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48. 작은 도움
“엘…….”
“조용히.”
엘로힘이 나를 품 안으로 감췄다. 그에게 안기자 어깨를 짓누르던 압박이 사라지고 숨 쉬는 것이 훨씬 편해졌다.
“이 아이를 놓아주거라.”
그가 흙 속에 붙잡혀 있는 내 다리를 섣불리 건드리지 않으며 동굴 속 누군가에게 말했다. 쿠궁, 바닥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침입자가 아니다. 당장 물러서라.”
엘로힘에게서 몸이 떨릴 정도로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온 동시에 새하얀 빛이 더 강해졌다. 그러자 발목을 강하게 붙잡고 있던 덩굴이 사라졌다.
새하얀 빛이 어두운 동굴 안쪽을 아주 잠깐 비춘 그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생명체의 눈동자를.
녹색 눈은 중앙에 박혀 있는 동공이 뾰족한 세로 모양이었다. 엘로힘의 힘이 줄어들면서 다시 어둠에 감춰진 눈의 주인은 순순히 나를 놔주고 동굴 안쪽으로 기척을 숨겼다.
“세현아. 일어설 수 있겠니?”
“……네.”
하지만 대답과 달리 몸이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던 엘로힘이 나를 가볍게 들어 안았다.
“제, 제가 걸을 수….”
“가만히 있으렴.”
그는 구석에서 자그마한 등을 말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우도 어깨 위로 올린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자.”
엘로힘의 새하얀 맨발이 닿을 때마다 검은 흙바닥에서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났다가 순식간에 메말라 죽었다. 어두운 숲 한가운데를 여유롭게 가로지르는 그의 얼굴은 웃음기 한 점 비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괜찮단다.”
그제야 내게로 시선을 내린 엘로힘의 금안이 짧게 반짝였다.
“세현아, 네가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이미 알고 있단다. 오히려 내가 고마워할 입장이지.”
“…….”
“미안하다, 신경 쓰게 해서. 화가 난 건 아니란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엘로힘이 슬픈 얼굴로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동굴 속에 있는 존재는 정체가 뭡니까?”
“우리와 함께 살던 아이란다.”
“여우처럼요?”
“이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살았지.”
담담하게 대답하는 엘로힘의 얼굴은 너무나도 흐렸다.
“엘라하가 제일 아끼던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도저히 죽일 수가 없더구나.”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까?”
“그래.”
어둠이 점점 희미해지며 내가 들어왔던 숲의 입구가 보였다. 아우웅, 멀리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아이는 열매를 먹었단다. 그 이후로 저렇게 변했지.”
“열매라면….”
“이전에 한번 보지 않았니? 사과나무의 열매 말이다.”
그 말에 황금으로 뒤덮여 찬란하게 빛나는 사과나무를 떠올렸다. 가까이 다가온 이들을 홀리는 기이한 열매.
“열매는 손에 든 자의 욕망을 실현하는 힘을 가졌다. 그러니 함부로 먹으면 위험하지.”
“그 사실을 미처 모르고 먹었나 보군요.”
“아니.”
내 말에 엘로힘이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미소 지었다.
“칼리가 먹였단다. 직접.”
“…….”
“칼리가 열매를 들고 먹였으니, 저 아이가 변한 것은 칼리의 욕망 때문이지.”
숲 밖으로 나오자 바람에 코스모스 꽃이 잔뜩 흔들렸다. 그제야 안심한 여우가 땅으로 내려와 우리를 기다린 고양이와 몸을 비볐다.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랑하면 안 되는 이를 사랑한 대가다.”
엘로힘은 여우와 고양이를 내버려 둔 채로 코스모스 꽃밭을 지나쳐 신전으로 향했다. 그에게 안긴 채로 이 길을 지나는 것은 이번이 벌써 두 번째였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진 하늘과 불투명한 종이가 잔뜩 흩날리는 광경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엘라하는…….”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은 겁니까?”
“그는 나와 다르단다.”
