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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82)화 (182/394)

182화 

“저…….”

심각한 분위기에 어깨를 좁힌 채로 하태헌의 눈치를 살피던 차수연이 나지막하게 후회 어린 숨을 내쉬었다.

‘역시 괜히 말했나?’

하지만 하태헌 말고는 적당한 상대가 없었다. 한이결과 사귀는 사이기도 하고, 그의 소식을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핸드폰이 없는 한이결이 목걸이 문제로 저에게 연락해 온다면 그때는 분명 하태헌을 거쳐야 할 테니, 그에게 맡겨 두면 한이결도 더 마음 졸이지 않고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내린 결정이었는데….

‘섣부른 판단이었을 수도.’

한이결은 대체 핸드폰도 없이 중국에는 왜 간 거야. 걱정돼서 죽겠네.

차수연이 침울해하는 것도 모른 채 목걸이만 노려보던 하태헌이 이내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볼로 타이를 꺼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이결을 만난다면 꼭 전해 주도록 하죠. 자세한 설명도 한이결에게 듣겠습니다.”

볼로 타이 중앙에 박힌 검은 보석을 두드리자 목걸이가 사라졌다. 이 이상 망가지지 않도록 제대로 관리하려면 차수연처럼 인벤토리에 보관하는 것이 제일 나았다.

“믿을게요.”

“다른 용건 더 있습니까?”

“아뇨.”

“나가시죠. 1층까지 안내하겠습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하태헌의 뒤를 따라 차수연도 몸을 막 일으킨 그때였다. 응접실 문을 가볍게 노크하고 들어선 수행원이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마스터. 지금 길드 관리 본부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지?”

“그게…….”

하태헌과 수행원을 멀뚱히 바라보던 차수연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뜬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등을 살짝 돌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마스터?”

[수연아! 너 지금 어디야?]

“저, 저요? 저 지금 로헌….”

[어디? 로헌? 관리 본부는 아니지?]

“관리 본부요?”

통화 너머 홍시아의 말을 들은 하태헌과 차수연의 시선이 마주쳤다.

***

무너진 건물에서 풍기는 쾌쾌한 연기 냄새가 점차 선명하게 다가왔다.

“대피해!”

“지하에 아직 연구소 직원들이 남아 있습니다!”

“일반인은 일단 나가!”

온몸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명령을 내리는 여자의 얼굴이 제법 익숙했다. 게이트 관리 센터장, 최미진이었다.

비틀거리는 여자 직원을 부축하며 최미진이 무너진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깥은 신고를 받고 온 소방차 여러 대와 방송국 카메라, 다친 관리 본부 직원들로 정신없었다.

“센터장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대피 완료했습니다. 지하에 남은 직원들은 능력자가 도착하는 대로….”

“연락 다시 넣어. 최대한 빨리 오라고.”

대답하던 최미진이 무언가를 알아채고 앞의 직원을 밀쳤다. 쿠궁! 방금까지 직원이 있던 자리가 형체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인해 깊게 파였다.

“허, 헉…!”

창백하게 질린 직원이 쓰러진 채로 덜덜 떨었다. 최미진이 밀치지 않았다면 그대로 상체가 꿰뚫려 죽었을 것이다. 나와 최미진의 시선이 동시에 관리 본부 쪽으로 향했다.

“눈치가 꽤 빠르네요.”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눈가만 가려지는 검은 가면을 쓴 여자가 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자 뒤로 검은 가면을 쓴 자 수십 명이 늘어선 게 보였다.

“…네놈들은 누구지?”

관리 본부를 공격한 이들이라는 것을 알아챈 최미진이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 쿠구궁! 여자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 내부에서는 계속해서 무너지고 부서지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뿌연 흙먼지와 함께 바람이 훅 불어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여자가 말했다.

“우리는 프라우스 신도단. 위대한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프라우스 신도단?”

당당하게 외친 말에 최미진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뭔가 했더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이비 종교 단체였나?”

“뭐?”

“하, 갑자기 긴장감이 확 풀리네. 그쪽 종교는 너 같은 미친년만 들어갈 수 있나 보지?”

“…그래요. 벌레 새끼랑 말이 통할 리가 없지.”

신랄한 비꼼을 무덤덤하게 받아친 여자가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입 앞으로 가져갔다. 뒤늦게 살기를 알아챈 최미진이 미처 피하기 전에 여자가 숨을 훅 뱉어 냈다.

“이런.”

누군가가 끼어들어 최미진의 팔을 낚아채 뒤로 잡아당겼다. 충격파는 이번에도 상대를 맞추지 못하고 바닥을 꿰뚫었다.

능력을 써서 구해 줘야 하나 긴장하고 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최미진을 지켜 낸 천사연은 웃는 낯으로 검을 꺼내 들었다.

“세상에…….”

천사연의 얼굴을 본 여자가 감탄사를 흘리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저 외모라니. 사마엘 님 말씀이 꼭 들어맞는군요.”

“무슨 소리를 들었을지 뻔하네.”

대수롭지 않게 받아친 천사연이 SS급 검을 빙글 돌리고는 뒤에 떨떠름한 기색으로 서 있는 최미진에게 말했다.

“여긴 내가 맡을 테니 가 보십시오, 최미진 센터장. 지금쯤이면 길드에서 보낸 지원 인력이 도착했을 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최미진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혼자 서서 수십 명의 신도단을 마주한 천사연이 느긋하게 물었다.

