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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79)화 (179/394)

179화 

별다른 문제 없이 능력을 쓸 수 있을 거라던 엘로힘의 말은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천사연과 하태헌의 싸움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검은 가면을 쓴 놈들이 몇 명씩 달라붙어서 마구잡이로 공격을 쏟아붓자, 아무리 SS급인 천사연과 하태헌이라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애당초 누구든 저렇게 여럿이 한 명에게 달려든다면 답이 없을 것이다.

둘의 싸움을 초조하게 보던 나는 하태헌이 폭발에 휩싸여 머리를 심하게 다치는 광경에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점차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하태헌과 팔을 잃더라도 모두를 살리겠다 다짐하는 천사연의 생각을 듣는 그 순간,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자 나와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던 얇고 불투명한 장막 하나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개입’ 능력의 효과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한이결의 능력인 바람을 끌어 올렸다. 내 존재를 곧장 눈치챈 천사연과 하태헌의 사이에 서서 몇 번이고 해 왔던 대로 능숙하게 바람을 움직여 둘의 몸을 감쌌다.

“천사연, 하태헌 씨.”

자신 있게 웃으며 정면에 서 있는 인형을 바라봤다. 이길 수 있다. 질 리가 없다.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가세요. 힘을 보태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천사연과 하태헌이 동시에 땅을 박차고 적을 향해 달려 나갔다. 천사연이 검은 가면을 쓴 자들에게 가는 것을 본 하태헌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알아서 인형 쪽으로 몸을 틀었다.

“뭐, 뭐야! 대체 어떻게….”

하태헌의 검을 낫으로 막아 낸 인형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사납게 외쳤다.

“어떻게 날 수 있는 거야?”

바람의 힘을 받은 하태헌이 지금까지와는 확연하게 다른 가벼운 몸놀림으로 인형을 몰아세웠다. 검을 겨우 쳐 내던 인형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쥐새끼가 숨어 있는 게 분명한데. 시발, 왜 보이는 게 없지?”

번들거리는 인형의 눈알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실체가 아니라 해도 SS급 인형을 다루는 자였다. 천사연과 하태헌이 알아챈 내 기운을 상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 내며 팔을 뻗어 손끝을 움직였다. 하태헌의 검날에 감겨 있는 바람이 인형의 공격을 충격 없이 흘려 넘길 수 있도록 도왔다.

‘…침착해.’

예민해진 감정과 함께 분노로 속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폭탄 테러의 피해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클리어팀은 어느 정도일지 아직 모르지만, 게이트 출구 쪽은 뉴스에서 들은 바로 사상자가 여럿 나왔다.

아무 연관 없는 무고한 이들이 다치고 죽은 현 상황도 문제였고, 그 사실을 뒤늦게 듣고 자책할 하태헌과 이주하도 걱정스러웠다.

칼리의 하수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거라는 엘로힘의 말대로라면, 이번 기습과 같은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텐데.

-강해져야 한다, 세현아.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이들이…….

낮게 가라앉은 엘로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 세계와 내 운명이 같아진 것처럼, 내가 가진 ‘개입’의 힘이 얼마나 적재적소에 활용되는가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달라질 거다.

지금도 내게 능력이 없었다면 도와주러 오지 못했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만큼 내가 끼어든 이상 더는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만들어야겠다는 각오가 들었다.

하태헌이 인형을 상대로 안정적인 싸움을 이어 가는 것을 확인하고 천사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많은 적을 혼자서 상대해야 하는 그는 걱정과 달리 아주 신나게 날뛰고 있었다.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빠르게 날아다니며 검을 휘두르는 천사연은 그 누구도 쉽게 붙잡지 못했다. 원거리 능력자가 당황스러워하는 게 훤히 보였다.

그를 노리고 쏘아진 원거리 공격은 빗나가거나 오히려 같은 팀에게 명중했고, 그게 여러 번 반복됐다.

한이결의 바람 능력이 얼마나 유용한지는 천사연에게 몇 번이나 얘기를 들었지만, 오늘만큼 와닿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녀석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적을 베어 나갔다.

“끄으윽…!”

“으, 크억!”

끈적하게 흐르는 뜨거운 불길에 집어삼켜지거나 신체 일부가 잘린 이들의 비명으로 귀가 시끄러웠다. 그 모든 걸 조용히 지켜보던 나는 기운을 좀 더 써서 천사연에게 휘감긴 바람을 세세하게 움직였다.

강도를 높여서 검을 더 신속하게 휘두를 수 있도록 돕거나, 적의 공격이 닿기 전에 방향을 흩트렸다. 차가운 표정으로 싸우던 천사연이 내가 조율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후우….”

천사연과 하태헌은 완전히 본연의 페이스를 되찾았지만, 나는 반대로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천사연이 줬던 기운 회복 팔찌도 없는 데다, 내 본래 능력을 사용한 부담까지 얹혀 이전보다 더욱 힘들었다.

바람 능력으로 두 명을 감당하는 것은 원래도 벅찬 일이었으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버티기 힘들다.’

심장 부근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여 거친 숨을 억지로 삼켜 냈다. 다행히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천사연과 하태헌은 물론이고 적도 내 상태를 쉽사리 알아채지 못했다.