신전으로 걸어가는 엘로힘의 긴 머리카락이 노을에 물들어 다홍색으로 보였다. 마치 보석처럼 예뻐서 만지고 싶었지만, 몸은 여전히 꿈적도 하지 않았다.
“엘라하는… 칼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오랫동안 믿고 의지했으며 가족이라고 여겼다.”
서재에서 쉬지 않고 기록을 하고 있을 엘라하가 떠올랐다. 그는 지금도 나를 보고 있을까?
“누구보다도 칼리의 죽음을 원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칼리를 사랑하고 있단다.”
“…….”
“칼리에게서 받은 상처를 평생 안고 가겠지.”
신전 안의 방으로 돌아온 엘로힘이 나를 침대에 눕혔다. 뻣뻣하게 굳은 팔을 억지로 들어 올리자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동굴 근처에서 피어나는 꽃에는 마비 효과가 있단다. 1시간 정도만 지나면 자연히 풀리니 억지로 움직이지 말고 쉬렴.”
“알겠습니다.”
“여우를 구해 줘서 고맙구나. 네가 아니었으면 분명 죽었을 거다.”
“갑자기 거기는 왜 들어간 걸까요?”
“글쎄… 네가 쉬는 동안 알아보마. 겸사겸사 혼도 내고.”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은 엘로힘이 내 이마를 몇 번 토닥이고는 방을 나갔다.
***
피이익. 피익.
배를 보인 채로 식탁 위에 누워 있던 여우가 나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울었다. 그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안심됐다.
“상태는 좀 어떠니?”
“멀쩡합니다.”
주방에서 완성된 요리를 가져오는 엘로힘에게 가볍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여우가 내 손 근처로 총총 걸어와 발라당 엎어졌다.
피이이. 피이익. 픽.
“왜 이래?”
그간 서로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했던 터라 여우의 행동이 영 어색했다. 하지만 내가 슬쩍 손을 피해도 녀석은 계속해서 보란 듯이 다가와 비비적거렸다.
“네가 구해 줬잖니, 세현아. 그러니 좋아할 수밖에.”
부담스러운데….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여우를 잠시 응시하다가 코끝을 쭉 밀어냈다.
“혼낸 거 맞습니까? 엄청나게 신나 보이는데요.”
“으음. 혼내긴 했는데…. 저 어린것을 때릴 수도 없으니 제대로 혼내기 힘들더구나.”
“그건 그렇네요.”
여우가 코끝을 밀어내는 내 손가락을 가볍게 물었다. 자국이 남았던 저번에 비하면 장난스러운 수준이었다.
“숲은 왜 들어간 거죠?”
“여우가 힘들게 태어났다는 이야기, 기억하니?”
“네.”
“형제 중에서 혼자만 투명화를 못 쓰는 게 어지간히 신경 쓰인 것 같구나. 그 힘을 깨우치기 위해 숲에 들어간 것을 보면. 이곳은 모험할 만한 장소가 그 숲 말고는 없으니.”
“참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쪼그마한 애가 하긴 뭘 한다고. 나는 일부러 여우의 말랑한 볼을 잡고 쭉 잡아당겼다. 피이익! 여우가 놓으라는 듯이 버둥거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여우를 괴롭히는데, 발목 부근에서 보드란 털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서 내려다보니 동글동글한 몸을 가진 자그마한 토끼가 코끝을 움찔거리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
오랜만에 만나는 토끼였다. 양 앞발을 들어 올린 채로 귀를 쫑긋거리던 토끼가 폴짝 뛰어서 의자를 밟고 식탁 위로 올라왔다. 여우처럼 날아다닐 줄 알았는데.
형제기는 해도 겉모습이 다른 것처럼 성격도 가지각색인 모양이다. 다리를 모으고 앉아 풍성한 꼬리를 살랑이는 여우에게로 토끼가 깡충깡충 다가갔다.
하얗고 폭신한 애들이 모여 있으니 좀 귀여웠다. 흐뭇하게 웃으며 구경하는데, 앞발을 들어 올린 토끼가 그대로 여우를 향해 휘둘렀다.
