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80)화 (180/394)
  • 180화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을 확인한 나도 기운을 멈추고 바람을 없앴다. 그제야 숨통이 좀 트였다.

    “한이결.”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자, 그 소리를 들은 천사연과 하태헌이 급히 달려왔다.

    “하아,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여전히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둘은 손을 내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겨우 대답하자 내 목소리에 맞춰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천사연과 하태헌이 서로 앞다퉈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더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지금 이곳에 올 수 있었던 힘과 관련이 있는 건가? 설마 예언자, 그놈이 강제로 시킨 거냐?”

    역시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구나. 팔찌가 있던 전과 달리 아주 느리게 차오르는 기운을 느끼며 하태헌의 질문부터 대답했다.

    “강제로 시켜서 온 거 아니에요. 이전처럼 엘이 제안했고, 제가 받아들인 겁니다.”

    “그런 무모한 짓을… 대가로 뭘 요구할 줄 알고 함부로 받아들인 거지?”

    “대가는 제가 아니라 엘이 치렀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사나운 잔소리와 달리 하태헌의 검은 눈동자에는 염려의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정말로 문제없다는 의미를 담아 팔을 가볍게 붙잡자, 그도 내 손길을 느꼈는지 몸을 작게 움찔 떨었다.

    다행이다. 유령처럼 통과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게이트 출구에도 여기와 마찬가지로 폭탄 테러가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에 일어난 사건이에요.”

    “…예상했다. 저들이 온 방향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네. 피해가 심각해요. 사상자도 있습니다. 모두… 로헌 길드 소속이고요.”

    하태헌은 이것 또한 짐작하고 있었는지 그리 놀라지는 않았지만, 표정에 숨길 수 없는 복잡함이 어렸다.

    “그러니까, 제 말은… 음…….”

    각오는 했지만, 막상 심란해하는 하태헌을 보니 뒷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는 나를 알아챘는지 하태헌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어수선한 상황인 건 맞지만, 나도 마스터도 이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는다.”

    “…네.”

    단단한 음성에 조금은 안심이 됐다. 어깨에 들어간 긴장을 조금 풀며 천사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천사연, 너는… 뭐야?”

    “뭐가.”

    뒤늦게 녀석의 표정을 알아챈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저런 시큰둥한 모습이지. 아니, 시큰둥하다기보다는… 불만스럽거나 짜증이 난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왜 그래?”

    평소라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지금은 그냥 넘기기 찝찝했다. 혹시 싸우는 도중에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건가?

    내 우려와 달리 천사연은 방금까지 보였던 얼굴을 삭 없애며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옆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하태헌이랑만 사이좋게 대화하니까 참 섭섭하군. 그 매정함이 내 여린 마음에 아픈 상처를….”

    “미친 새끼.”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으며 몸서리가 쳐졌다. 왼편에 있는 하태헌도 나와 마찬가지로 천사연을 경멸하듯 쳐다봤다.

    나와 하태헌을 동시에 질리게 만들어 버리다니. 아무튼 대단한 놈이다. 속으로 혀를 차며 천사연을 노려보던 나는 건너편에서 새하얀 빛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을 알아챘다.

    “아…….”

    그뿐이 아니었다. 천사연과 하태헌과 달리 내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던 몸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개입’ 능력이 끝나 가는 것이다.

    “한이결.”

    내 모습 대신 기운으로 감지하고 있던 둘도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하태헌이 팔을 잡고 있던 내 손을 붙들었다.

    그야 오래 있진 못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쫓겨날 때가 되니 조급해졌다. 나는 급히 말했다.

    “천사연, 하태헌 씨 코트 문제 좀 잘 도와줘.”

    내 부탁에 천사연이 눈을 빠르게 두어 번 깜빡였다.

    “글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저놈들 때문에 하태헌 씨 계획이 다 무너졌잖아. 어차피 너도 이쯤 되면 코트 뺏을 생각 없어 보이는데.”

    “흠.”

    그가 잠시 고민하는 척 입가를 매만지더니 곧이어 느긋한 말투로 대답했다.

    “맨입으로는 안 되고. 내 제안을 들어준다면 흔쾌히 따르도록 하지.”

    이 자식이….

    하여간 거래에 미친 것 같다니까. 멱살이라도 붙잡고 한바탕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었다. 부글거리는 속을 억누르며 짜증스럽게 물었다.

    “제안이 뭔데?”

    “손 여기 얹어.”

    천사연이 내 쪽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의심스럽게 보며 펼쳐진 손바닥 위에 손을 올리자, 입고 있던 붉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 천사연이 내게 그것을 쥐여 줬다.

    “이건…….”

    무심코 받아 든 나는 놀란 눈으로 아래를 바라봤다. 붉은 보석이 박힌 팔찌. 천사연이 선물했고, 레퀴엠을 떠나며 남겨 두고 왔던 A급 팔찌였다.

    “이걸 어떻게….”

    천사연이 설마 여기서 이 팔찌를 꺼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넣어 둔 곳이 인벤토리인 시계가 아니라 재킷 안주머니라니.

    ‘계속 지니고 있었던 거야?’

    목 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힘겹게 삼켜 냈다.

    “가져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몸이 서로 닿으니까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겠지.”

    “…….”

    “받지 않으면 거래는 무효다. 이번에 실패하면 계속 맡아 둘 테니 나중에라도 반드시 찾아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멍하니 천사연의 말을 곱씹던 나는 손 위에 올려진 팔찌를 힘 있게 쥐었다.