최대한 멀쩡한 척, 둘에게 보내고 있는 바람을 줄이지 않으며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지금 내가 무너지면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어진다.

“크악!”

높게 날아오른 천사연이 검은 가면을 쓴 자의 등 위로 정확히 떨어졌다. 그에게 깔린 상대는 어깨에 검이 박히며 그대로 기절했다. 인형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이다.

심문하려고 일부러 살려 둔 목숨이었다. 천사연은 정신을 잃은 놈을 구석에 대충 던져두고는 하태헌과 대치 중인 인형 쪽으로 향했다.

“하… 하하….”

거대한 낫을 빙글 돌린 인형이 제게 다가온 천사연을 보고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정말 이해가 안 되네.”

광기가 느껴지는 미소 위로 새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이 올라왔다. 인형이 입가를 가린 채로 턱을 달각거리며 움직였다.

“대체 왜 그분을 거부하는 거지?”

누가 봐도 천사연에게 하는 질문에 옆에 서 있던 하태헌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듣자 하니 꽤 오랫동안 이 쓸모없는 짓을 해 온 것 같던데.”

인형이 내뱉는 말에 마음 한구석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냉정하게 정보를 모았다.

‘저 인형술사도 남들처럼 시간을 되돌리면 기억을 잃는 건가.’

‘그분’이라는 건 엘로힘과 엘라하와 지냈던 칼리를 뜻할 테고. 칼리와 천사연이 어떤 식으로 엮인 건지 아주 조금은 감이 잡혔다.

“애써 봤자 소용없어. 결국 이 세계는 그분 손아귀에 들어갈 거고, 너는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

“지금도 봐. 네 고집 하나 때문에 몇 명이 죽었지?”

눈을 크게 뜬 인형이 광기 어린 얼굴로 제 발아래에 있는 시체를 거칠게 짓밟았다.

“적이라 해도 생명은 생명인데. 불쌍하지도 않니?”

인형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는 천사연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태헌도 나와 마찬가지로 천사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그동안 지나온 시간까지 합치면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있을지 너무 궁금하네.”

“…….”

“설마 아니라고 하진 않겠지? 아무리 없어진 미래라고 해도 희생당한 건 사실이잖아? 역겨워.”

그때였다. 내 우려와 달리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듣던 천사연이 픽,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난 또, 무슨 대단한 소리를 하려나 했더니.”

“뭐?”

“그 불쌍한 생명을 희생시킨 역겨운 새끼는 내가 아니라 너지, 아벨. 어디 피해자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해, 좆같게.”

“하, 피해자?”

사납게 코웃음을 친 인형이 낫을 위협적으로 크게 휘둘렀다. 파지직, 새빨간 번개가 낫을 둘러싸고 번쩍거렸다. 그 행동에 하태헌이 눈가를 좁히며 다시금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분이 네게 선물을 주신 거야. 다른 인간들은 갖지도 못할 성스러운 축복을 받아 놓고, 지금!”

“아무리 값어치가 높고 귀한 것을 준다 해도 상대가 원치 않으면 그저 폭력일 뿐이지.”

격분한 인형의 외침에 심드렁하게 대꾸한 천사연이 겨우 아물어 가는 손바닥을 망설임 없이 베어 냈다.

“하태헌. 낫 위쪽에 박혀 있는 붉은 보석 보이나? 보석이 빛날 때는 낫 근처에 벼락이 내리꽂히니까 조심하도록.”

대화를 무성의하게 끊어 낸 천사연은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 그를 미묘한 표정으로 노려보던 하태헌은 대답 없이 인형에게 달려들었다.

천사연도 제 발아래를 노리고 내리친 붉은 벼락을 가뿐히 피해 내며 위로 날아올랐다. 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멈췄던 기운이 다시 어마어마한 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흐, 으윽….”

한계까지 치달은 심장에서 고통이 밀려왔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신음을 삼켜 내며 그들의 싸움을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쿠르릉!

흐릿한 하늘 너머에서 붉은 벼락이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떨어졌지만, 내 바람으로 공중을 빠르게 이동하며 인형을 몰아세우고 있는 둘에게는 조금도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익…!”

쉴 틈을 주지 않고 공격해 오는 둘의 검을 힘겹게 받아치던 인형은 끝내 제 왼팔이 날아가자 얼굴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렸다.

“짜증 나, 짜증 나! 아악!”

표정을 따라가지 못한 겉 피부에 금이 쩍쩍 그어졌다. 피가 쏟아지는 왼팔을 무시하며 신경질적으로 낫을 휘두르던 인형이 두 다리가 잘리며 결국 무너져 내렸다.

“SS급 인형 하나 만들려면 얼마나 개고생을 해야 하는 줄 알아? 그분께 받은 은혜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인형은 목이 날아가는 직전까지도 장난감을 뺏긴 철없는 아이 같은 목소리로 패악을 부렸다.

묵묵히 인형과 술사의 연결을 끊어 낸 천사연은 바닥에 떨어진 낫에 박힌 보석에도 검을 꽂아 넣어 부서뜨렸다. 재가 되어 공기 중에 흩어지는 낫을 내려다보는 그는 이 모든 게 무척이나 익숙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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