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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81)화 (181/394)

181화

46. 분란 조성

베이컨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멍하니 바라보다 목이 타는 느낌에 일단 옆에 있는 잔부터 들었다. 새콤한 오렌지 주스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대가는 언제 끝납니까?”

“글쎄.”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엘로힘은 헤매지 않고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했다.

“며칠 안 가긴 할 거다. 우리는 너를 그곳으로 보내 줬을 뿐이니까. 두 아이를 도운 것은 엄연히 네가 가진 힘이지.”

식탁 중앙에 자리한 꽃병에 묶여 있는 연녹색 리본을 풀어낸 그가 제 머리카락을 하나로 낮게 묶어 한쪽 어깨 위로 내렸다.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구나. 상황이 워낙에 어려웠으니 며칠은 더 잠들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단다.”

빨리 기운을 차렸다고? 베어 먹은 샌드위치를 삼키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얼마 만에 깨어났는데요?”

“이틀 정도 걸렸구나. 본래라면 나흘은 자야 했겠지만…….”

살짝 미소를 지은 엘로힘이 얼굴을 살짝 숙였다.

“아이템 덕분에 기운을 채우는 시간이 평소보다 훨씬 짧아진 것 같구나.”

“아.”

그 말에 뒤늦게 팔찌를 떠올렸다. 머쓱하게 반대편 손으로 팔찌를 가리며 물었다.

“죄송해요. 멋대로…….”

“사과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회복에 도움이 됐으니 무척 잘된 일이지.”

“하지만, 그. 이게 위치 추적이 가능해서요.”

“그 부분은 염려할 필요 없다. 이 장소는 우리가 만들어 낸 곳이라 추적이 불가능하고… 어차피 천사연, 그 아이는 네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역시 그런가. 엘로힘이 들어갈 꿈에 내가 끼어들었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아무튼 별 상관없다니 안심이었다. 남은 샌드위치를 모조리 먹어 치워 배를 채우자 엘로힘이 차가 담긴 잔을 새로 놔 줬다. 감사히 받아 마시며 여전히 식탁 가장자리 부근에서 뒹굴고 있는 여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식탁이 넓긴 해도 저렇게 비비적거리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다치지 않나. 차라리 들어서 중앙으로 옮겨 줄까 고민하는데, 가만히 있던 엘로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겉모습과 달리 평범한 동물이 아니니 떨어져도 아프진 않을 거다.”

“그런가요?”

머릿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목덜미를 쓸었다.

“지금은 힘을 못 쓰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물론 그렇지. 하지만 볼 수 없어도 네 생각 정도는 충분히 알 것 같구나, 세현아.”

“…….”

당연하다는 듯이 나온 대답에 반박 거리가 없었다.

아니, 내가 뭘 그렇게… 뻔한 생각을 했다고…….

어딘가 묘해진 식탁 분위기에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나비를 구경하던 여우가 나와 엘로힘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아이들은 우리의 기운을 타고났어도 근본은 고스트 몬스터지. 가진 능력도 다양하단다. 생김새를 바꾸거나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서 숨을 수 있지.”

“오. 그거 꽤 괜찮네요.”

제 얘기를 한다는 것을 알아챈 여우가 몸을 일으켜 앉아서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보면 그냥 평범한 여우 같은데.

“하긴. 하늘도 날 수 있으니까 다른 능력이 더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네요.”

“형제들 모두 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단다. 겉모습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데도 다들 지금 상태를 고집하더구나. 이 아이들도 취향이 있는 거겠지.”

하태헌을 유독 따르던 하얀 토끼와 고양이가 떠올랐다. 형제라고 하니 확실히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우가 제일 막내란다. 겨우 태어난 아이지. 그래서 다른 아이들보다 몸집도 더 작고 약하더구나. 형제들과 달리 저 아이는 아직 투명화를 쓰지 못하기도 하고.”

겨우 태어나 형제들보다 늦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는 귀찮아도 자주 놀아 줘야겠다.

