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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88)화 (188/394)

188화 

  

조용한 날이 빠르게 흘러갔다. 천사연과 엘로힘이 예상했듯, 프라우스 신도단이 세계 각지에서 활동했지만 걱정할 만큼 큰 사고는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프라우스 신도단을 세우고 그들을 관리하는 칼리의 하수인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의미였다.

“지금으로서는 변수에 좀 더 집중하는 편이 좋겠구나.”

“변수요?”

“그래. 변수는 언제나 있었지만, 이번만큼 짐작하기 어려웠던 적은 드물었지. 세현아, 네 존재도 물론 변수지만…….”

잠시 말을 끊은 엘로힘이 선명한 금색 눈동자를 반짝 빛냈다.

“그보다는 강승건이라는 그 인간이 더 신경 쓰이는구나.”

한국의 길드 관리 본부가 습격당하고 시간이 제법 지났다. 엘로힘과 엘라하의 대가는 일주일 전에 끝이 나서 몸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였다.

“데려간 이유는 아직 정확히 모르긴 하죠. 그래도 신체만 S급이고 능력은 쓸 수 없으니 그다지 위험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아니. 나는 강승건이라는 자가 끼어들면서 생긴 사소한 변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걱정하는 거란다.”

“아.”

“사실 제대로 따지자면 강승건 말고도 많지. 인생이 바뀐 인간들 말이다. 네 주변에도 몇 명 있지 않니?”

엘로힘의 말에 하태헌과 김우진이 떠올랐다. 그들의 달라진 삶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몇 번이고 생각해 본 적 있었지.

“나비 효과. 그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시간이 반복될 때마다 오차 범위는 조금씩 있었지만, 이번은 그게 워낙 크니 미리 각오해 두는 게 좋아 보인다.”

“…….”

“우리가 짐작하지 못한 인물이 등장할 수 있어. 그리고 그건 굉장히… 위험하겠지.”

“그렇다 해도…….”

이곳에서 지내면서 내가 가진 능력의 힘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또한, 세계와 엮인 이들이 각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버텨 내고 있는지도.

“어떻게든 이겨 낼 겁니다.”

예언자를 만나러 가겠다고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사실들이다. 그리고 그랬다면 천사연의 실패와 동시에 나도 조용히 사라졌겠지.

“왜 제게 사탕을 줬는지 이제는 이해합니다.”

하태헌이 떠난 날, 나를 신전에 데려온 엘로힘은 70일 동안 사탕을 먹고 꿈을 꾸는 것을 두 번째 대가로 내세웠다.

그때는 칼리를 막아서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결국 제가 살기 위해서라도 이 능력이 필요했군요.”

눈이 회복되어 내가 하는 생각을 모두 볼 수 있는 엘로힘이 쓰게 웃으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애정이 묻어나는 그 손길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설명해 주셨으면 대가가 아니더라도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럴 순 없단다.”

그의 새하얀 손이 얼굴로 내려와 뺨을 간지럽혔다. 꽃향기가 약하게 풍겼다.

“네가 능력을 자각하기를 바란 것은 우리였으니 당연히 정당한 값을 치러야지.”

“…제가 죽지 않기를 바랍니까?”

“물론이란다. 나뿐만 아니라 엘라하도 마찬가지지.”

눈가와 볼을 쓸다가 마지막으로 입술을 매만지던 엘로힘이 손을 거뒀다.

“그건 특별한 게 아니란다, 세현아. 네가 이곳으로 건너와서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 왔는지 봤다면… 우리처럼 네가 죽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랄 거다.”

“…….”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퍼지며 미약하게 울렁거렸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부끄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눈을 깜빡이며 겨우 감정을 갈무리한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기다려 준 엘로힘이 곧 입을 열었다.

“사탕은 더 먹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그래도 되나요?”

“저번에 꾼 꿈이 12번째이니 이제 충분하구나. 기운의 색도 검정에 가까울 만큼 짙어졌다.”

“아…….”

“물론 사탕을 먹지 않아도 과거의 꿈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그래도 굉장히 드물 테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란다.”

