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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86)화 (186/394)

186화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벚꽃과 개나리가 잔뜩 핀 산책길로 들어섰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부나 사진을 찍는 커플이 종종 보였다.

“정장에 구두 신은 데다 피곤할 테니까 많이 걷지는 말고… 저 앞까지만 가죠.”

“마음대로 해.”

“다음에는 편한 옷 입고 와요.”

자연스럽게 미래를 약속하는 연선우의 말간 얼굴을 잠시간 바라봤다.

“출출하지는 않아요?”

“괜찮아.”

환하게 핀 개나리 너머로 새파란 하늘을 담은 성내천이 보였다. 그 물길을 따라 연선우와 쭉 걸었다.

“요즘 시험 기간이거든요.”

내가 얌전히 옆에 붙어서 따라오자 기분 좋은 듯 미소 지은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도 열심히 공부했더니 머리가 막 아픈 거 있죠. 형님이랑 데이트라도 해야 버티겠다 싶더라고요.”

“네가 무슨 공부를 열심히 해.”

“어어? 이거 섭섭한데. 저 머리도 완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성적 장난 아니에요.”

“매일같이 술집 드나드는 놈의 말을 어떻게 믿냐.”

“어떻게 사람이 온종일 공부만 해요? 쉬는 시간도 있는 거지.”

“…….”

연선우는 왔다 하면 새벽 2시까지는 내 곁을 얼쩡거리다가 돌아갔다. 시간으로 따지면 5시간은 가볍게 채우는 건데, 쉬는 시간치고는 너무 길지 않나.

“그 표정은 뭐예요?”

“내 표정이 왜?”

“지금 저 한심하게 보는 것 같아서요.”

“그럴 리가. 네 착각이야….”

시선을 슬쩍 피하며 괜히 헛기침했다.

한심하다고는 생각 안 했지만… 듣기로 대학생은 엄청 바쁘고 공부할 것도 많다 그러던데, 녀석은 놀기만 하니까 걱정되기는 했다. 심지어 또래랑 어울리는 것도 아니고 자꾸 조폭 아저씨를 찾아오니까.

연선우가 왜 자신을 이렇게 챙기는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냥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이 갖고 싶은 건가?

‘형제는 누나 한 명 있다고 했지.’

형이나 삼촌이 갖고 싶은 거라면 자신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해 줄 자신이 없었다. 일단 가족이 남아 있지도 않은 데다 형제라고는 평생 가져 본 적도 없으니.

“날씨 진짜 좋다. 오길 잘했죠?”

한 걸음 앞서 걸으며 나를 보고 웃는 연선우는 봄 햇볕처럼 따스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친구가 없는 거라면? 이런 재미없는 아저씨 끌고 꽃구경을 올 만큼 마음을 두는 상대가 없다면?

‘왕따라도 당하는 건 아니겠지?’

대학생들이 왕따? 어린애들도 아니고 설마 성인인데 왕따를…….

설마 하는 마음이었지만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그러고 보니 듣기로 부잣집 애랑은 친해지기 어렵다고 하던데.

첫 만남을 떠올려 보면 연선우는 분명 돈 좀 있는 집 자식이 확실했고, 성격도 예민한 구석이 좀 있으니까…….

“형님?”

“어?”

“뭐예요? 갑자기 멍하니 서서.”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혼자 밥을 먹는 연선우를 상상하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많이 피곤해요?”

“…아니, 괜찮아.”

오히려 방금 한 상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나를 보는 녀석의 검은 눈동자에 미안한 기색이 점차 담기기 시작했다.

멋대로 끌고 와 놓고 이제 와서 후회하면 어쩌냐.

정말로 괜찮다고 재차 말하려는데 낯선 목소리가 나와 연선우 사이를 끼어들었다.

“저기…….”

머뭇거리며 다가온 이들은 내 어깨에도 못 올 만큼 아담한 키의 여자 두 명이었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나와 연선우 눈치를 살피던 한 명이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괘, 괜찮으시면 사진 좀 찍어 주실 수 있나요?”

사진? 단어만으로도 자신감이 사라진 나는 연선우에게 알아서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좋아요.”

녀석이 나를 볼 때와 달리 시큰둥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긴장한 것도 잊고 발랄하게 대답한 여자 둘이 까르륵 웃으며 벚나무 아래로 달려가 팔짱을 꼈다.

