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길드 관리 본부를 습격한 이들은 지난번 D45 구역 폭탄 테러를 일으킨 일당과 같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프라우스’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종교에 소속된…….]
[능력자와 일반인 간의 범죄율이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그래프를 보시면 불과 저번 달까지만 해도…….]
[어젯밤, 묻지 마 폭행을 당했던 A 씨가 결국 사망했습니다. A 씨를 덮친 범인은 B급 능력자로 자택에서 검은 가면이 발견되어…….]
[능력자와 일반인 간의 혐오가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고 있습니다. 당국은 지난번 일어난 길드 관리 본부 습격 사건을 언급하며…….]
채널을 계속 바꾸던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TV를 껐다.
“이것 때문에 길드 관리 본부를 노린 겁니까?”
“아니. 관리 본부를 택한 이유에는 강승건, 그 인간도 포함되어 있을 거다.”
엘로힘의 답에 입가를 매만지며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관리 본부를 공격하면서 겸사겸사 강승건도 끌고 갔다는 거군요.”
“그렇지.”
“어째서 강승건입니까? 그 사람은 더는 능력을 쓰지 못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글쎄. 그들이 강승건이라는 인간을 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우리도 확실히 장담은 못 한다만….”
고민하듯 말을 살짝 늘이던 엘로힘이 이어 말했다.
“능력을 쓰지 못한다 해도 S급 신체이니 쓸 곳이야 여러모로 많겠지. 국회 의원의 하나뿐인 아들이기도 하고.”
아, 맞아. 잊고 있었다.
“엘라하가 잠깐 살펴본 바로는 아들을 찾아내라고 길드 관리 본부 쪽에 압박을 넣고 있다고 하더구나. 물론 제 자식을 아껴서 그런 건 아니고, 강남 사건 때 갖은 수모를 겪었으니 일부러 더 큰소리를 내는 거지.”
“상황이 많이 복잡하군요.”
“좋지는 않지.”
가슴속이 답답했다. 습격으로 인해 중심을 잃은 길드 관리 본부와 갈수록 가열돼 가고 있는 능력자와 일반인 간의 혐오 문제까지.
이 모든 게 프라우스 신도단이라 불린 검은 가면 집단 하나 때문에 벌어진 거라니.
마지막으로 본 천사연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엘로힘에게 물었다.
“천사연은… 괜찮은 겁니까?”
“흠. 나도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는 괜찮다고 하더구나.”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프라우스 신도단이 공개적으로 나선 것은 지금껏 여러 번 있었다. 다만 이번처럼 이렇게 빨리, 공격적으로 나온 적은 처음이긴 하지.”
“나름 익숙하다는 거군요.”
무거운 목소리로 설명하던 엘로힘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느낌이 좋지 않구나. 아무래도… 그들도 눈치를 챈 것 같다.”
“무슨 뜻입니까?”
“세계가 많이 약해진 탓에 시간을 건드릴 기회가 몇 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아…….”
“지금까지와 다르게 움직이는 이유가 분명 있을 테니까. 천사연도 그쪽으로 짐작하고 있더구나.”
가슴 한구석이 가시라도 박힌 것처럼 쿡쿡 쑤시고 불편했다. D45 구역에서 아벨이라 불린 인형술사를 마주쳤을 때와는 달랐다.
천사연이 사마엘을 상대로 얼마나 예민해질 수 있는지 알게 돼서 그런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분명 아벨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 보였는데….’
이것도 천사연의 과거를 보게 되면 알 수 있는 건가. 엘로힘이 나서서 설명해 주지 않은 부분이니…….
천사연과 사마엘의 생각에 빠져서 침묵하는 내 모습에 잠시간 가만히 서 있던 엘로힘이 곧 입을 열고 예상 못 한 제안을 꺼냈다.
“그렇게 걱정되는 거면 천사연, 그 아이를 다시 한번 만나 보는 게 어떻겠니?”
“예?”
당황한 탓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엘로힘은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얼굴을 살짝 기울였다.
“이미 한번 해 봤으니 더 쉽겠지.”
“…예?”
“능력으로 꿈에 들어갔을 때를 말하는 거란다. 이제 한이결보다 네 기운이 강해져서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을 거란다.”
“아, 아니, 그…….”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후끈한 열기가 확 치솟은 목덜미를 손으로 덮어 가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 정도로 걱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래?”
“네. 그냥 조금만… 근데 꿈에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바로 연결하는 게 가능합니까?”
“다른 아이라면 어렵지만 천사연은 가능하단다.”
자리에서 일어난 엘로힘이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열려 있는 창문을 닫았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아직도 조금 흐렸다.
“서로 합의를 봐 뒀기 때문이지. 직접 만나기 어려운 경우에는 꿈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빠르니까.”
“그렇군요.”
“물론 만나려면 천사연 쪽에서 잠을 자야 하지만… 그 아이는 세현아, 네가 이곳에 온 이후로 일부러 잠을 적게 자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구나.”
일부러 잠을 적게 잔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눈을 깜빡였다.
“천사연이 잠을 적게 자는 것과 제가 이곳에 온 게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음…….”
질문에 묘한 미소를 지은 엘로힘이 말을 돌렸다.
“아무튼, 네가 원한다면 꿈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겠다. 어떻게 하겠니?”
“…….”
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어물어물 대답을 뱉어 냈다.
***
무너진 본부를 대신하여 근처 호텔에서 길드 회의가 잡혔다.
경계가 삼엄한 입구를 지나 참석 명단에 이름을 작성한 천사연이 중앙 홀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랐다. 3층 세미나실로 향하던 그를 가로막은 것은 푸른 기가 감도는 정장을 갖춰 입은 하태헌이었다.