“하지만 아직 70일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사탕은 먹지 않더라도 남은 시간은 여기에서 계속 지내야 한다. 70일이 채워졌을 때, 한국으로 돌아가는 통로를 열어 주마.”

70일이 채워지기까지 남은 기간은 앞으로 열흘 정도. 워낙 정신없이 지내서 그런가, 길게만 느껴졌던 70일이 끝나 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과거를 보는 것도 한동안은 없겠네…….’

그래도 마지막 꿈이 연선우라서 다행이었다. 과거의 꿈은 언제나 고통스러웠지만, 그리운 얼굴들을 볼 기회이기도 했으니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여러모로 복잡해진 나처럼 엘로힘이 드물게 미소를 띠지 않은 얼굴로 꽃잎이 흩날리는 신전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도 다시 조용해지겠구나.”

쓸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가 내게 조용히 알려 주었다.

“떠날 준비는 미리 끝내 놓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세현아.”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엘로힘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

새파란 하늘 아래로 불투명한 종이들이 나부끼는 게 보였다. 발아래로 보이는 은회색 꽃을 꺾었다.

“…….”

떠날 준비라고 해도… 애초에 가져온 짐이 있지도 않았다.

한국을 떠나오며 필요한 물건들은 모두 하태헌이 직접 준비하고 관리했다. 그러니 하태헌이 떠난 순간부터 나는 이 몸 하나와 팔찌 말고는 아무것도 지닌 게 없었다.

‘옷도 엘이 준비해 준 걸 입은 지 오래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엘로힘과 엘라하와 마찬가지로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다. 물론 이렇게 밖으로 나올 때는 어쩔 수 없이 신었지만.

처음에는 맨발로 신전 내부를 돌아다니는 게 제법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괜찮아졌다. 70일은 그만큼 길고도 짧았다.

갑자기 얻게 된 여유를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심코 꺾어 버린 꽃을 버릴지 말지 고민하며 바라보는데 발밑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우웅.

꼬리를 바싹 치켜세운 새하얀 고양이였다. 하태헌을 예언자에게로 안내했던 그 고양이. 언제나 내 주변을 맴도는 여우와 달리 고양이나 토끼는 여기까지 들어오지 않은 터라 아주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여우랑 형제라고 했으니 그 아이를 찾아온 건가? 그러고 보니 오늘 온종일 여우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다른 곳으로 놀러 갔나.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멀뚱히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고양이가 다시 한 번 더 울었다.

아욱. 액.

“……?”

뭔가 내게 바라는 것이 있는 기색이었다. 여우와 닮은 검은 눈동자를 반짝 빛내며 고양이가 꼬리 끝을 살랑 흔들었다.

아우. 아우우웅. 아우으.

“뭐라고?”

고양이가 열심히 떠들었지만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여우는 뭔가 의사소통은 되는 느낌이었는데, 얘랑은 영 힘드네.

애액. 앵.

커다란 눈을 몇 번 깜빡인 고양이가 훙, 하며 숨을 내쉬더니 내 바짓단을 이빨로 한번 물어 당기고는 앞장서서 총총 걸어갔다. 아무래도 따라오라는 것 같아서 잠자코 녀석의 뒤를 쫓았다.

하태헌이 있었을 때 지냈던 작은 집을 지나 코스모스 꽃밭에 도착한 고양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여우에 비하면 얇고 긴 꼬리가 여러 모양으로 흔들렸다.

아우욱.

그렇게 한참을 걷던 고양이가 드디어 멈춰 섰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어둑한 숲을 바라봤다.

“여긴…….”

하태헌을 한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통로를 열었을 때, 처음 본 그곳이었다. 코스모스 꽃밭 끝에 도달하면 나타나는 지나치게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의 숲.

오래된 나무들이 얼기설기 엉켜 있는 숲의 입구를 응시하던 나는 고양이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우웅….

고양이가 미어캣처럼 서서 슬프게 울었다. 앞발을 모으며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모양새에 눈가를 좁혔다.

“설마…….”

상황을 파악한 나는 급히 바람을 이용해 몸을 띄웠다. 주렁주렁 내려온 수풀과 덩굴을 치워 내며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섬뜩한 감각이 느껴졌다.

