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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84)화 (184/394)
  • 184화 

    엘로힘의 도움으로 꿈속으로 들어온 나는 저번과는 다른 장소를 눈에 담았다.

    안개가 가득 껴 있고 파도가 치던 절벽이 아닌 널따란 초원과 새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처음 엘로힘을 만난 꿈과 무척 흡사했다.

    파삭.

    맨발 아래로 부들부들한 풀이 밟혔다. 발목을 간지럽히는 노란 꽃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드니 저편에 장신의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몸에 딱 맞는 스리피스 슈트를 입은 천사연이었다. 드물게 환한 회색빛 재킷을 걸치고 있는 그는 중요한 자리의 참석을 앞둔 것처럼 보였다.

    “이게 진짜 되네…….”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를 들은 천사연이 곧장 뒤를 돌아봤다.

    “천사연.”

    나를 응시하는 천사연의 검은 눈동자가 어딘가 멍했다. 왜 저러지? 그가 저토록 경계심을 흩트린 모습은 처음이었다.

    “뭐… 회의라도 잡혔냐?”

    어쩐지 어색한 감정이 밀려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물으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평소와 같은 미소를 띤 천사연이 입을 열었다.

    “바로 맞췄군. 길드 관리 본부 회의다. 건물이 무너졌으니 근처 호텔로 장소가 변경됐지.”

    “아아… 그럼 빨리 가야 하나?”

    물어볼 게 많은데. 염려하는 나를 향해 천사연이 꽃처럼 웃었다.

    “아니. 회의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다행이네.”

    “그보다 이제는 좀 가까이 왔으면 좋겠는데. 대화하기에는 먼 거리지 않나?”

    천사연이 나를 향해 손짓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가까이 가려던 나는 이내 생각을 고쳤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이전부터 나를 대표실로 불러 댔으면서 여기서도 오라 가라 그러네. 깨닫고 나니 억울하기 그지없다. 내가 꿈에서까지 이래야 하나?

    “불만이면 네가 와라.”

    “음?”

    “무슨 키우는 개 부르는 것도 아니고…….”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입가를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던 천사연이 표정을 사르르 풀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맞는 말이네.”

    “…….”

    “내가 갈게, 한이결.”

    웬일로 순순히 내게 동의한 그가 망설이지 않고 내게 걸어왔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넋을 놓고 눈만 깜빡이는데, 팔찌가 채워진 손목을 살살 쓰다듬으며 쥐어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한이결.”

    “…어?”

    “이제 설명을 해 줄 때가 된 것 같군.”

    “무슨 설명?”

    내 손보다 훨씬 큰 천사연의 손이 손목을 온전히 덮어 왔다. 이걸 뿌리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내게 천사연이 이어 말했다.

    “어떻게 꿈에 들어올 수 있는지. 이런 힘은 예언자, 그들도 갖고 있지 않을 텐데.”

    “그건…….”

    내 ‘개입’ 능력이 가진 힘이었지만, 이걸 설명하려면 한이결 몸에 들어온 것까지 얘기해야 한다.

    ‘물론 내가 진짜 한이결이 아니라는 것은 진작 눈치챘겠지만…….’

    그래도 쉽사리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부분이었다. 금방 끝나 버릴 꿈속에서 알려 주기는 더더욱 싫었고.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결국 여러 번 생략을 거친 간략한 답을 내놨다.

    “내 새로운 능력이야.”

    “능력?”

    “그래. 바람 능력처럼.”

    그가 묘한 눈빛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새로운 능력이라….”

    그 모습에 문득 천사연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한이결의 책에서 봐 온 대로라면 내가 새로 얻은 능력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가늠해 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기분은 좀 나쁘지만, 어차피 천사연을 도와야 나도 살 수 있으니 무슨 능력이냐고 물어보면 대충이라도 둘러대야….

    “새 선물이 필요하겠군.”

    “뭐?”

    “이 팔찌.”

    쥐고 있던 내 손목을 조금 들어 올린 천사연이 팔찌 중앙에 박힌 붉은 보석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새로운 능력까지 쓰려면 A급 기운 회복 아이템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

    “가진 기운이 적어서 바람 능력 하나에도 힘들어하지 않았나? 다른 능력까지 생겼으니 기운 회복이라도 더 잘되는 거로 써야지.”

    “내 기운은 A급 평균이야.”

    잘못된 부분을 정정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정말 예상 못 했는데.

    “아이템은 됐어.”

    “흠. 그러면 기운 회복 말고 다른….”

    “무슨 능력인지 안 물어보냐?”

    일부러 물어볼 기회를 주는데도 자꾸 딴소리하는 천사연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궁금하잖아.”

    “궁금하지.”

    “근데 왜 안 물어보는 거야?”

    나는 목소리를 무겁게 내리깔았다.

    “나였으면 물어보고 어디에 써먹을지 따져 봤을 텐데.”

    먼 곳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오며 풀잎 스치는 소리가 가득 퍼져 나갔다. 바람이 멈출 때까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던 천사연이 이내 얼굴을 살짝 숙이며 입꼬리 끝을 올렸다.

    “의외네.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나?”

    “헛소리 그만하고.”

    “아니, 진심인데.”

    천사연이 무슨 의도를 가진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날카로운 시선을 받아 내던 천사연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 볼 것 없어. 정말로 별다른 이유는 없으니.”

    “말해.”

    “뭐, 보아하니 물어봤자 고분고분 알려 줄 것 같지도 않고.”

    그건… 그렇지.

    “숨기고 있는 건 나도 많지.”

    그것도… 그렇네.

