? 그렇기엔 샌드위치는 새로 사 온 것처럼 신선해 보였다. 접시 위에 놓인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든 박건호가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군.”

    “왜 멋대로 먹습니까?”

    “아야.”

    내 방 냉장고에 들어 있던 음식을 나보다 먼저 입에 넣는 박건호가 얄미워서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 찔렀다.

    “제가 보기에는 김우진 선배님 솜씨인 것 같아요.”

    “김우진이?”

    “마트 봉지를 들고 23층으로 가는 거 여러 번 봤거든요. 이결 형 없을 때도요.”

    “…….”

    그제야 나는 이전에 김우진이 몇 번이고 내게 만들어 줬던 그 샌드위치와 똑같다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언제 돌아올지 몰랐을 텐데. 설마 청소도 김우진이 한 건 아니겠지?

    순식간에 마음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갑자기 김우진과 화해할 자신감이 싹 사라졌다. 나한테 크게 실망하고 화가 난 것 같은데, 과연 사과 몇 마디 한다고 용서해 줄지 모르겠다.

    “이결 씨.”

    “아, 민아린 씨.”

    입맛이 뚝 떨어져서 샌드위치를 바라만 보는데, 때마침 위층으로 올라갔던 민아린이 돌아왔다. 나는 반색하며 급히 물었다.

    “어땠습니까? 괜찮나요?”

    “그게….”

    눈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린 민아린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못 만났어요.”

    “네?”

    “문을 열어 주지 않아서요.”

    “…….”

    열어 주지 않았다고….

    긴장이 탁 풀리며 어마어마한 실망감이 몰려왔다. 만나는 걸 거부할 정도로 화가 난 건가….

    “음, 내일은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오늘은 우진 씨가 많이 놀랐나 봐요.”

    “…네. 이해합니다. 고마워요, 민아린 씨.”

    우울한 기분을 겨우 억누르며 나를 위로해 주는 민아린을 향해 힘겹게 미소 지었다.

    ***

    늦은 밤, 드디어 혼자가 된 나는 씻고 나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방 여기저기를 다시 한번 살펴봤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우서혁의 말대로 떠나기 전과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옷과 생필품은 물론이고 침대 같은 가구도 다른 누군가가 썼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야 비로소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침실 창문 너머로 먹구름이 낀 흐릿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그간 정신없어서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진동이 엄청나던데… 대체 누가 이렇게 연락을 한 거지?

    몇백 통씩 쌓여 있는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시지, 메신저 기록을 확인한 나는 놀라서 입을 살짝 벌렸다. 이게 다 뭐야.

    「홍시아: 한이결 능력자. 혹시 바빠?」

    「홍시아: 연락이 너무 안 되네!」

    「홍시아: 나중에 이거 보면 연락 한 번만 해 줘. 수연이가 걱정 많이 해.」

    홍시아가 보내온 메신저를 읽고 잊고 있었던 차수연을 떠올렸다. 이런, 깜빡하고 있던 거 들키기라도 하면 엄청나게 맞겠네….

    「차수연: 너 진짜 먼저 연락 안 하는구나?」

    「차수연: 아직도 외출 안 돼?」

    「차수연: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아? 연락 좀 줘.」

    「차수연: 살아 있어?」

    「차수연: 야…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차수연: 하태헌 씨 만났어. 중국 갔다며? 돌아오면 나중이라도 괜찮으니까 전화 좀 해.」

    ‘하태헌을 만났다고? 뭔가 불안한데….’

    일단 지금은 밤 10시가 넘은 터라 전화는 내일 아침에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나는 계속해서 메신저를 아래로 내렸다. 김수환이 보내온 잡담과 광고 몇 개를 지나치니 낯익은 이름들이 주르륵 떴다.

    「박건호: 혼자 중국 가니까 좋은가?」

    「박건호: 나는 심심해 죽을 것 같은데.」

    중국이라는 단어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태헌을 직접 만난 차수연은 이상할 게 없지만, 박건호는 내가 중국으로 갔다는 걸 어떻게 안 거지?

    「민아린: 이결 씨, 건너편 골목에 맛있는 피자집이 새로 생겼대요.」

    「민아린: 나중에 같이 가면 좋겠어요.」

    「민아린: 완전 좋은 소식! 길드 카페에 새 디저트가 들어왔어요!」

    「민아린: 이결 씨 오면 같이 먹으려고 꾹 참고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민아린: 돌아오실 거죠?」

    “…….”

    「김우진: 보고 싶어.」

    쓰게 웃으며 액정에 뜬 텍스트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만졌다. 기분이 끝도 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말해 주고 갈걸…….’

    사정이 있어서 잠시 떠나야 할 것 같다고. 그래도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라고…….