“아야.”

그렇게 생각하며 여우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자마자 그대로 물렸다. 사정없이 물린 손가락이 빨갛게 물들었다. 엘로힘이 뒤늦게 덧붙였다.

“성격은 다른 형제들보다 더 까칠하더구나.”

“네, 그러네요.”

피이.

어이없어하는 나를 보며 여우가 코웃음을 쳤다. 아, 진짜 얄미워.

“그보다 세현아.”

“예?”

“천사연의 과거를 보는 일은 아무래도 좀 더 늦어질 것 같구나.”

무슨 이유인지는 바로 눈치챘다. 과거를 보려면 책을 읽고 정리해야 하는데… 앞이 보이지 않으니 읽을 수 없다는 거겠지.

“괜찮습니다. 이해해요.”

“고맙다.”

“아닙니다. 어차피 아직 시간은 남았고….”

쿠르릉!

하려던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바깥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깜짝 놀라며 창밖을 바라보자 어느새 먹구름이 꾸역꾸역 몰려들어 어두워진 하늘이 보였다.

“무슨…….”

“이런.”

미간을 확 찌푸린 엘로힘이 낯설 정도로 낮고 거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한국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환한 빛이 짧은 순간 번쩍하더니 어마어마한 양의 비가 쏟아져 내리며 천둥과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열려 있는 창문을 닫았다.

“서재로 가자, 세현아.”

엘로힘도 몸을 일으켜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배를 식탁에 바싹 붙인 채로 주변을 살피는 여우를 들어 안으며 엘로힘을 뒤따라가려던 나는 그가 벽에 이마를 쿵, 박는 것을 발견하고 기겁했다.

“엘!”

“…….”

엘로힘이 얼굴을 조금 기울이며 붉어진 이마를 매만졌다. 급히 다가가 안고 있던 여우는 어깨 위로 올리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으음, 그래. 부탁한다.”

엘로힘과 손을 잡고 서재로 향하자, 평소보다 배로 창백하게 질린 채 기록을 하고 있는 엘라하가 보였다. 새하얀 바짓단 아래로 드러난 맨발은 엘로힘의 눈을 덮은 물체와 같은 것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엘.”

부르지 않아도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아챈 엘라하가 감았던 눈을 뜨며 잔뜩 갈라진 입술로 말문을 열었다.

“두 번째 기습이야.”

“장소는?”

“한국. 길드 관리 본부.”

“관리 본부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엘라하가 앞에 띄워 놓은 책을 내게로 보냈다.

“대신 읽고 앞이 보이지 않는 엘에게 설명해 줘. 나는 계속 기록해야 하니까. 부탁해.”

그가 책 대신 주변에 날아다니는 종이들을 끌어모았다. 내가 책을 보는 동안 대신해서 기록을 넣을 종이였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길지 않을 테니 부담도 크지 않을 거란다. 대신 과하게 집중하거나 끼어들겠다는 생각은 하면 안 된다. 능력이 발동될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엘로힘의 조언을 머리에 새기며 천천히 책에 손을 뻗었다.

***

이번 폭탄 테러 사건으로 사망한 이들의 목록이 정리된 서류를 펼쳐 둔 채로 하태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이결에게 들은 대로, 혹은 예상한 대로. 게이트 출구를 지키던 이들은 물론이고 클리어팀까지 합쳐서 적지 않은 사망자가 나왔다.

자신보다 먼저 이 목록을 봤을 이주하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태헌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어제 있었던 기자 회견을 떠올렸다.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검은 정장을 갖춰 입고 허리 깊이 숙여 사과를 올린 이주하는, 테러 집단을 어떻게든 밝혀내고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다고 입을 열었다.

그는 이주하가 걱정스러웠다. 아무리 그녀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길드를 책임지고 있는 어른이라 한들,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고에 휩쓸리면 혼란스럽고 힘든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테니.

그런 하태헌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이주하는 기자 회견장을 빠져나와 길드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단단한 음성으로 말했다.

