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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91)화 (191/394)

191화 

“사람이 없는 장소라…….”

엘로힘이 통로를 연결할 곳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기다란 검을 들고 어찌해야 할지 모른 채로 우왕좌왕했다.

이걸 등에 메야 하나, 허리에 차야 하나. 아니, 어디로든 도저히 가려질 만한 크기가 아니라서 난감했다.

피이이이.

나와 엘로힘이 둘 다 침묵에 빠지자 멀뚱히 서서 우리를 구경하던 여우가 어깨 위로 올라와서 작게 울었다.

“어차피 강남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 근처에 있는 빈 상가로 연결하는 편이 제일 무난해 보이는구나.”

“네. 좋습니다.”

“그리고 검은…….”

검과 여우를 번갈아 보던 엘로힘이 입을 열었다.

“여우에게 맡기는 게 어떻겠니?”

그게 무슨 소리지?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기울이는데, 여우가 어딘가 뿌듯한 기색으로 앞발을 쭉 뻗었다.

피익!

“어?”

검에 앞발을 척 올린 여우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는 것과 동시에 검도 함께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 놀라운 광경에 나는 당황하며 물었다.

“아니, 투명화 아직 못 배웠다고….”

“열흘 전에 숲에 갔을 때 배운 모양이다.”

“예? 하지만 어떻게 검까지?”

“미처 설명을 못 해 줬구나. 저 아이들은 몸에 닿은 물건을 투명하게 만들 수 있단다.”

“대단하네요.”

다시 선명해진 여우가 턱을 치켜들며 의기양양한 자세를 취했다. 그 꼴을 잠시간 바라보던 나는 엘로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왜 진작 알려 주지 않고 지금 말해 주시는 겁니까?”

“음, 그것도 내가 미처 설명을 깜빡해서….”

“엘…….”

내 의심스러운 눈초리에도 엘로힘은 모른 척 화사하게 웃었다.

“이렇게 됐으니 여우와 함께 가야겠구나. 검을 무사히 가지고 다니려면 저 아이의 투명 능력이 필요하지 않니?”

피이익! 피익!

엘로힘의 얘기를 들은 여우가 신나게 울어 대는 모습에 한숨만 나왔다.

“너무해요, 엘.”

“미안하구나. 그래도 데려가는 게 좋을 거다. 많은 도움이 될 테니 믿어 보렴.”

“…알겠습니다.”

어차피 그의 말대로 검을 가져가려면 여우가 필요했다. 검을 들고 강남 거리를 돌아다녔다가는 얼마 가지 않아 경찰서로 끌려갈 테니까.

내 대답에 여우가 아예 검을 끌어안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저 무거운 검을 쪼끄마한 놈이 잘도 안고 다니네. 확실히 평범한 동물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검 문제도 해결됐으니 이제 통로를 열까 하는데. 괜찮겠니?”

“예.”

둥둥 떠 있는 여우에게 검을 맡기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일순간 강해졌다. 그 상태로 엘로힘이 허공을 한번 휘저으니 몇 번이고 봐 왔던 새하얀 통로가 생겨났다.

“자, 그럼.”

통로를 연결하는 데 성공한 엘로힘이 뒤를 돌아봤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이 내게 향했다.

“이제 작별이구나.”

“아…….”

“천사연의 책이 완성되면 찾아가마. 아마 한두 달 정도 걸릴 것 같다.”

대가로 눈을 쓰지 못했던 만큼 천사연의 책이 완성되는 기간도 늘어났다. 그래도 책 덕분에 나중에 또 만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안심됐다.

“무리하지 마세요.”

“이런. 그건 내가 할 걱정인데.”

가까이 다가온 엘로힘이 커다란 품 안으로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 어떤 때보다 꽃향기가 강하게 풍기며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볼을 쓸고 지나갔다.

“부디 몸조심하렴, 세현아. 우리에게는 네가 제일 중요하단다.”

“…….”

따듯하게 감싸 오는 체온과 다정한 목소리에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뻣뻣하게 내려놓은 두 팔을 들어 엘로힘의 등을 마주 안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능력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 불안하구나.”

“조심해서 움직이겠습니다.”

“책이 완성되기 전에 만나야 할 일이 생긴다면 꿈으로 찾아가겠다.”

“알겠습니다.”

한참 동안 나를 안고 있던 엘로힘은 마지막으로 이마에 입을 맞춘 후에 나를 놔주었다. 아이를 쓰다듬듯 머리를 쓱쓱 쓸어 만져 준 그는 통로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가거라, 세현아. 항상 지켜보고 있으마.”

“예. 나중에 뵙겠습니다.”

피이익.

통로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내 뒤를 여우가 둥실둥실 따라왔다. 빙긋 웃는 엘로힘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앞이 온통 새하얀 빛으로 삼켜졌다.

***

빈 상가로 연결해 준다는 엘로힘의 말처럼 통로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텅 비어 있는 건물 내부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내가 무사히 도착하자마자 통로는 빛 무리로 변해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투명화 써.”

피이이.

검을 든 채로 살랑살랑 날아다니는 여우에게 말하자 녀석이 검과 함께 투명하게 변했다. 투명해지는 건 좋은데 내 눈에도 안 보이니까 좀 불안했다.

“천천히 날 테니까 잘 따라와야 한다. 알겠지?”

피익. 피이익.

걱정된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으니 그저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귓가에서 재잘거리는 여우 울음소리를 들으며 찬찬히 주변을 살펴봤다.

바닥에는 지저분한 이면지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먼지 쌓인 사무실 책상 한두 개가 비스듬히 놓여 있는 텅 빈 사무실이었다. 나는 혹시 몰라 가까운 창문을 당겨 봤다. 좀 뻑뻑하기는 해도 다행히 잘 열렸다.