    “내가 이전에 했던 말 기억하나?”

    천사연이 옅은 바람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내 눈꼬리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우리는 서로 히든카드를 숨기고 눈치 보는 입장이라고 했었는데.”

    “그게 언제 적이야.”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기본적인 것은 똑같아. 서로의 히든카드를 예측하고, 발견하고, 이용하는 거.”

    “그때나 지금이나 짜증 나는 말이네.”

    자꾸만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천사연의 손을 쳐 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한이결의 몸에 들어간 네 정체가 뭔지, 어떻게 하태헌의 코트를 얻어 냈는지, 예언자들과 지내면서 어디까지 봤는지… 알고 싶은 거야 많다만.”

    “…….”

    “굳이 싫다는 널 억지로 몰아세워서 가짜 대답이나 들을 정도로 궁금하지는 않다는 거다. 물론 우연히 발견하면 즐겁긴 할 거고.”

    “한마디로 이용하는 데 문제만 없다면 굳이 알아낼 마음도 없다는 건가?”

    “이런. 내 절절한 마음을 너무 편협하게 축약시키는군.”

    내 말에 천사연이 난감한 반응을 보였지만, 끝내 아니라는 부정은 하지 않았다.

    나는 착잡함에 입 안이 쓴 것을 느끼며 마른 숨을 삼켜 냈다.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 하지만 역시 직접 들으니 심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나도 천사연도 끝까지 솔직해지지 못했다. 서로 숨기고 있는 것이 워낙에 큰 탓이었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정말 그거로 되겠어?”

    설마 내가 재차 물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천사연이 살짝 당황했다.

    “서로 이용하는 관계. 그거로 충분하냐고, 천사연.”

    “…….”

    그가 한참을 입술만 달싹이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복잡함을 담고 일렁이던 검은 눈동자가 이내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조금은 기대를 품고 있던 나도 그 단호한 대답에 마음을 접었다. 관계를 재정립할 기회는 그렇게 아무 변화 없이 끝이 났다.

    “알았어.”

    잡힌 채로 줄곧 내버려 뒀던 손목을 힘주어 빼내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길드 관리 본부 상황은? 건물이 완전히 무너졌던데.”

    내 손목을 놓친 천사연이 잠시간 눈을 깜빡이다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미진 센터장이 대처를 잘하기는 했지만… 사망자는 꽤 있어. 대부분 지하 연구실 직원이더군.”

    역시 그런가.

    “직접 봤나?”

    기록된 책을 통해 본 거냐는 의미가 담긴 질문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하태헌 씨는 게이트 이후로 좀 어때?”

    “틈만 나면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지.”

    “…그 사람이? 너를?”

    “게이트 습격을 겪고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더군. 덕분에 요즘 도망 다니느라 아주 바빠.”

    장난기가 담긴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진심으로 재밌어하고 있잖아.

    하태헌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 난리를 겪었는데 당연히 궁금하겠지.

    “하태헌 씨한테 설명해 줄 생각 없어?”

    “글쎄.”

    “최소한 납득할 정도만이라도. 이미 봐 온 게 있으니까 충분히 믿어 줄 텐데.”

    “그렇겠지.”

    천사연이 또다시 아득히 먼 과거 어딘가를 헤매는 공허한 눈을 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믿기 힘든데.”

    “너무하네.”

    어깨를 으쓱인 천사연이 심드렁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하태헌에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일은 지겹도록 해 왔어. 그러니 알아.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겠어.”

    염려스럽기는 해도 둘 사이의 문제는 둘이 알아서 하도록 두는 편이 낫겠지.

    “프라우스 신도단 동태는 어떻지? 범죄율이 늘어난 걸 보면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잖아.”

    “한바탕 크게 일을 쳤으니 당분간은 조용할 거야. 범죄율이 늘어난 건… 어쩔 수 없지. 수습이라도 잘해 보는 수밖에.”

    천사연의 대답에도 불안한 마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정말 뭔가 조치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평범한 사람들이 도태된 존재라고 믿는 위험한 사상에 현혹된 자들이었다. 만약 더는 제어하지 못하는 수준까지 간다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군. 하지만 아직은 괜찮아.”

    내 머릿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천사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신도단이 활개를 치겠지. 하지만 능력자가 등장한 지 벌써 20년이다. 그런 허황된 종교 단체 하나에 쉽게 흔들릴 만큼 근간이 허술하지는 않아. 어느 곳이든.”

    “버틸 시간이 있다는 거네.”

    “물론이지.”

    그제야 좀 안도감이 들었다. 책으로 길드 관리 본부가 무너지고 천사연 혼자 막아 내는 모습을 봤을 때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는데.

    내 굳은 미간이 조금 풀어진 것을 알아챈 천사연이 픽 웃었다.

    “그래서?”

    “뭐가.”

    “언제 돌아올 거지?”

    필요한 대화는 어느 정도 나눴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저 멀리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모든 것을 차츰 집어삼키는 것이 보였다.

    정말 정직하군. 융통성 없는 능력에 혀를 차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한국에 간다고 해도 너한테는 안 가. 김칫국 마시지 마.”

    “이런. 널 기다리고 있는 우리 길드원들이 불쌍하지도 않나?”

    “너 몰래 만날 거야.”

    그 잠깐 사이 빛이 천사연의 바로 뒤까지 와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며 일부러 차갑게 한 마디 했다.

    “거래 잊은 건 아니겠지? 하태헌 씨 제대로 도와.”

    “분부대로.”

    천사연의 능청스러운 대답을 마지막으로 꿈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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