    “…그래.”

    거의 투명에 가까울 정도로 흐려진 몸과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하얀빛이 보였다.

    뒷수습하는 것도 못 보고 이렇게 떠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천사연과 하태헌이라면 불안하지 않았다.

    눈을 찔러 오는 강렬한 빛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충격을 겨우 참아 냈다. 손에 든 책을 떨어트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따듯하고 단단한 체온이 지탱했다.

    “세현아.”

    “읏…….”

    “고생했다.”

    엘로힘이 달래듯 말했다. 몸에 힘을 풀고 그에게 기대며 손을 내려다봤다.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쥔 주먹을 덜덜 떨며 펼치자, 그곳에는 놀랍게도 팔찌가 있었다.

    ‘진짜 될 줄이야.’

    깊은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멀어지는 의식 너머로 푹 쉬라는 엘로힘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주 잠깐 감았다고 생각한 눈을 다시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이며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몸에 닿아 왔다.

    “하아…….”

    또 기절했나 보네. 책을 본 것뿐만 아니라 능력까지 사용했으니 저번처럼 며칠은 잔 것 같은데.

    화창한 햇살이 내리비치는 창밖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다행히 몸 상태는 아주 괜찮았다.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던 나는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발견했다. 기절하기 전에도 눈으로 확인했지만, 워낙 현실감이 없어서 꿈이라도 꾼 것 같다. 새삼 신기하네.

    -받지 않으면 거래는 무효다. 이번에 실패하면 계속 맡아 둘 테니 나중에라도 반드시 찾아가.

    팔찌를 보며 천사연의 말을 떠올렸다. 웃기는 놈. 내가 팔찌를 받지 않아도 어차피 하태헌을 도왔을 거면서.

    천사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내가 ‘어비스’를 읽고 SS급 코트를 알게 된 것처럼, 천사연도 이전 시간의 경험으로 진작 알고 있었겠지.

    코트를 얻을 기회가 많았을 텐데도 욕심내지 않고 내버려 뒀다는 건… 그도 하태헌이 코트를 가지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거다.

    “…….”

    이제야 보인다. 천사연, 네가 걷고 있는 길이.

    팔찌 정 가운데에 박힌 붉은 보석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비어 있던 곳이 예전처럼 팔찌로 감싸지자 마치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 근데 이거 위치 추적 가능한데. 여기 둬도 되는 건가?’

    뒤늦게 떠오른 사실에 아차 싶었다. 으음. 한참을 멀뚱히 서서 고민하던 나는 엘로힘에게 묻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씻고 나서 식사가 차려지는 방으로 향하자 엘로힘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행이다. 이 넓은 신전을 돌아다니며 찾지 않아도 되겠군.

    피이이.

    요리가 차려진 식탁 위를 한가롭게 뒹굴뒹굴하던 여우가 엘로힘보다 먼저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들며 밝게 울었다.

    “엘.”

    여우의 배를 한번 만져 주고 엘로힘에게 다가가자, 새 물을 채워 넣은 꽃병을 내려 둔 그가 나를 돌아봤다.

    “……!”

    팔찌 얘기부터 꺼내려던 나는 마주한 엘로힘의 상태에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그의 눈이 새하얀 천에 가려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천 아래로 보이는 얼굴도 지나치리만큼 창백하고 회색빛이 돌았다.

    “뭡니까? 무슨 일이에요?”

    “이런. 진정하렴.”

    평소와 달리 잔뜩 갈라지고 메마른 입술을 천천히 끌어 올려 웃은 엘로힘이 어린아이 대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하지 않았니. 대가는 우리가 대신 치를 거라고.”

    “이게 대가란 말입니까?”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건 아주 일시적이니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겠지.”

    부드러운 음성으로 설명한 엘로힘이 천으로 가려진 제 눈가를 손가락으로 툭 두드렸다.

    “어차피 보이지 않으니 굳이 가릴 필요는 없지만, 네게는 조금 징그러울 것 같아서.”

    징그럽다니. 대체 상태가 어떻길래.

    “보여 주실 수… 없습니까?”

    “흠.”

    내 요청에 갈등하듯 잠시간 가만히 서 있던 엘로힘이 이내 허리를 조금 숙여 줬다.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천을 풀어내자, 얌전히 눈을 감고 있던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언제나 아름답게 빛나던 엘로힘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눈을 뒤덮은 검고 질척이는 물체는 마치 거머리처럼 살아 꿈틀거렸다.

    아플까 봐 차마 건드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내 어깨를 괜찮다는 듯이 쓸어 만진 엘로힘이 다시 천으로 눈 주위를 감았다.

    “너를 그곳으로 보내고, 흐름에 깊이 관여한 대가란다.”

    “…우리라고 하셨죠. 설마 엘라하도 이렇게 된 겁니까?”

    “그 아이는 기록을 해야 하니 눈이 아닌 두 다리를 잃었지.”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시선에 들어왔다. 이렇게 서서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눈만이 아니라 다른 곳도 불편해 보입니다.”

    “장기 몇이 조금.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수준이란다.”

    그 말에 나는 바로 알아챘다.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시간이 몇 번이고 되감겨 반복되는 동안, 엘로힘과 엘라하는 칼리를 막기 위해 대신 대가를 치르고 천사연을 도와 온 것이다.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내 손을 붙잡아 식탁으로 이끈 엘로힘이 나를 의자에 앉히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단다, 정말로. 우울한 얘기는 그만하고 식사를 하자.”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