“흠.”

여름 바람이 옅게 불어오고, 아래로는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 정도 거리면 10층 정도 되려나. 멀리서 빠아앙, 하는 자동차 경적이 울려 퍼졌다.

그제야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창문에 턱을 괴고 번잡한 서울 풍경을 잠시간 구경하던 나는 기대고 있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가자, 여우야.”

주인 없는 빈 건물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도 안 될 일이니 빨리 자리를 뜨는 게 나았다. 기운을 끌어 올려 몸을 바람으로 감싼 나는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이렇게 높이 나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고층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고도를 좀 더 높이며 입가를 매만졌다.

‘레퀴엠으로 가는 게 나으려나.’

말도 없이 나온 데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으니… 내가 갑자기 나타나면 다들 당황스럽기만 할 텐데.

무엇보다 들여보내 줄지도 모르겠다. 특히 요즘은 프라우스 신도단 때문에 길드마다 경비가 삼엄해져서 막무가내로 들어갔다가는 바로 붙잡힐 수도 있었다.

‘상상만 해도 창피하군…….’

그렇다고 하태헌을 만나러 가는 건 헤어지기 직전에 여러 일이 있던 탓에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다.

“돈도 없는데.”

피익.

한숨을 푹 내쉬며 한탄하자 투명 상태의 여우가 위로하듯 울었다. 고맙다, 고마워.

아무리 그래도 계속 날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적당히 사람이 적은 곳을 찾아 내려왔다. 강남 거리에서 살짝 비켜난 골목길은 다행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가진 것 없고, 얼굴은 뉴스에 떴고, 확실한 목적지도 없다. 핸드폰이라도 있었으면 김우진이나 민아린에게 연락이라도 해 봤을 텐데. 아니, 이전에 돈이 있었으면 어떻게든…….

“이, 이거 놔주세요!”

골목길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주저앉아서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는데, 맞은편에 보이는 길가에서 잔뜩 겁먹은 외침이 들려왔다.

“……?”

뭔가 싶어서 얼굴을 삐죽 내밀어 보니 앳되어 보이는 학생 두 명을 위협하고 있는 시커먼 남자가 보였다.

“죄, 죄송하다고 말했…….”

“닥쳐! 끄으윽, 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야….”

얼굴을 숙인 채로 비틀거리는 남자의 손에 식칼이 쥐어진 것을 알아챈 나는 급히 바람을 끌어 올렸다.

“죽어어어!”

내가 사이에 끼어든 것과 동시에 남자가 식칼을 휘둘렀다. 급히 상체를 틀어 공격을 피하며 남자의 손목을 붙잡아 꺾었다. 뚜둑, 뼈가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식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끄아악!”

고통에 울부짖는 남자의 얼굴 중앙에 곧바로 주먹을 꽂아 넣었다. 꺽, 코가 부러진 남자는 코피를 질질 흘리며 그대로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살짝 얼얼한 손을 털며 기절한 남자를 내려다봤다.

‘술 냄새…….’

단순한 주정뱅이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식칼을 들었을 때 풍긴 불쾌한 기운이 너무 적나라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 남자는 낮은 등급의 능력자일 것이다.

프라우스 신도단의 영향인가? 이런 밝은 대낮에 칼부림이라니…. 그들의 힘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가, 감사합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인사에 생각을 끊어 낸 나는 뒤늦게 주변을 둘러봤다.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 두 명과 핸드폰을 든 채로 수군거리는 구경꾼들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누가 신고라도 했는지 멀리서 경찰 사이렌 소리도 들렸다.

망했군…….

“그래.”

다른 거보다도 경찰이 도착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바닥에 떨어진 식칼을 발로 툭 차서 남자 반대편으로 밀며 아직도 반쯤 정신이 나가 보이는 남학생에게 말했다.

“식칼은 건들지 말고 이따 경찰 아저씨 오면 넘겨라.”

“네? 아, 으. 네.”

“그리고 혹시 이거 네 거야?”

나는 남학생 바로 옆에 떨어져 있는 검은 모자를 주워 들며 물었다. 얼떨결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상대를 향해 씩 웃으며 모자를 눌러썼다.

“도와준 답례로 내가 가진다.”

“네?”

저편에서 경찰차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젠 정말 도망칠 시간이었다. 몸을 감싸 둔 바람의 강도를 높여서 훌쩍 날아오르자 여기저기에서 경악에 찬 음성들이 터져 나왔다.

경찰차는 내가 근처 건물 옥상으로 몸을 피했을 때 도착했다.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서 상황을 수습하는 것을 지켜보며 여우를 불렀다.

“잘 따라오고 있지?”

피이익.

“검도 잘 들고 있는 거 맞지?”

픽!

재차 물어보자 여우가 약간 짜증을 담아서 대답을 해 왔다. 거참, 두 번 묻지도 못하게 하네.

“그럼 이제…….”

어떡할까. 모자를 벗어서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생각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여름 바람에 부스스 흘러내린 앞머리가 흔들렸다.

우선은 레퀴엠 길드부터 찾아가는 게 맞는 선택인 것 같다. 여태껏 지내 온 곳이기도 하고… 놓고 온 물건들도 아직 남아 있다면 돌려받고 싶었다.

운 좋게 천사연을 만난다면 프라우스 신도단 행보에 관해서 얘기도 좀 들어 보고.

‘하태헌은 나중에 찾아가야겠어.’

물론, 그전에 검을 보관할 방법을 알아 놔야겠지만. 여우한테 저 무거운 검을 계속 맡겨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일단 레퀴엠 길드 건물에 접근해서 상황부터 살펴보자. 그다음에 경비를 뚫고 들어갈 방도를 모색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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