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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93)화 (193/394)

193화

49. 오랜만입니다

“김, 우진…….”

끔찍한 통증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기운이 본능적으로 움직이며 손끝에서 바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안 돼, 이대로 가다간…….’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날카롭게 삐죽거리는 바람을 제어하는 것이 점점 더 힘에 부쳤다. 내 공격을 맞고 크게 다쳐서 피를 흘리게 될 김우진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싫어, 그건 싫…….

피이익!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장면에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번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친 그 순간이었다. 익숙한 울음소리와 함께 나타난 여우가 쪼그마한 몸을 날려서 김우진을 들이박았다.

“윽…!”

생각보다 그 박치기가 꽤 강했는지 김우진이 눈가를 좁히며 휘청였다. 발목을 쥔 손에 힘이 조금 빠진 것을 알아챈 나는 재빨리 다리를 빼냈다.

피이익! 피이익!

여우가 여기저기 튕기는 고무공처럼 휙휙 날아다니며 날카롭게 울었다. 그 틈에 황급히 기어서 김우진으로부터 거리를 벌린 나는 욱신거리는 발목을 매만졌다.

“흐윽, 으….”

차가운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붉게 손자국이 난 발목은 빠르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아…….”

여우의 난입으로 제정신을 차린 김우진 또한 부어오른 내 발목을 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녀석의 고동색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더니 이내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걸 발견한 나는 아차 싶어서 손으로 발목을 가리며 말했다.

“김우진, 아니야. 잠깐만….”

“이결 씨!”

열려 있는 현관문 너머에서 낯익은 외침이 들려왔다. 뛰어오는 발소리가 여러 개 겹쳐서 가까워지더니 곧 민아린이 나타났다.

“민아린 씨.”

걱정으로 상기된 그 익숙한 얼굴에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다행이다. 민아린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을…….

“한이결!”

긴장이 풀리며 무심코 미소를 지었던 나는 민아린의 뒤로 속속들이 도착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바, 박건호 팀장님?”

“이결 형!”

“한이결 씨.”

“…….”

박건호에 이어서 권정한과 우서혁까지. 내가 부른 사람은 민아린 한 명인데, 저 세 명은 대체 어떻게…….

피이익! 픽! 하아악!

낯선 이들이 우르르 등장하자 여우가 마치 나를 지키듯 앞을 막아서며 경계 어린 울음을 내뱉었다. 작은 등 위로 털이 삐죽삐죽 솟고 꼬리 또한 뻣뻣하게 치켜 섰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주저앉아 있는 나와 김우진, 여우를 번갈아 보던 박건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옆에서 멍하니 있던 민아린이 겨우겨우 한마디 뱉어 냈다.

“정말, 정말 이결 씨예요?”

“음… 네.”

어쩌다 이렇게 개판이 된 거지. 한숨을 내쉰 나는 발목을 가린 그대로 어색하게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다들.”

“허…….”

“하아…….”

머쓱하게 인사를 보내자 박건호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고, 우서혁은 골치 아픈 듯이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 반응들이 섭섭하다기보다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당혹스러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니까. 설마 이렇게 마주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아니, 애초에 민아린한테 전화를 한 건데 저 세 명은 뭐냐고. 미치겠네.

“이결 씨…!”

혀를 차며 난감해하는데, 볼을 붉게 물들이며 울먹거리던 민아린이 구두가 벗겨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으며 달려와 품에 안겼다.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얼떨결에 잡아 준 나는 훌쩍거리는 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흐윽, 진짜… 보고 싶었, 윽, 흐….”

“민아린 씨.”

“혹시 아, 아프거나 다쳤을까 봐, 제가… 얼마나 걱정, 걱정을… 으, 으윽…….”

“…….”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흐느끼는 민아린의 모습에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민아린을 안은 채로 시선을 들자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앉아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김우진이 보였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붉게 부어오른 발목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고통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나라는 것을.

그러려던 게 아니었다. 별 볼 일 없는 나 하나 떠난다고 해서 이들의 일상이 흔들릴 거라고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알았다면 그렇게 떠나지 않았을 텐데. 중간에 연락도 했을 거고…….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변명과도 같은 생각들은 엘라하의 말이 떠오르자마자 뚝 끊겼다. 구구절절 늘여 봤자 뭐가 달라지겠는가. 결국은 무심했던 내 잘못이었다.

“미안해요.”

민아린의 등을 토닥이며 조심히 사과했다. 이어서 김우진과 그 뒤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는 박건호와 우서혁, 권정한을 향해서도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말도 없이 사라져서.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문득, 레퀴엠 길드를 떠나던 날이 생각났다. 나와 관련된 물건들을 모두 깔끔하게 정리했음에도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그날 밤. 그때는 그게 참 이상하게 느껴졌었는데.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쓸데없는 미련 따위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사람 감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이미 겪어 봤으면서도…….’

씁쓸하면서도 마냥 슬픈 기분은 아니었다. 이곳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편안하게 미소 짓자 팔짱을 낀 채로 나를 응시하던 박건호도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래. 그렇군. 그럼 이제 정리를 좀 해 볼까?”

“예?”

“그 발목 말하는 거다, 한이결. 엄청나게 부었는데. 김우진도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고.”

민아린을 잡아 주느라고 감추고 있던 발목이 훤히 드러났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낭패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만 달싹이는데, 박건호가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민아린 힐러. 한이결 발목 좀 살펴 주십시오. 김우진은 위층 방에서 혼자 머리 좀 식히는 게 좋겠군. 권정한이 부축해 주도록 하고. 우서혁 비서는 대표실로 가서 마스터께 이 사실을 보고하는 게 어떤가?”

“네? 뭐라고요?”