-괜찮아. 물론 지금도 그 빌어먹을 검은 가면 단체 놈들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지만… 분노에 마구잡이로 휘둘릴 생각은 없어.

-마스터.

-일단 지금은 당장 눈앞에 쌓인 일부터 차근차근히 해 나가야겠지. 힘들겠지만.

쓰게 웃은 이주하는 그날 후로 빡빡하게 들어찬 일정에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 일정에는 사망자 장례 참가도 있었다.

이주하가 정신없이 바빠진 만큼 하태헌은 길드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언제 어느 때 검은 가면 단체가 나타날지 모르니 부마스터인 그가 길드에 남아 있어야 했다.

잠깐 이마를 짚은 상태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하태헌이 다시 상체를 당겨 서류에 시선을 보냈다.

김지호라 써진 관리 부서 직원의 사망 정보를 읽던 그때였다.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며 수행원이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바로 가지.”

서류를 덮은 하태헌이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그가 도착하자 커피를 마시고 있던 상대가 긴장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하태헌 씨.”

차수연이 어색한 말투로 건넨 인사에 하태헌이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오는 데 불편한 건 없었습니까?”

“네, 네.”

오늘 오전, 차수연이 먼저 만날 수 있겠냐고 연락을 보내왔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연락이 끊긴 지 한참이 지난 한이결 때문이겠지.

“바쁘실 텐데 만나 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확실히 어수선한 상황이긴 했지만, 차수연에게 사과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태헌의 답에 그제야 조금 안도한 차수연이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사실, 그… 한이결 능력자 일로 왔어요. 연락이 계속 안 돼서요.”

“한이결은 현재 사정이 있어서 중국에 가 있습니다.”

“중국으로 갔다는 얘기는 마스터께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연락까지 계속 안 되는 건 아무래도….”

“급하게 떠나느라 핸드폰도 챙기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큰 문제는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언제 돌아올지는 하태헌 씨도 모르는 거죠?”

“예.”

여기까지는 그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이해하고 물러설 줄 알았던 차수연은 허리에 차고 있던 가죽 인벤토리 가방을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혹시 이것 좀 저 대신 맡아 주실 수 있나요? 한이결 능력자 물건이에요.”

“…한이결의 물건?”

차수연이 내민 것을 건네받은 하태헌은 눈가를 좁혔다. 낯익은 생김새에, 가운데 보석이 깨진 목걸이였다.

“한이결 능력자의 부탁으로 제가 대신 가지고 있었어요. 핸드폰도 챙기지 못할 정도로 급하게 떠났다면 지금도 계속 신경 쓰고 있을 것 같아서요.”

“…….”

“엄청 중요한 목걸이에요. 꼭 좀 전해 주세요. 저보다는 하태헌 씨한테 먼저 연락할 것 같으니까.”

차수연의 말을 들으며 목걸이를 응시하던 하태헌이 찌푸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셔터 아이템 아닙니까? 제가 부쉈던.”

“앗! 그, 그게…….”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한이결과 처음 만났을 때, 차수연의 목에 걸려 있던 그 목걸이가 분명했다.

낭패감이 어린 얼굴로 쩔쩔매던 차수연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맞아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셔터 아이템도 아니에요. 그냥 평범한 목걸이죠. 한이결이 셔터 아이템인 척 걸고 있으라고 해서….”

“이게 왜 중요하다는 겁니까?”

“음…….”

“차수연 씨.”

하태헌이 재차 다그치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난감해하던 차수연이 결국 힘겹게 말을 뱉어 냈다.

“여동생한테 주려고… 산 거라고 해요. 그런데 여동생은 이미…….”

“…….”

눈앞이 순간 크게 흔들리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멈춘 것처럼 가슴속 깊은 곳에서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태헌은 목걸이가 그 이상 망가지지 않도록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을 겨우 펼쳤다. 덜덜 떨리는 손 위에 올려진 낡고 망가진 목걸이가 유독 시선에 박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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