“찍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아 커다란 키를 낮춘 연선우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찰칵, 찰칵 울리는 소리에 맞춰 가지각색 포즈를 취하는 그들을 구경했다.

“어머, 너무 잘 찍혔다!”

“솜씨 좋으시네요.”

핸드폰을 돌려받고 결과물을 확인한 둘이 연선우에게 엄지를 세우며 칭찬을 했다.

“그럼 저도 부탁 하나만 할게요.”

묘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들을 응시하던 연선우가 이번에는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며 내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이번에는 우리 좀 찍어 주세요.”

“오, 좋아요!”

“얘 사진 진짜 잘 찍어요.”

“잠깐…!”

사진이라니. 기겁하는 나를 벚나무 아래로 억지로 끌어당긴 연선우가 어깨에 팔을 두르며 싱글벙글 웃었다.

“이왕 왔는데 사진 한 장 정도는 찍어야죠. 아쉽잖아요.”

“아니, 나는 사진은 좀…….”

“찍을게요~!”

“형. 앞을 봐야죠.”

“김치~!”

당황해서 열심히 싫다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핸드폰을 건네받은 여자는 엄청나게 신기한 자세로 사진을 마구 찍기 시작했다.

“두 분 다 잘생기셔서 그런가, 사진이 너무 잘 나왔어요!”

“맞아요. 완전 화보 같아. 두 분 혹시 모델이세요?”

“일반인입니다. 고마워요.”

사진 촬영에 모든 기가 빨려 버린 나는 지친 숨을 내쉬었다. 핸드폰을 돌려받은 연선우는 여자들이 떠나자마자 갤러리를 열고 사진을 확인했다.

“와, 형님. 이것 봐요.”

사진을 훅훅 넘기던 연선우가 눈을 반짝 빛내며 내게 몸을 붙여 왔다.

“잘 찍는다더니, 제법 나쁘지 않은데요. 그렇죠?”

핸드폰 화면 가득 사진이 떠올랐다. 적당히 흩날리는 벚꽃잎 사이로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연선우와, 그런 녀석을 보며 미소 짓고 있는 내가 보였다.

“…….”

내가 사진 찍을 때 웃었던가. 그저 곤욕스러웠던 기억 말고 떠오르는 게 없는데.

보고 있자면 기분 좋아지는 연선우에 비해 나는 너무나도 멍청해 보였다. 지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연선우는 이 사진이 퍽 마음에 드는지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응, 진짜 좋네….”

“난 별로.”

“다른 사진들도 다 괜찮은데, 이게 최고예요. 사진 보내 줄게요, 형.”

안 보내 줘도 되는데… 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즐거워하는 녀석의 기분을 굳이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걷고 돌아가요.”

연선우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었다. 우리 옆으로 어린아이들이 신나게 떠들며 지나쳐 갔다.

솨아아, 강한 바람에 길을 따라 양쪽으로 나 있는 벚나무가 잘게 흔들리며 벚꽃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그 사이에서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 연선우가 보인다.

화창한 햇빛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이 황금처럼 빛났다. 내게 새하얀 손을 뻗은 그가 이마 부분을 부드럽게 쓸어 만졌다.

“벚꽃잎이 붙어서요.”

넋을 놓고 연선우를 바라보던 나는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숙였다. 녀석이 잡은 연분홍색 작은 벚꽃잎이 계속해서 어른거렸다.

***

“여기 맞아요?”

“어.”

꽃구경을 끝낸 연선우는 약속대로 나를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었다. 차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들어올 정도로 좁은 골목길 끝으로 가파르게 이어진 계단이 나타났다.

나를 따라 차에서 내린 연선우가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집이 저 위는 아니죠?”

“맞는데.”

“네?”

픽 실소하며 담담하게 대꾸하자 녀석이 당황하며 나와 계단을 번갈아 봤다.

“아니, 왜요? 가게도 갖고 있으면서.”

“내 것 아니다. 난 그냥 일개 관리인이야.”

“아무리 그래도요. 영업 잘되던데, 돈 많이 받을 거 아니에요.”

“돈…….”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하게 서며 생각했다.

당연히 받긴 하지만 딱히 쓸데도 없고. 어차피 필요한 건 그 남자가 다 구해 주니까.

이런 부분까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진 않다. 그래서 대신 말을 돌렸다.