빠악―!
“헉…!”
피이익! 피이익!
묵직한 타격 음에 기겁하자마자 얻어맞은 여우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토끼는 다시 한 번 더 앞발을 들어 올렸다.
“자, 잠깐! 잠깐만!”
또 때릴 기세라 허겁지겁 울고 있는 여우를 품에 안았다.
“갑자기 뭐야?”
내 외침에 엘로힘이 밝은 얼굴로 설명했다.
“아무래도 동생을 혼내러 온 모양이다.”
“아니, 그래도 이 작은 애한테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피이이이.
내가 제 편을 들어 주는 걸 아는지, 여우가 내게 찰싹 달라붙어서 서럽게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식탁에서 그런 나와 여우를 조용히 응시하던 토끼가 이번에는 발을 쿵쿵 굴렀다.
“더 때려야 하는데 세현이 네가 막아 줘서 불만이라고 하는구나.”
“아니… 혼낼 수는 있는데 머리를 때리는 건 조금. 예전에 듣기로 머리 때리면 뇌세포가 죽어서 더 멍청해지는…….”
쿵! 쿵!
열심히 핑계를 대 봤지만 토끼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더욱 열심히 발을 구르는 모습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짜증이 엄청 난 것 같다.”
“엘… 상황 중계는 이제 됐으니까 말려 주시면 안 됩니까?”
“이런, 미안하구나. 재밌어서 그만.”
토끼를 번쩍 들어 올린 엘로힘이 창밖으로 훌쩍 던졌다. 문제없이 공중을 날아오른 토끼가 나를 한번 째려보고는 유유히 신전을 떠나갔다.
“무섭네요.”
“다른 형제보다 유난히 호전적인 아이지.”
“그런데 겉모습은 토끼군요.”
“음? 토끼라서 더 어울리지 않니?”
자신을 혼내던 형제가 갔음에도 여우는 내 어깨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토끼에게 얻어맞은 머리를 앞발로 매만지는 것을 보아 아직도 통증이 남아 있는 듯했다.
“토끼라는 생명체는 아주 오래전부터 성격이 나빴단다. 귀여운 외모와는 다르지.”
“그, 그렇습니까? 몰랐네요.”
“현실적인 생태계를 생각해 보면 여우는 당연히 못 이기긴 한다만… 아무튼 저 아이가 제일 엄한 성격이라 그런가, 형제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꼭 와서 혼내고 가더구나.”
사람과 다른 바가 없군. 픽 웃으며 아직도 어깨에 달라붙어 있는 여우의 목덜미를 붙잡아 식탁으로 내려 줬다.
“이번에는 놀라서 막아 줬지만, 다음엔 국물도 없어. 혼날 짓 한 건 맞잖냐.”
“그렇지. 다시는 그 숲에 들어가면 안 된다, 여우야.”
피이이이…….
나와 엘로힘이 동시에 잔소리하자 여우가 네 개의 귀를 축 늘어뜨리더니 내게서 몸을 휙 돌렸다. 가지가지 하네, 정말.
“그러고 보니 해 줄 말이 있단다, 세현아.”
“예?”
“내게 물어볼 것이 하나 더 있지 않니?”
무슨 얘기인지 몰라서 멀뚱히 바라보자 엘로힘이 입꼬리 끝을 올렸다.
“D17 구역 게이트에서 발견한 문양 말이다. 정체가 궁금할 텐데.”
“아.”
하태헌과 함께 가서 발견한 지하 문양. 나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물론 알고 싶습니다. 무기가 존재하는지, 얻을 방법이 있는지도요.”
“네 예상대로 무기가 존재하는 건 맞다.”
눈꼬리를 접으며 환하게 웃은 엘로힘이 덧붙여 말했다.
“다만 얻기 위해서는 내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구나.”
“엘의 도움이요?”
“그래.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그 게이트 지하로 통로를 연결할 테니 가 보자꾸나. 나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