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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92)화 (192/394)

192화 

레퀴엠 길드 건물 맞은편에 있는 상가 옥상에 서서 모자를 눌러썼다. 뜨겁게 내려오는 한낮의 햇빛 너머로 보이는 레퀴엠 건물 입구에는 예상했던 대로 경호원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정문 통과는 어렵겠다.’

저 경호원 중에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굳이 가서 사정을 설명하며 이목을 끌기는 싫었다. 아니, 그 이전에 직원 카드가 없으면 출입 자체가 안 될지도.

역시 이전에 지냈던 23층 방 창문을 통해서 몰래 들어가는 수밖에 없나….

최소한 핸드폰이나 지갑만 되찾아도 상황은 훨씬 편해진다. 굳이 물건을 치우거나 정리를 한 게 아니라면 방에 남아 있을 텐데…

바람으로 몸을 둥실 떠올려서 빠르게 레퀴엠 길드를 향해 날았다. 내가 지내던 23층 방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흠…….”

23층 방 침실로 연결되는 창문에 몸을 바싹 붙여서 안쪽을 살펴봤다. 창문이 약간 불투명해서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아도, 불이 꺼진 채로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확실했다.

덜컹, 덜컹.

혹시나 해서 당겨 본 창문은 짐작했던 대로 굳게 잠겨 있었다. 이걸 어떻게 들어가지.

능력으로 창문을 깨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지만, 자칫하다가는 파편이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고 경보가 울릴 수도 있으니 위험했다. 그런 민폐를 부릴 바에는 차라리 입구로 가서 경비원들 상대하는 게 훨씬 나을 테고.

피이익, 피익?

잠긴 창문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진 내 주변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던 여우가 갑자기 투명화를 풀고는 내게 검을 휙 내던졌다.

“뭐야?”

픽, 피익.

무거워서 그만 들겠다는 항의인 줄 알았는데, 보란 듯이 내 앞으로 날아온 여우가 창문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녀석의 몸이 창문 유리를 관통하면서 침실로 쑤욱 들어가 버렸다.

피이익!

“미친…….”

풍성한 꼬리 끝까지 모조리 창문 너머로 넘어간 여우가 작은 앞발 두 개로 잠금장치를 밀어냈다. 덕분에 별다른 문제 없이 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온 나는 검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여우를 붙잡았다.

“대체 몸이 어떻게 된 거야?”

피익?

몸을 마구 주무르자 여우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엘로힘이 여우 부모가 고스트 몬스터라고 알려 줬었지. 겉모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데다 몸이 투명해지고 사물도 통과한다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라니.

“부럽네….”

픽!

여우의 말랑말랑한 발바닥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허탈하게 중얼거리자 여우가 신난 표정으로 울었다.

-그래도 데려가는 게 좋을 거다. 많은 도움이 될 테니 믿어 보렴.

엘로힘이 내게 여우를 넘겨주며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한국으로 오자마자 여우에게 벌써 두 번이나 도움을 받게 된 셈이니 할 말이 없었다.

“검 잘 지키고 있어.”

여우를 놔주며 방 안을 찬찬히 둘러봤다. 내가 나간 후로 시간이 꽤 흘렀을 텐데도 방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새하얀 침대 시트를 쓸어 만지다가 검을 던져둔 테이블을 다시 살폈다. 떠나기 직전에 여기에 핸드폰과 지갑, 팔찌 등 물건들을 다 놓고 갔었는데. 흔적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다른 곳으로 치운 모양이다.

아무래도… 침실 밖도 확인해 봐야 할 듯싶다. 모자를 좀 더 깊게 눌러쓰며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었다. 익숙한 거실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거실도 침실과 같이 불이 온통 꺼진 상태였지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덕분에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신발을 벗지 않은 채로 거실로 걸어 나갔다. 더러운 행동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 들이닥치면 당장 검과 여우를 챙겨서 침실 창문으로 도망쳐야 하니 말이다.

“어디 보자…….”

여기저기 기웃거린 결과, 나는 거실과 주방도 침실과 마찬가지로 먼지 쌓인 것 하나 없이 깔끔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길드 내부에 있는 방이라서 청소를 정기적으로 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떠난 후에 새로운 사람이 지내고 있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좋겠다.’

새로운 주인이 생긴 거라면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은 범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 않나. 굉장히 찝찝해져서 최대한 빨리 지갑과 핸드폰을 찾아내서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물건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았다. 소파 옆 협탁과 거실 테이블 아래, 주방 수납장까지 뒤져 봤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정말 다 치워 버린 건가. 불안한 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TV 아래에 놓인 서랍장을 열어 봤다.

“오.”

낯익은 물건들이 그곳에 놓여 있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지갑과 핸드폰을 꺼내고 서랍장을 다시 닫았다.

지갑 속에는 떠나기 전과 똑같이 카드와 신분증, 적은 현금이 들어 있었다. 좋아. 이것만 있으면 당분간 돈 걱정은 없었다. 용병 일로 번 돈이 그대로 들어 있으니까.

다시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머니에 잘 챙겨 넣은 후에 핸드폰도 건드려 봤다. 전원이 꺼져 있어서 다시 켜야 했다.

‘연락이야 뭐, 딱히 올 만한 곳은 없긴 한데.’

말도 없이 떠났으니 김우진이랑 민아린은 전화 몇 통 정도 했을 것 같기도 하고.

느긋하게 생각하며 숙였던 몸을 다시 세운 나는 화면이 켜지자마자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하는 핸드폰에 기겁했다.

“뭐, 뭐야?”

