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나는 아주 오랜만에 하얀 셔츠와 면바지가 아닌 티셔츠에 재킷을 걸치고 청바지를 입었다.
하태헌과 함께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입고 있던 옷이었다. 갈아입고 신전 밖으로 나오자 통로를 열어 둔 엘로힘과 엘라하가 내게로 시선을 보내왔다.
“이 옷이 아직 남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떠날 날을 위해서 따로 보관해 두고 있었단다.”
둘에게 가까이 걸어가자 주변을 서성이던 여우가 헐레벌떡 날아왔다. 피이이익. 녀석은 내 어깨 위로 내려와 가냘프게 울었다.
여우 나름의 작별 인사인가. 나쁜 기분은 아니라서 일단 내버려 두고 엘라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 보겠습니다.”
“그래.”
시큰둥한 음성으로 대답한 엘라하가 잠시간 내 어깨 위에 있는 여우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데려가지?”
“예?”
“이 아이는 이미 따라갈 생각인 것 같은데.”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하며 급히 여우를 떼어 내려 했지만, 녀석이 발톱을 세우며 옷을 붙잡고 늘어졌다.
“아닙니다. 데려가는 건 조금…….”
“왜? 큰 문제 없지 않나.”
피이익! 피이익!
여우는 바들바들 떨며 끝까지 매달리다, 뒷덜미를 잡아 들자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동물을 괴롭히는 모양새가 된 나는 난감함에 결국 녀석을 놔주었다.
“계속 이곳에서 안전하게 살아온 아이인데, 갑자기 어떻게 데려갑니까?”
“뭐, 그럴 수 있지. 본인이 저렇게 원하는데.”
혹여 내가 또 떼어 낼까 봐 허겁지겁 다시 어깨로 기어 온 여우가 발톱을 박아 왔다. 의외로 꽤 아팠다.
“하지만…….”
나는 엘라하 뒤에 서 있는 엘로힘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가 빙긋 웃었다.
“데려가지 그러니?”
“…….”
믿을 사람 하나 없군.
“이전에도 말했지만 평범한 동물이 아니라 몬스터란다. 먹이를 챙겨 줘야 하거나 털이 빠지지도 않으니 데리고 다닐 만할 거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내 어깨에 발톱을 박아 넣은 채로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여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제대로 보호할 자신 없습니다.”
“흠…….”
피이익! 피익!
남의 속도 모르고 여우는 계속해서 항의하듯 울어 댔다. 이 녀석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입가를 매만지던 엘로힘이 제안했다.
“그럼 우선은 게이트에서 무기를 얻을 때까지만 데리고 있어 보는 건 어떻겠니?”
“으음…….”
“그때도 여전히 싫다면 무기를 얻은 뒤로는 내가 데려가면 되니까. 괜찮지?”
“그런 거라면 저도 좋습니다.”
대화가 일단락되자 여우가 후웅,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곤란한 건 난데 왜 자기가 한숨을 내쉬는지 모르겠다.
결국 여우를 어깨에 달고 통로 앞에 선 내게 엘라하가 말했다.
“권세현, 책을 읽었으니 알잖아.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
“그 여우를 포함해서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지.”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머뭇거리는 날 향해 특유의 미소를 지은 엘라하가 한 걸음 물러섰다.
“조심해서 가, 권세현. 언젠가는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라지.”
그 인사에 뒤늦게 고개를 들고 주변을 바라봤다. 새파란 하늘 아래로 펼쳐진 널따란 초원과 커다란 신전이 보인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하얀 꽃잎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장소. 그 한가운데에 서서 나를 배웅하는 엘라하.
“…….”
또 올 수 있을까. 누구도 알지 못할 질문을 속으로 삼켜 내며 등을 돌렸다.
엘로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부드럽고 따듯한 손을 마주 잡으며 천천히 통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
지하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통로를 빠져나온 나는 이전에 한번 봤던 낯익은 내부를 눈에 담았다.
“제대로 왔구나.”
통로를 닫은 엘로힘이 여유로운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그에게서는 은은하게 빛이 흘러나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라진 게 없는 거대한 여신상을 찬찬히 살펴봤다. 하태헌의 공격을 받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온몸이 대리석으로 변한 여신상.
주변에 깨지고 무너진 흔적들도 그대로인 것을 보아 나와 하태헌이 다녀간 후로 리셋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온 지 5개월이 넘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여신상을 또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조금 김이 샜다.
“숨겨진 보스 몬스터라서 그런 거란다.”
내 머릿속이 훤히 보이는 엘로힘이 간단히 설명했다.
“보스 몬스터는 한번 죽으면 게이트가 초기화되어도 살아나지 않으니 말이다. 문양 아래에 아이템까지 있으니 더욱 확실하지.”
“그렇군요.”
나는 여신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본 후, 앞장서서 걸어가는 엘로힘의 뒤를 쫓았다.
“저기, 엘.”
“응?”
“게이트가 리셋 되는 이유도 알고 계십니까?”
“그래.”
잠시 눈을 깜빡이던 엘로힘이 곧 말을 이었다.
“게이트는 다른 세계와 연결된 통로지만 완벽한 것은 아니란다.”
“완벽하지 않다면…….”
“정확히는 다른 세계의 일부분을 연결한 거란다. 몬스터가 살아 있는 기점으로 연결해 뒀으니, 클리어를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기점으로 되돌아가는 거지.”
덧붙인 설명을 들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칼리는 우리와 비슷한 존재지만, 워낙에 많은 통로를 열다 보니 연결되는 힘이 부족하고 불안정한 거다. 그래서 보스 몬스터처럼 강한 존재는 살아 있는 기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은 채로 끝나는 거고.”