“아자젤. 네가 온 것을 보니 사마엘도 근처에 있겠군.”

“물론이죠. 역시 그분께 들은 대로 당신은 다 아는군요.”

선뜻 대답한 아자젤이라 불린 이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더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특별하다 해도 이번만큼은 방해하게 둘 수 없어요. 사마엘 님은 아벨, 그 덜떨어진 년과 달라서.”

“뭘 모르는군. 이미 여러 번 실패했는데.”

“제가 없었으니까요.”

한층 더 딱딱해진 낯으로 대꾸한 아자젤이 다시 공격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부드러운 음성이 둘 사이를 갈랐다.

“거기까지 해, 아자젤.”

마른침을 삼키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무심코 주먹을 쥐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겨우 외면하고 있었던 악몽 같던 그날이 목소리 한 번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쓸데없이 도발에 걸려들 필요 없어. 오늘 목적은 그게 아니니까.”

연기를 헤치고 천천히 걸어 나온 사마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가면과 정장 재킷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흠뻑 튀어 있었다.

급히 사마엘에게 달려간 아자젤이 깍듯하게 머리를 숙였다.

“사마엘 님.”

“후우.”

과장한 숨을 내뱉으며 그가 질질 끌고 온 것을 바닥에 휙 내던졌다. 기절한 채로 코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메마른 남자의 정체는 강승건이었다.

강승건은 강남 사건 이후로 관리 본부 지하 정신계 연구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던 민아린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그를 납치하기 위해 관리 본부를 습격한 건가?

‘대체 왜 강승건을?’

그가 능력이라도 멀쩡하면 모를까, 과도한 기운 사용으로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 데려가 봤자 이전처럼 써먹지도 못할 텐데.

“혼자 다녀오신 겁니까? 위험합니다.”

“됐어. 이거 잘 챙겨, 아자젤.”

“예.”

쓰러진 강승건을 구둣발로 툭 친 사마엘이 곧 고개를 들고 천사연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얼굴 보네, 천사연.”

“사마엘.”

“아벨한테 소식은 전해 들었어. 이번에야말로 네가 아끼는 놈의 머리를 가져오겠다며 즐거워했었는데.”

사마엘의 등장에 천사연이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진 게 느껴졌다. 상대는 행동 한 번으로 일반인은 물론이고 S급 능력자까지 이성을 잃게 만들 수 있는 정신계 능력자였다. 한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길드 이름이 뭐였더라. 로헌이었나? 그쪽 부마스터. 맞지? 실패해서 참 아쉬워. 네가 미치는 꼴을 한번 보고 싶은데.”

“…….”

“시간을 돌리기 전에는 몇 번이고 봤다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내가 기억을 못 하잖아.”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사마엘이 더러워진 장갑을 벗어 던지고는 아자젤이 건네는 깨끗한 장갑을 새로 꼈다.

“그렇게 무섭게 노려볼 것 없어. 이번에는 싸울 생각 없으니까.”

“글쎄. 믿기 영 힘든 소리군.”

“우리 착한 동생은 항상 나를 못 믿었지. 참 슬퍼.”

사마엘이 고개를 까딱이자 옆에 서 있던 아자젤이 품에서 보랏빛이 감도는 새까만 구슬을 꺼내 들었다. 그에 맞춰 뒤에 물러서 있던 검은 가면을 쓴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모두 들으라!』

남자가 입을 벌려 큰 소리로 외치자 근처에 있던 수많은 이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으윽…!”

“뭐, 뭐야? 귀가…….”

검은 가면을 쓴 자들과 사마엘, SS급인 천사연을 제외한 사람들이 귀와 머리를 쥐어 싸맸다. 천사연도 처음 보는 능력자인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주변을 살폈다.

『이 모든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제 눈을 뜰 때가 됐다.』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는 카메라가 모두 남자에게로 향했다. 사마엘을 제치고 나온 남자가 마치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일어서라, 진화된 이들이여. 우리는 정당하게 이 세계를 지배할 존재들이다.』

그제야 나는 가슴을 찌르던 불길한 예감의 정체를 알아챘다. 나와 마찬가지로 깨달은 천사연이 급히 몸을 날렸다.

『더는 힘이 있음에도 억눌려 살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달려오는 천사연을 본 사마엘이 웃음을 흘리며 구슬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땅으로 떨어진 구슬은 액체로 변하며 넓게 펴진 공간 이동 입구로 변했다.

『침묵이 아닌 진정한 평화가 올 때까지.』

쿠웅!

사마엘과 신도단이 공간 이동으로 사라진 동시에 목소리 증폭 능력자의 목을 틀어쥔 천사연이 상대를 바닥에 처박았다.

『이 반석 위에 그분의 업적을 세우리라.』

마지막 말을 뱉어 낸 남자의 숨이 그대로 끊어졌다. 남자가 죽은 것을 알아챈 천사연이 굳은 표정으로 손을 떼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림자가 짙게 진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시선과 카메라가 모조리 천사연을 향했다. 숨 막히는 침묵과 짙은 혼란이 폐허가 된 장소에 내려앉았다. 그 모든 것을 홀로 받아 내고 있던 천사연이 지친 숨을 내뱉었다.

천사연. 나도 모르게 무심코 뱉어 낸 부름은 그에게 닿지 못하고 의미 없이 흩어졌다. 새하얀 빛이 또다시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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