“이런. 마중이라도 나왔나? 감동이군.”
앞머리 반절을 넘겨 반듯한 이마를 드러낸 하태헌이 능청스럽게 나온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기분 변화를 뻔히 알면서도 천사연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기다리면 어련히 회의 시간에 맞춰서 들어갔을 텐데.”
“그걸 아니까 여기서 기다린 거다.”
“아하.”
불만이 그득 담긴 대꾸에 천사연이 어깨를 살짝 으쓱이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태헌 옆을 스쳐 지나갔다.
“기다려. 어딜 가는 거지?”
물론 그걸 두고 볼 하태헌이 아니었다. 망설임 없이 천사연의 팔을 붙잡은 그가 소리 낮춰 입을 열었다.
“나한테 설명할 것이 있을 텐데, 천사연 마스터.”
“글쎄. 그랬던가?”
“모른 척하지 마라.”
잡힌 팔을 잠시 내려다보던 천사연이 곧 하태헌과 시선을 맞췄다.
“미안하지만 정말로 모르겠군.”
“무슨…….”
“궁금한 것이 있다면 스스로 알아봐, 하태헌 부마스터. 정 내게서 정보를 얻어 내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가져오고.”
“…….”
“…아, 코트 건은.”
재수 없는 대답만 쏟아 내던 천사연이 뒤늦게 떠오른 듯 덧붙여 말했다.
“한이결과 약속했으니 도와주도록 하지. 돕는다고 해 봤자 로헌에서 발표할 때 한두 마디 얹는 것 말고는 할 게 없겠지만.”
하태헌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천사연을 응시했다.
“사고가 계속 터지는 바람에 코트 공개가 또 미뤄진 모양인데. 이주하 마스터도 골치가 꽤 아프겠어.”
“…….”
“차라리 이번 회의 때 공개 날짜라도 잡아 두는 쪽이 편할….”
막힘없이 떠들던 천사연이 순간 크게 휘청였다. 하태헌에게 팔이 붙잡히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졌을 정도였다.
“천사연?”
“…….”
하태헌의 부름에도 아무 반응 없이 이마를 짚은 채로 눈을 깜빡이던 천사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회의 시작까지 얼마나 남았지?”
“15분 정도.”
“후… 따라와, 하태헌.”
몸의 중심을 되찾은 천사연이 곧장 걸음을 옮겼다. 하태헌을 뒤에 달고 세미나실 근처에 있는 대기실로 들어선 그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문을 걸어 잠갔다.
“나는 지금부터 좀 자야 하는데.”
“뭐?”
“옆에 좀 있어 주면 아주 고맙겠군, 하태헌.”
문이 제대로 잠긴 것을 재차 점검하고 소파로 걸어간 천사연이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는 하태헌을 보며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웬만하면 회의 전에 다시 오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억지로 깨우지 마. 저런 쓸데없는 회의보다 이게 중요하니까.”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천사연이 제집 침대라도 되는 것처럼 소파 위에 길게 누웠다. 그 어이없는 작태에 한숨을 내쉰 하태헌이 삐딱한 목소리로 따졌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따 깨어나면 질문의 답을 하나 정도는 해 주도록 하지.”
“…….”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하태헌이 혀를 차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가 자리를 뜨지 않는 것을 본 천사연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텅 빈 어둠만이 가득했던 공간에 선명한 색으로 빛나는 것들이 차근차근 모습을 드러냈다. 연한 녹색 풀로 가득 덮인 들판 사이사이로 노란 꽃이 피어난 게 보인다. 새파란 하늘 아래로 넓게 펼쳐진 초원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
주변을 차분하게 둘러보던 천사연은 눈가를 좁혔다.
분명 꿈에 들어온 것은 맞는데, 처음 보는 장소였다. 지금껏 이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천사연이 바람에 흩날리는 앞머리를 무성의하게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된 듯싶다. 예언자 쪽에서 꿈을 열었다는 신호를 보내와서 급히 온 거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신중하게….
“이게 진짜 되네…….”
피로로 뻐근한 눈가를 쓸어 만지는 천사연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뒤를 돌아보자 기대했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천사연.”
한이결이 어딘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높다란 하늘에 떠 있는 해를 등지고 서 있는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황금처럼 밝게 빛났다.
천사연은 눈앞의 한이결이 신기루가 되어 흩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살결이 살짝 비칠 정도로 얇고 부드러운 셔츠와 뻣뻣한 면바지 아래로 새하얀 발목과 발이 보였다. 섬세하지 못한 그의 성격을 보여 주듯 대충 접어 올린 소매 덕분에 훤히 드러난 손목에는 자신이 쥐여 준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천사연과 마찬가지로 그의 옷차림을 하나하나 눈에 새긴 한이결이 머쓱하게 물었다.
“뭐… 회의라도 잡혔냐?”
“바로 맞췄군. 길드 관리 본부 회의다. 건물이 무너졌으니 근처 호텔로 장소가 변경됐지.”
“아아… 그럼 빨리 가야 하나?”
“아니.”
곧장 부정한 천사연이 환하게 웃었다.
“회의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다행이네.”
“그보다 이제는 좀 가까이 왔으면 좋겠는데. 대화하기에는 먼 거리지 않나?”
저를 향해 손짓하는 천사연을 멀뚱히 보던 한이결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불만이면 네가 와라.”
“음?”
“무슨 키우는 개 부르는 것도 아니고…….”
생각지도 못한 불만에 천사연이 입가를 매만졌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술 끝을 살며시 올린다.
“그래. 맞는 말이네.”
다정함이 담긴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내가 갈게, 한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