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47. 끝나 가는 시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흐릿한 의식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눈을 뜬 천사연이 고개를 돌리자 창밖을 보며 전화 통화를 하는 하태헌의 뒷모습이 보였다.
[막 싸우거나 그런 건 아니지?]
“정말 별일 없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핸드폰에서 이주하의 염려 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던 건지 알아챈 천사연이 상체를 일으키며 뻗친 뒷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널 못 믿어서가 아니라, 그… 아무래도 상대가…….]
“예. 무슨 뜻인지 압니다.”
[번거롭더라도 최미진 센터장은 한번 만나고 돌아와.]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하태헌이 천사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무뚝뚝한 얼굴을 마주하며 천사연이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1시간 30분 정도.”
음, 천사연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생각보다 오래 잤다.
‘뭐… 어쩔 수 없지.’
엘로힘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자는 시간을 짧게 잡은 건데, 전혀 짐작하지 못한 상대가 찾아왔으니.
그깟 회의보다 한이결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어차피 회의라고 해 봤자 강승건을 찾아내라는 잔소리가 다였을 거고.
“이제 설명을 좀 듣고 싶은데.”
드물게 삐딱한 표정으로 한마디 뱉어 낸 하태헌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팔짱을 꼈다. 회의 참석은 진작에 물 건너갔으니, 천사연은 목 끝까지 바싹 묶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기며 눈웃음을 지었다.
“미안하군. 자야만 하는 사정이 있어서.”
“설마 그 말 하나로 설명을 끝내려는 건가?”
“자야만 했던 이유가 궁금한 거라면 물론 자세히 설명해 주도록 하지. 일어나면 한 가지는 대답하겠다고 약속했으니.”
무엇을 선택할 거냐는 질문에 하태헌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그 모습을 보며 천사연은 잠시간 갈등했다.
‘한이결을 만났다는 말을…….’
흘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이결을 미끼로 내세운다면 분명 어떤 방법으로 만났는지 물어보겠지.
그렇게 된다면 질문 한 턴을 무마시킬 수 있겠지만….
-서로 이용하는 관계. 그거로 충분하냐고, 천사연.
“…….”
입가를 매만지던 천사연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한이결의 이름을 삼켜 냈다. 그가 고민하는 동안 생각을 끝낸 하태헌이 말문을 열었다.
“프라우스 신도단에 대해서 뭘 알고 있지?”
***
“고생했다.”
천사연과의 꿈이 끝난 이후로도 꼬박 하루를 더 잔 뒤에 일어난 내게 엘로힘이 물이 담긴 잔을 건네줬다.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대화가 잘 안 풀린 모양이구나.”
“조금요.”
잔을 받으며 쓰게 웃었다.
“예상하지 않았니.”
“씁쓸한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천사연, 그 아이는 너무 오랜 시간 혼자였단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협력을 한다 해도 결국 끝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니, 차라리 홀로 감당하는 것을 선택하게 됐지.”
“이해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하지만 갈증은 사라져도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은 여전했다.
“그리고 저도 잘한 건 없습니다. 천사연한테 왜 솔직하지 못하냐고 따질 입장은 아니라서…….”
“네가 천사연을 이해하듯 그 아이도 너를 이해할 거다, 세현아.”
과연 그럴까. 한이결의 과거를 본 후로 천사연이 무슨 마음으로 나를 대하는 건지 더욱 알 수가 없었다.
‘속내를 워낙 잘 감추니까.’
나를 볼 때 짓는 미소, 부드러운 무언가가 담겨 있는 눈동자, 조심스럽게 손목을 잡아 오는 손길까지.
모든 게 나를 이용하기 위해 꾸며 낸 가짜일 수도 있는 건데.
“천사연에게….”
손에 든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 과거를 봐도 되겠냐고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뭐, 서로 이용할 건 이용하겠다고 결론을 내렸으니 보지 말라고 해도 볼 거긴 한데요. 일단 당사자니까 말은 해 놔야 할 것 같아서.”
“아. 그런 의미.”
얼굴을 기울인 채로 말을 듣던 엘로힘이 이어진 말에 그렇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부분은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 세현아.”
“예?”
“보겠다고 얘기했어도 천사연은 마음대로 하라고 했을 거란다. 그 아이의 과거는 이제 자신만의 것이 아니니까.”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고?
“무슨 뜻입니까?”
“천사연은 오래전에 대가로 자신의 과거를 넘겼단다.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의 기록 소유까지도.”
“아…….”
“그러니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쓰든 천사연은 간섭할 수 없다는 거란다.”
그 설명에 나는 엘로힘이 말하는 ‘대가’가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를 두고 엘로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현아, 네가 이곳에 온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구나.”
“그렇네요.”
“꿈은 좀 어떠니?”
“그럭저럭… 해 나가고 있기는 합니다.”
꿈 내용은 언제나 들쑥날쑥했다. 그래서 더 버거웠다. 어떤 내용이 나를 잠식할지 조금도 예측할 수 없으니까.
“미안하다. 도와줄 수 없어서.”
“아닙니다.”
D45 구역 테러와 길드 관리 본부 습격을 겪으며 내가 가진 개입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꿈이 아무리 고통스러워 봤자 결국 과거였다. 현재와 미래를 지켜 내려면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천사연이 그러더군요. 당분간은 조용할 거라고. 정말일까요?”