마지막 말에 경악한 내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우서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권정한은 김우진을 일으켜서 나갔다.

“자, 잠깐. 우서혁 씨!”

지금 이 상황에 천사연까지 온다고? 나 진짜 감당 못 해! 우서혁을 붙잡기 위해 일어서려는 나를 강한 힘으로 붙잡은 민아린이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째려봤다.

“어디 가려고 그래요, 이결 씨! 이 다리를 하고!”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민아린 힐러 말 들어, 한이결.”

피이익! 픽!

“근데 이건 뭐지?”

민아린이 다가올 때는 가만히 있던 여우가 박건호의 접근에 또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워낙에 작아서 별 위협은 되지 못한 채로 그에게 목덜미만 잡혔다.

“그 녀석은 여우인데요….”

“여우?”

“여우요?”

발목 때문에 움직이지는 못하고 두 팔을 뻗자 박건호가 여우를 순순히 놔줬다. 피익, 후다닥 내게로 날아온 여우가 어깨 위로 올라와 서럽게 울었다.

“자, 그럼.”

쾅, 철컥.

지금껏 내내 열려 있던 현관문을 힘 있게 닫은 박건호가 웃는 얼굴과 달리 딱딱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모두 돌아올 때까지 발목 치료나 받으면서 기다리자고. 신발은 이제 좀 벗고.”

“…….”

정말 되는 일이 없었다.

***

발목은 다행히 붓기만 했을 뿐, 근육이나 뼈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라서 민아린의 능력으로 금세 평소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멀쩡하게 돌아온 발목을 확인하는데, 느긋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래서 정리해 보자면.”

가죽 소파 위로 고급스러운 슈트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길쭉한 다리를 교차한 상대가 소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23층 방에 몰래 잠입한 거로도 모자라 물건을 가지고 튀려다가 김우진에게 딱 걸렸고, 거기에 발목까지 작살났다… 이건가?”

“…발목은 방금 완치가 됐…….”

“민아린 힐러가 보고한 바로는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깔끔하게 부러졌을 거라던데.”

“…….”

나는 옆에 앉아 있는 민아린을 힐끔 바라봤다. 냉랭한 눈초리가 날아왔다.

마주한 것만으로도 무서워서 그 옆에 서 있는 박건호와 우서혁에게 슬그머니 눈길을 옮겼다. 둘 다 나를 외면했다. 마지막으로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누구보다 차가운 권정한의 얼굴까지 확인한 나는 시무룩하게 정면으로 시선을 보냈다.

“왜 대답이 없지?”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천사연이 재차 물어 왔다. 저 재수 없는 자식은 왜 하필 이럴 때 길드에 있는 거지? 바쁘지도 않나. 천사연과 마주 앉은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어깨가 축축 처졌다.

“…어쨌든 멀쩡하니까 된 거 아닙니까. 김우진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모두가 보고 있는 자리니 반말은 할 수 없었다. 치료를 위해 살짝 올렸던 바지춤을 다시 내리며 답하자 천사연이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길드에 몰래 잠입한 건 뭐라 변명할 건가? 지금 당장 잡혀가도 할 말 없을 텐데.”

“허락도 없이 들어온 부분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핸드폰과 지갑이 여기에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주 당당하군.”

“그, 혹시 방 주인이 새로 생긴 거라면 제가 그분께는 따로 사과를…….”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하자 우서혁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이 방은 한이결 씨 소유입니다.”

“…소유요?”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어리둥절해하는데, 천사연이 까칠한 음성으로 다시 끼어들었다.

“됐고. 아까부터 얼쩡거리는 그 쥐새끼는 뭐지? 거슬리는데.”

쥐, 쥐새끼? 천사연의 신랄한 말에 어깨에 앉아 있던 여우와 나는 동시에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쥐새끼라니, 좀 심한 거 아닌가? 얘가 어딜 봐서 쥐 같다는 거지?

피이익! 피익! 픽!

여우가 미친 듯이 짜증을 내며 울기 시작했다. 이토록 날카로운 모습은 처음이었다. 털을 바짝 세우고 분개하는 여우를 급히 안아서 달래며 외쳤다.

“애 듣는데 쥐새끼가 뭡니까? 그리고 이 아이는 여우입니다!”

“여우건 쥐건 우리 길드는 동물 출입 금지다. 사육도 물론 금지고. 다시 돌려보내.”

“동물 아닙니다. 그리고 저 여기서 다시 살겠다고 한 적 없습니다.”

어금니를 세게 문 채로 내뱉은 대답에 가만히 듣고 있던 민아린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어 왔다.

“그럼 여우 아니에요?”

“여우는 맞는데 동물은 아니에요.”

“…여우인데 어떻게 동물이 아닐 수가 있어요?”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나는 잠시 고민한 후에 입을 열었다.

“생긴 건 여우 같지만, 엄연히 따지면 몬스터에 가깝습니다. 이런저런 능력도 있고….”

“하지만 이결 씨가 아까 여우라고 불렀잖아요.”

“맞습니다. 이름이 여우입니다.”

“네에?”

“그 얘기는 둘이 나중에 따로 하도록 하고.”

나와 민아린의 대화를 냉정하게 잘라 낸 천사연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공중에서 쇠사슬이 연결된 은빛 족쇄가 뚝 떨어졌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거부터 처리하지.”

“예?”

“박건호 팀장. 우서혁 비서.”

천사연의 부름에 뒷짐 지고 서 있던 박건호와 우서혁이 내게 성큼 다가섰다. 커다란 체격을 가진 둘이 가까이 오자 소파에 앉아 있는 내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감각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지고 팔에 닭살이 훅 돋아났다.

뭔가 위험하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순간, 새까맣게 빛나는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그가 싸늘한 웃음과 함께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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