무서워서 차마 건들지 못하는 화면으로 부재중 전화와 온갖 메시지 알림들이 쉬지 않고 떴다.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핸드폰을 떨구자, 이제는 바닥이 덜덜덜 진동했다.

삐빅, 삑, 삑, 삑.

“……!”

허겁지겁 핸드폰을 주우려는데, 설상가상으로 현관문 도어 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진동하는 핸드폰을 손에 줍고 침실로 도망치려는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

“…….”

우우웅, 우우웅.

아직도 진동하는 핸드폰을 쥔 채로 뻣뻣하게 굳은 나는 현관으로 들어선 상대를 바라봤다. 활짝 열린 현관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머리카락이 유독 붉었다.

“김우진?”

“…….”

새하얀 얼굴에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 귀에 피어싱까지. 내가 기억하는 그 김우진이 맞았다.

‘후우…….’

난 또, 누군가 했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생판 모르는 경호원이라거나 이 방에서 지내는 사람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꼼짝없이 경찰서로 끌려갈 뻔했다.

“…….”

내 부름에도 김우진은 조각상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겨우 진동이 멈춘 핸드폰을 지갑과 마찬가지로 주머니에 넣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놀랄 만하지. 그 누구든 연락 두절된 상대가 대뜸 나타나면 당황스러울 거다.

“음… 잘 지냈냐?”

“…….”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차가운 공기에 어색함이 몰려왔다.

“갑자기 미안하다. 이렇게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가진 게 없어서… 김우진?”

괜히 눌러썼던 모자를 벗으며 묻지도 않았던 얘기들을 주절주절 늘어놓는데, 별안간 김우진이 크게 휘청였다.

“야, 왜 그래?”

상체를 깊게 숙인 채로 거친 숨을 헐떡거리던 김우진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에 덜컥 겁이 나서 급히 녀석에게로 달려가 어깨를 붙들었다.

“김우진, 정신 차리고 숨 제대로 쉬어 봐!”

그가 목숨 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를 붙잡아 왔다. 나는 그제야 붉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김우진의 피부가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것을 알아챘다.

“으, 흐으… 윽…….”

“김우진.”

좀처럼 숨을 제어하지 못하던 김우진이 이제는 굵은 눈물까지 뚝뚝 떨어트렸다. 미간을 찌푸리며 김우진의 고개를 조심스럽게 붙잡아 억지로 들게 했다.

잔뜩 흐트러진 앞머리와 초점 없이 흐릿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뺨을 하염없이 가로지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주었다.

“대체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엘로힘의 신전에서 지낼 때 TV로 봤던 김우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지치고 피곤해 보이던 얼굴이 지금 우는 얼굴과 겹쳐졌다.

아무래도 내가 떠나 있던 기간 동안 나쁜 일을 겪은 게 틀림없었다. 설마 새로 들어간 지원팀에서 따돌림이라도 당하나. 그게 아니라면 집까지 찾아왔던 그 깡패놈들이 또 껄떡거리기라도 했나.

말도 못 하고 숨넘어가도록 우는 김우진이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억지로 몰아세워서 대답을 듣고 싶지는 않은 터라 잠자코 눈물을 닦아 주고 있지만, 이렇게 계속 불안정한 상태라면 민아린을 불러야 할 것 같았다.

“흐윽…. 으, 저, 정말… 한이결… 한이결이야?”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하염없이 울던 김우진이 더듬거리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호흡은 여전히 끊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그래.”

“으, 윽, 어, 어떻… 어떻게…….”

“잠깐만, 김우진.”

더는 안 되겠다. 이런 식으로 민아린에게 연락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 이상 김우진을 내버려 뒀다가는 호흡 곤란으로 실신해 버릴 것 같았다.

나는 꿇어앉았던 무릎을 펴며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가만히 있어 봐. 일단 연락을 좀…….”

멍하니 우는 김우진에게서 등을 돌리고 민아린의 번호를 찾았다. 통화 버튼을 막 누른 그때, 갑자기 종아리가 무언가에 붙잡혀 확 끌려갔다.

쿠웅!

“으윽!”

속절없이 바닥으로 넘어진 나는 그만 핸드폰을 놓치고 말았다. 달그락, 떨어져서 쭉 밀려난 핸드폰에서 통화 연결 음이 울렸다.

“가, 가지 마…. 가지 마, 제발.”

“김우진? 무슨…….”

발목을 커다란 손으로 움켜쥔 김우진이 하염없이 울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왜, 왜 신발을… 흐윽, 또, 떠, 떠날…….”

“읏, 김우진! 아파, 손 좀…!”

발목을 잡은 손에 힘이 점점 강해졌다. 뜨거운 통증이 밀려와 본능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자 반대편 허벅지까지 단단한 손에 짓눌렸다.

“흐윽, 나, 나는 더는 버틸 수가… 윽, 으…. 가지 마, 이결아, 내가, 잘못, 윽…….”

[여보세요? 이, 이결 씨? 이결 씨 맞아요? 여보세요?]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얼굴로 횡설수설하는 김우진 목소리와 저 멀리 떨어진 핸드폰에서 민아린의 외침이 동시에 들려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발목이 너무 아파서 제대로 된 생각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김우진!”

그쯤에서야 나는 김우진이 진심으로 내 발목을 부러뜨리기 위해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오싹한 소름이 등줄기를 치고 지나가며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삼켜 냈다.

“김우진, 제발…! 허억, 정신 좀 차려!”

“…….”

내 애원에도 김우진의 탁한 고동색 눈동자는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생판 모르는 남이었으면 망설임 없이 능력을 썼을 텐데. 울고 있는 김우진을 도저히 밀어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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