    타인의 비밀을 쉽게 캐낼 수 있는 권정한의 능력과 선뜻 나를 도와준 하태헌을 지키기 위해 내린 선택이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너무 무책임했던 것 아닌가 싶다. 저 정도는 얘기했어도 큰 문제 없었을 텐데.

    나를 신뢰하고 정을 줬던 상대에게 너무 배려가 없었다. 뒤늦은 자책과 후회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투둑. 툭.

    그렇게 한참을 넋 놓고 핸드폰만 바라보던 나는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하늘이 우중충하다 싶더니, 결국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는 바깥을 응시하다가 나처럼 위층 방에 혼자 있을 김우진을 떠올렸다. 불쑥 초조한 감정이 치솟았다.

    민아린은 내일이면 김우진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과연 그럴까?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 나와 마주하는 걸 싫어하면 어떡하지?

    사과에도 타이밍이 있다고 한다. 내일은 좀 더 나아질 거라고 믿고 있다가 마지막 남은 기회마저도 사라지는 것 아닐까?

    “여우야.”

    고민을 끝낸 나는 이불 위를 뒹굴뒹굴하고 있는 여우를 불렀다. 피이익. 내 부름에 가까이 날아온 여우가 손바닥 위로 내려앉았다.

    “너 혹시 나도 들고 날 수 있냐?”

    피익?

    그 무거운 검도 잘만 들었잖아. 혹시나 해서 물어보자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우가 기분 좋게 울었다.

    피이익. 피이.

    “할 수 있다는 거야?”

    픽!

    여우가 턱을 번쩍 들면서 가슴을 막 내밀었다. 그 자신감 넘치는 포즈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최고네.”

    그동안은 나도 바람 능력이 있던 터라 큰 관심이 없어서 몰랐다. 엘로힘의 말대로 여우를 데려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냥 떨어지지 않게 도와주기만 하면 돼.”

    창문을 열자 강한 바람과 함께 빗방울이 차갑게 닿아 왔다. 창밖으로 상체를 길게 빼서 위를 올려다봤다.

    김우진이 있는 방은 내 바로 위. 그러니 저기 보이는 창문이 김우진 방의 침실 창문이겠지. 나는 손으로 잡거나 발로 디딜 수 있는 창틀과 삐죽 튀어나온 벽면을 확인했다.

    피이익.

    나보다 먼저 창밖으로 빠져나온 여우가 눈을 깜빡였다.

    “잘 좀 도와줘. 부탁할게.”

    피익!

    어차피 미끄러져서 떨어진다 해도 발목에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어서 죽지는 않겠지만… 밤인 데다 비도 와서 긴장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각오를 다잡은 나는 창틀에 발을 올리고 상체를 쑥 내밀었다. 후우웅, 비바람에 머리카락과 티셔츠가 마구 나부꼈다.

    바깥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창틀을 딛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위에 튀어나와 있는 벽면을 붙잡았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은 몸이 빠르게 젖어 갔다.

    피이익, 피익.

    몸을 휘청이자 여우가 등을 받쳐 줬다. 덕분에 훨씬 안정적인 자세가 된 나는 이번에는 다리를 들어 창틀 윗부분으로 올라섰다. 맨발에 닿아 오는 차가운 창틀과 쇠사슬이 절그럭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가까운 거리에 김우진 방의 창문이 보였다. 하체에 힘을 주고 높이 뛰어오르면 손이 닿을 거리였다. 휘잉,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에 젖은 앞머리가 흔들렸다.

    모든 것이 젖어 있어서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 같았다. 자꾸만 아래로 가는 시선을 억지로 고정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후우…….”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힘차게 뛰었다. 피익, 타이밍 좋게 등을 밀어 준 여우의 힘으로 아슬아슬하게 김우진 방 창틀을 붙잡을 수 있었다. 재빨리 튀어나온 벽면을 딛고 창틀 위로 몸을 올렸다.

    “죽을 뻔했네. 고마워.”

    피이익.

    슬슬 젖은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비바람을 맞으니까 엄청나게 춥구나. 잔뜩 젖은 창문을 손바닥으로 대충 문질러 닦은 후에 침실 안쪽을 들여다봤다.

    안에 불이 꺼져 있어서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검은 인영이 희끗희끗하게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똑, 똑.

    빗소리에 묻히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는데, 다행히 제대로 들렸는지 상대가 이쪽을 돌아보고는 벌떡 일어섰다. 황급히 창문으로 달려온 방 주인이 망설임 없이 창문을 열었다.

    “한이결? 무슨…!”

    김우진이 나를 보고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외쳤다. 그새 또 울었는지 옅은 달빛에 드러난 녀석의 눈가가 유난히 붉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느끼며 나는 김우진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안녕, 김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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