역시 평범한 숲이 아니다. 밝은 밖과 달리 숲 안쪽은 빽빽한 나무들로 빛 한 점 들지 않았다. 무거운 공기에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하아…….”

갑갑한 숨을 내뱉으며 조금씩 아파져 오는 이마를 매만졌다. 들어온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몸 상태가 순식간에 나빠졌다. 어깨가 무겁고 기운의 움직임도 평소보다 둔했다.

엘로힘의 말대로라면 이 숲도 만들어진 공간에 포함된 거겠지. 어째서 이런 곳을 없애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는 걸까. 여기를 채우고 있는 나무나 풀도 생명이라서?

기괴한 생김새로 자라난 버섯이나 식물을 본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이해가 안 된다.

‘어디 있는 거야, 대체.’

숲 안쪽이 예상보다 넓은 데다 없어진 녀석은 체구가 워낙 작아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두통은 갈수록 심해져 돌아다니는 것이 더욱더 힘들었다.

피이익.

끝도 없이 이어진 나무를 따라 깊은 곳으로 한참을 더 들어가서야 낯익은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꽃이 가득 핀 동굴 앞이었다.

피이이이. 피이익.

나를 발견한 여우가 바닥에 몸을 바싹 붙인 채로 열심히 울기 시작했다. 혀를 차며 재빨리 녀석에게로 날아가 상태를 확인했다.

“이게 뭐지?”

힘겹게 몸을 비틀며 가르릉거리는 여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허리가 묶여 있었다. 검 보랏빛의 질척한 체액으로 뒤덮인 그것은 덩굴처럼 단단했다.

손으로는 아무리 잡아당겨도 풀리지 않아 결국 바람을 이용해서 잘라 내야 했다. 꿀럭, 깔끔하게 잘려 나간 단면에서 검은 액체가 쏟아졌다.

피이익.

제 몸을 구속하던 것이 사라지자 여우가 황급히 내게 달려왔다. 팔을 타고 어깨에 올라선 녀석은 풍성한 꼬리를 실랑이며 내 볼에 머리를 비볐다. 대충 고맙다는 인사인 모양이다.

“막내니까 봐주는 거야. 이따 나가면 네 형제한테도 고맙다고 해라.”

그 고양이가 아니었으면 여기 있는 줄도 몰랐을 거다.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뭔지 여우가 눈을 깜빡이며 피익, 울었다.

“가자…….”

더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 무거운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던 그때였다.

“윽……!”

주변에 가득 핀 보랏빛 꽃에서 꽃가루가 동시에 팍 터져 나왔다. 수많은 꽃가루가 반짝거리며 시야를 가렸다. 눈앞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몸에 힘이 풀렸다.

“흐…….”

식은땀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주저앉은 채로 짙은 어둠이 가득한 동굴 저편을 마주했다. 허억, 헉. 내가 내뱉은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꽃가루에 독이 있나? 그래서 몸이 마비가…… 안 돼. 두통이 너무 심해서 생각이 자꾸만 끊겨…….

피가 차갑게 식고 어깨가 바싹 굳었다. 쿠궁, 땅이 울리며 동굴 속 어둠 너머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짧은 순간 스치듯 보였다. 심장이 아플 만큼 공포가 밀려들었다.

‘…위험하다.’

여우를 붙잡았던 덩굴이 내 두 발목을 옭아맨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강한 힘이 나를 조금씩 동굴 쪽으로 당겼다.

“도망가!”

황급히 어깨 위에 있는 여우를 밀치며 외쳤다. 일단 여우부터 떨어트리고 덩굴은 다시 바람으로 잘라 내면…….

“……!”

갑자기 두 다리가 흙 속으로 훅 빨려 들어갔다. 종아리까지 검은 흙에 잠겨 발목에 감긴 덩굴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공격을 할 수가 없다.

계속해서 내 몸을 끌어당기는 힘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버둥거리던 그때였다.

“그만.”

새하얀 빛과 함께 싱그러운 향이 훅 퍼졌다. 몸을 낮춘 엘로힘이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서늘한 얼굴로 동굴 안쪽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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