“왜, 가진 거 없는 거지라서 실망했냐?”

장난기를 숨기지 않고 묻자 연선우도 눈가를 좁히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실망을 왜 해요? 오히려 좋은데.”

“뭐가 좋아.”

“제가 가진 게 많거든요. 형님, 나랑 같이 동거할래요?”

“얼씨구.”

하여튼 능청거리는 건 따라갈 수가 없다. 옆으로 다가온 연선우가 차에 상체를 기대며 팔짱을 꼈다.

“비웃네. 진심인데.”

“뭘 믿고 나랑 같이 산다 그러냐. 내가 네 살림살이 다 갖고 튈 수도 있는데.”

“와. 제발 그래 줘요, 응?”

“됐어. 좀 허름하긴 해도 난 여기가 좋다.”

한평생 살아온 장소였다. 물론 불편한 게 없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만….

“방 하나라 좁긴 해도 나름 있을 건 다 있어.”

“…….”

“어차피 잠만 자는 곳이고.”

거처를 옮기고 싶다가도 과거가 끈덕지게 발목을 잡아 왔다. 묘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던 연선우가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들고 계단 위 얼기설기 모여 있는 판잣집들을 응시했다.

“그럼 저도 가 볼래요.”

“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설마 그냥 가라는 건 아니죠? 매너 없게… 커피라도 주세요.”

이 자식이? 나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9시를 훌쩍 지나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1시간이면 된다고 해 놓고 3시간이나 붙잡았으면서, 무슨 커피야.”

“제가 그랬나요? 아무튼 형님이랑 놀면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가라. 커피 같은 거 없으니까.”

“방금 있을 거 다 있다면서요.”

“너 양심이…….”

우우웅―.

오늘따라 자꾸만 붙잡고 늘어지는 연선우의 행동에 한마디 하려는 찰나, 핸드폰 진동 음이 들려왔다. 청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연선우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대로 거절 버튼을 눌렀다.

“전화 온 거 아냐? 받아도 돼.”

“아니에요. 그보다 커피 없으면 라면이라도….”

우웅―.

애써 웃으며 끊긴 얘기를 다시 이어 가려던 연선우의 시도는 두 번째 진동 음에 와장창 깨졌다. 낮게 욕설을 내뱉은 녀석이 결국 전화를 받았다.

“아, 좀!”

[왜 받자마자 짜증이야? 지금 짜증 낼 사람이 누군데!]

“눈치 좀 챙겨. 방금 전화 거절 눌렀잖아.”

[나라고 하고 싶어서 한 줄 알아? 너 어디야?]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려왔다. 연선우가 슬쩍 등을 돌리며 소리 낮춰 대답했다.

“알아서 뭐 하게. 관심 좀 꺼.”

[관심받기 싫으면 알아서 잘했어야지. 점심 일정까지 2시간 남았는데 어디서 뭘 하는 거야?]

“그 전에 알아서 들어간다니까.”

[옷도 갈아입어야 하잖아. 좋은 날에 아버지 또 화나게 하려고?]

“알 게 뭐야, 그 양반 화나든 말든….”

[너 진짜 이럴래? 어디냐니까? 설마 또 그 술집에 간…….]

뚝.

연선우가 황급히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같이 내 눈치를 살폈다.

“…저 일이 생겨서 가야 할 것 같아요, 형님.”

“그러든가.”

“라면은 다음에 와서 먹을게요.”

“준다고 한 적 없는데.”

“이럴 때는 그냥 알았다고 해 주면 안 돼요? 진짜 치사하다니까.”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린 연선우가 운전석에 앉아 차창을 내렸다.

“저 가요.”

“두 번 말 안 해도 돼.”

“예에…….”

전화 한 번으로 금세 시들시들해진 녀석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올려다보는 순한 눈빛에 나는 연선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라면 사 둘게.”

“…….”

연선우가 놀란 얼굴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러고는 새하얀 목덜미와 뺨을 순식간에 붉게 물들였다.

“…이거, 일부러 그러는 거죠…….”

“또 뭐가?”

“나만 고생이지, 진짜. 억울해서…….”

알 수 없는 한탄을 늘어놓은 녀석이 새침하게 쏘아붙이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이따 밤에 봐요.”

또 놀러 올 건가 보네. 그럴 거면서 왜 저렇게 가기 싫어한 건지…….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자동차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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