“그럼 게이트 이상 현상도….”
“비슷하지. 반복된 시간 흐름으로 세계가 약해진 만큼 연결된 통로에도 빈틈이 더 많아진 거니까.”
대화를 나누며 엘로힘과 나는 14번째 방 앞에 도착했다. 문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다른 방과 달리 유일하게 푸른 보석이 박혀 있는 방이었다.
보석을 누르자 문이 열리며 군데군데 촛불이 켜져 있는 어두운 방 안이 나타났다. 하태헌과 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바닥을 살피니 이전에 발견했던 문양이 그 자리 그대로 있는 것이 확인됐다.
“엘, 여기입니다. 장미 문양이요.”
“흐음.”
무릎을 굽히고 앉아 문양을 가리키자 엘로힘이 가까이 걸어와 허리를 숙였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피이익.
나와 엘로힘이 바닥에 있는 문양에 시선을 집중하자 여우도 어깨에서 내려와 꼬리를 살랑이며 울었다.
“글쎄. 내가 보기엔 세현아, 이건 장미 문양이 아닌 것 같다.”
“네?”
“장미보다는 작약이 아닐까 싶은데.”
자, 작약?
작약이 꽃인 거는 알아도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르는 나는 머쓱하게 물었다.
“장미랑 비슷한가 보네요.”
“어느 정도는. 꽃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면 헷갈릴 만하지. 그럼 바로 무기를 꺼내 보자.”
엘로힘의 눈짓에 나는 문양 위를 돌아다니는 여우를 안으며 비켜섰다. 그의 손이 먼지 쌓인 문양 위로 다가가자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며 문양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쿠구궁!
엘로힘의 힘에 문양이 환하게 빛나며 땅이 강하게 진동했다. 그러더니 문양이 새겨진 돌바닥이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몬스터가 가진 신성력과 내 힘은 비슷한 부분은 있으니 반응할 거라고 짐작했는데… 다행히 맞았구나.”
“건드려도 위험한 건 아니겠죠?”
“괜찮을 테니 열어 보렴.”
문양이 새겨진 타일을 바람으로 천천히 들어 올리자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중앙에 검푸른 보석이 박혀 있는 장검이었다. 천사연이 사용하는 릴리스의 검보다 좀 더 크고 검날도 넓었지만 풍기는 기운은 비슷했다.
“SS급인가요?”
“기운의 양을 보니 확실히.”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검을 잡아 들었다. 길게 뻗은 검은 생각보다 훨씬 묵직했다.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측정을 해 봐야 알겠지만, 내가 느끼기로 꽤 쓸 만한 아이템 같구나.”
“좋네요.”
S급만 되어도 반가울 일인데, SS급이라니.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로힘이 인정한 거라 더욱 믿을 만했다.
나는 이 검을 들고 싸울 하태헌을 상상하며 활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기가 하나쯤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20일 전에 드디어 로헌에서 SS급 코트가 하태헌의 소유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새로 나타난 D45 구역 게이트에서 얻어낸 SS급 코트로, 레퀴엠 마스터 천사연이 해당 발언의 증인이 되어 주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주변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언제 어느 때건 당당하게 코트를 걸칠 수 있게 된 하태헌이니, 새로운 선물을 줘도 아주 괜찮다는 거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만나서 줘야지.’
아주 오랜만에 기분이 무척 좋았다. 내가 미소를 숨기지 못하자 엘로힘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기쁘니?”
“SS급일 거라고는 정말 예상 못 했습니다.”
“잘됐다. 하태헌, 그 아이에게 주려고 이미 마음을 정했구나.”
“으음. 주변에 검을 쓰는 사람이 천사연이랑 하태헌 씨밖에 없는데, 천사연은 이미 있으니까요.”
촛불에 매끈하게 빛나는 검날을 내려다보다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여긴 하태헌 씨가 담당하고 있는 게이트니까 전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세현아, 네가 가져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다만.”
“…….”
그 말에 나는 잠시간 손에 든 검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뇨. 저한테는 너무 무거운 데다가 이런 장검은 한 번도 다뤄 본 적이 없어서요. 하태헌 씨에게 넘기는 편이 여러모로 낫습니다.”
“그래?”
“네.”
엘로힘과 얘기하며 검을 여기저기 살피던 나는 검 손잡이와 맞닿아 있는 검날에 새겨진 이름을 발견했다.
‘Kayin…….’
이 검의 이름인가? 카인?
나와 마찬가지로 이름을 알아챈 엘로힘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아, 그런가….”
“엘?”
“우리가 이 검을 찾아온 것도 어쩌면 하나의 흐름일지도 모르겠구나.”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엘로힘이 두 눈에 빛 가루가 스쳐 지나갔다.
“검은 아까 말한 것처럼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렴. 애초에 내가 오지 않았으면 얻지 못했을 아이템이고, 나는 너를 위해 온 거니… 결국은 네 것이 아니겠니.”
“그, 그런가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엘로힘이 해 주는 말은 부정하는 게 영 쉽지 않았다.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수긍하게 된다고 할까.
조용히 나를 응시하던 엘로힘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짙은 미소를 지었다.
“너는 정말 귀한 아이구나, 세현아.”
“예?”
“진심이란다.”
“…….”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는 내 뺨을 가볍게 쓸어 만진 엘로힘이 물어 왔다.
“이제 검도 얻었으니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생각해 둔 장소 있니?”
“글쎄요. 최대한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으로 가고 싶기는 합니다.”
근데 이 검은 어떡하지. 인벤토리도 없는 터라 숨길 방법이 없었다. 이 커다란 검을 들고 길 한복판을 돌아다닐 수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