“흠. 확실히… 칼리의 아이들은 한동안 나서지 않을 것 같구나. 그들은 절대로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지. 무엇보다 이미 몇 번 실패를 겪었으니 더욱 조심할 거다.”
“신도단은요?”
“그들은 다르단다. 보아하니 길드 관리 본부 습격을 신호로 받아들이고 활동을 시작한 것 같은데…. 그래도 칼리의 아이들만큼 위험하지는 않아.”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눈을 내리까는 내게서 빈 잔을 가져간 엘로힘이 입꼬리 끝을 살짝 올렸다.
“그러니 너도 조금은 마음을 놓고 쉬는 것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쉬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엘로힘이나 엘라하인데. 아직도 새하얀 천을 눈에 감고 있는 데다 식은땀을 흘리는 엘로힘의 얼굴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
해가 떠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른 아침, 퇴근을 위해 아래로 내려온 내게 마감을 하고 있던 직원들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형님.”
“그래. 마무리 잘하고.”
“예!”
문 앞에서 대기하던 동주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시끄러웠던 밤과 새벽이 쓸고 지나간 유흥거리의 이른 아침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오랜만에 담배 생각이 나서 근처 편의점이라도 들를까 싶어서 걷는데, 인도에 바짝 세운 검은 차량이 내 보폭에 맞춰 살살 쫓아오기 시작했다.
“……?”
이건 또 뭐야. 하도 다양한 진상들을 봐 온 덕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마자 차창이 아래로 내려가며 운전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안녕, 형님.”
“허.”
청재킷을 걸친 연선우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마치 여자를 꼬시듯 내게 윙크를 보내왔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절로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냐?”
매번 늦은 오후나 밤에 놀러 오던 터라 이른 아침에 녀석을 만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어제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나 기다렸어요?”
“까분다.”
혀를 차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내 속도에 맞춰서 차도 조금씩 앞으로 이동했다.
“미안해서 오늘은 아침부터 왔어요.”
“필요 없어. 다시 가라.”
“나랑 드라이브 가요.”
“드라이브 같은 소리 하네…. 난 집에 갈 거다.”
“아, 형님. 같이 가요. 요즘 꽃이 얼마나 예쁘게 피었는지 알아요?”
“너 학교 안 가냐?”
대학생은 원래 다 이렇게 한가하나? 대학을 다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오늘 공강이에요.”
“좋겠네. 재밌게 놀고 들어가.”
편의점을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대로는 힘들 것 같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담배 욕구를 억누르며 편의점을 지나쳐 대로변으로 향했다.
“형, 집까지 얼마나 걸리는데요?”
“알아서 뭐 하게.”
“제가 데려다줄게요. 진짜 드라이브 조금만! 피곤하면 옆에서 자도 되고.”
“…….”
“형님, 제발요. 1시간만 저한테 주시면 안 돼요?”
“…….”
“아, 몰라. 나는 계속 따라갈 거예요. 큰길가로 나가면 출근하는 차 엄청 많을 텐데. 그러든 말든 계속 천천히 형님 따라갈 거야. 뒤에서 막 빵빵거려도 무시하고.”
“하…….”
안 그래도 피곤한 몸이 연선우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무겁게 축축 가라앉았다.
‘평소에는 이런 적 없는데…. 정말 어지간히 가고 싶나 보네.’
가겠다고 할 때까지 조를 기세라 그냥 빨리 놀아 주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이 조금씩 기운다는 것을 바로 알아챈 연선우가 눈썹 끝을 아래로 내리고는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혀엉.”
“…알겠으니까 그만해.”
한숨을 내쉬며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 그러자 불쌍한 얼굴을 순식간에 없앤 연선우가 싱글벙글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진짜로 자도 돼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운전이나 집중해.”
“네에.”
피로로 눈이 좀 뻐근하긴 했지만, 어린애가 옆에서 운전하는데 잠을 잘 정도로 지친 건 아니었다.
근데 얘 운전도 할 줄 알았나. 영 걱정스러웠다. 설마 얼마 전에 면허 따 놓고 신나서 차 끌고 나온 건 아니겠지?
“목적지가 어딘데?”
내비게이션도 안 찍어 놓고 운전하는 것을 보니 불안감만 더욱 커졌다. 절대로 정신을 놓지 말아야겠군.
“형님 피곤하니까 멀리는 못 가고… 성내천이나 구경하러 갈까요?”
“성내천?”
“네. 잠실나루역 근처요.”
“사람 많겠는데.”
“이른 아침이라 괜찮을 거예요.”
“흐음.”
성내천이라. 한 번도 가 본 적 없다. 아니, 성내천이고 뭐고 봄이 되었으니 꽃구경을 하러 가자는 제안 자체가 처음이다.
확실히 봄은 봄인 게 차창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 제법 알록달록했다. 싸늘한 겨울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져 나가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 맞냐?”
“그럼요.”
잠실나루역이면 여기서 별로 멀지 않기는 한데…….
어째 수상쩍어서 뾰족한 눈초리로 연선우를 쏘아봤다. 잠시 신호가 걸린 틈에 녀석이 내 시선을 알아채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환하게 웃었다.
“…….”
그 웃음을 보니 이상하게도 의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먼저 고개를 돌린 나는 차창에 이마를 툭 기대며 생각했다.
그래. 이미 탔는데 뭘 어쩌겠어. 오늘 하루만 좀 참고 놀아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