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흐렸다. 폭발로 무너진 건축물에서 흘러나온 뿌연 연기가 호흡을 방해하고 어둑한 분위기가 어깨를 짓누른다.
그 모든 것을 느끼며 천사연은 잠시간 눈을 내리깔고 생각을 정리했다.
실패를 단정 짓기에는 너무 이르다. 서른 명의 검은 가면을 쓴 놈들의 등급과 능력이 어떤지에 따라 승산은 충분히 있었다.
다만, 자신보다는 하태헌이 불안했다. 그는 항상 사람을 처음 죽일 때 심하게 동요하고는 했으니까.
인간형 몬스터야 많이 죽여 봤겠지만, 진짜로 살인을 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검은 가면을 쓴 자들은 미친 사상이 있거나 사마엘에게 이지를 빼앗겼거나 둘 중의 하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이 사람이 아닌 몬스터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주하가 필요했는데, 상황이 꼬였군.’
반면 이주하는 그런 것에 흔들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책임감이 뛰어나고 제 길드를 심히 아끼기 때문에, 만약 다치지 않았다면 그 누구보다 분노하며 앞장서서 저들을 죽였을 것이다.
“하태헌.”
결국 천사연은 먼저 입을 열었다.
“능력자 수십 명이 널 죽이겠다는 목적 하나로 달려들 거다. 등급은 최소한 A급일 거고.”
“…….”
“적당히 봐주겠다는 마음으로 상대했다가는 죽을 거라는 뜻이야.”
그의 경고에 하태헌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키지 않은 기색을 보였다.
여유가 됐다면 지금껏 해 온 대로 그에게 하나씩 차근차근 알려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천사연은 덧붙여 설명했다.
“우리가 뚫리면 뒤에 있는 팀원도 모두 몰살당할 거다. 이성적으로 판단해, 하태헌.”
하태헌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폭발로 무너져 내린 잔해가 쌓여 있어서 팀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들이 이쪽 상황을 알아채기 전에 끝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알겠다.”
마음을 다잡은 하태헌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고 천사연은 새삼 모든 것이 지금까지 겪어 온 일들과 다르다는 것을 체감하며 능력을 발동했다.
검날에 잔뜩 묻어 있던 피가 타오르기 시작하며 용암처럼 새빨갛고 끈적하게 변했다.
“안녕, 예쁜 오빠~ 또 보네?”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적이 걸음을 멈췄다. 가장 뒤에 선 금발 여자가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다. 카렌과 마찬가지로 어른스러운 외형에 비해 흘러나오는 음성은 지나치게 어려서 굉장히 기괴했다.
“화끈한 오빠도 있잖아? 저번에도 같이 있더니… 둘이 친한가 봐?”
애당초 자신들을 노리고 급습해 온 것을 뻔히 아는데. 입을 열고 뱉어 낸 말이 뻔뻔하기 그지없다.
짧은 단발머리에 붉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인형이 눈웃음을 지으며 등에 메고 있던 거대한 낫을 뽑아 들었다. 모든 것이 새빨간 낫은 흐릿한 하늘 아래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친하다니, 잘됐다. 둘 다 여기가 무덤이 될 텐데. 그렇지?”
그걸 끝으로 선두에 서 있던 검은 가면을 쓴 자들이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고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채앵, 양날 도끼와 하태헌의 검이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하태헌은 눈가를 좁히며 제게 달려든 상대를 응시했다. 족히 2미터는 돼 보이는 거대한 체구와 몸 여기저기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크고 작은 도끼가 인상적이었지만, 제일 신경 쓰이는 점은 역시 가면이었다.
얼굴 전체를 모두 가리는 검은 가면이 엄청나게 거슬렸다. 상대방의 표정, 눈빛, 숨소리까지 모두 가면에 가로막혀 생각보다 훨씬 찝찝했다.
검과 도끼가 부딪치는 그 짧은 순간에 상념을 끝낸 하태헌은 제 뒤통수를 노리는 예리한 기운을 알아채고 급히 도끼를 밀어내며 상체를 숙여 피했다.
“…….”
빠르게 몸의 중심을 찾고 검을 가볍게 빙글 돌린 그는 침착하게 저를 둘러싼 이들을 확인했다. 가까운 거리라 풍기는 기운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졌다.
S급 7명. 뒤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는 원거리 능력자 5명. 실수 한 번에 팔이나 다리가 통째로 잘려 나가진 않더라도 목이나 복부 같은 급소에 상처를 입으면 목숨이 위험하다.
하태헌은 급히 시선을 돌려 천사연을 확인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 내고 있는 그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능력을 사용해서 제 주변에 실드를 두른 하태헌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이의 창을 어깨를 비틀어 피해 내며 횡으로 길게 검을 휘둘렀다.
끄윽! 가슴팍이 깊게 베인 상대가 가면 안쪽에서 비명을 내질렀지만, 결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을 텐데. 정신계 능력으로 꼭두각시가 된 그들은 공포조차 잊었다.
사방에서 쉬지 않고 날카로운 날붙이가 쏟아져 왔다. 정신없이 팔을 움직여 검으로 공격을 막던 하태헌은 왼쪽 허리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이를 악물었다.
원거리 능력자가 쏜 화살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나마 뚫리지는 않아서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곧장 날아오는 두 번째 화살을 머리를 비틀어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하태헌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사라락―.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어마어마한 양의 기운이 몸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양의 검은 먼지가 몰려들어 크고 작은 구체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쿠구궁! 쿵!
하태헌을 노리고 있던 원거리 능력자들이 구체 폭발에 휩싸여 비명을 내질렀다. 그 틈에 하태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상대의 목을 베어 냈다.
검은 가면을 쓴 얼굴이 툭 떨어지며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것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응시하던 하태헌은 뒤이어 달려드는 상대의 언월도를 막아 냈다.
‘한이결을 노리는 놈들이다.’
건너편에서 다시 화살과 얼음 송곳이 쏟아져 날아왔다. 어깨와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가는 원거리 공격에도 하태헌은 묵묵하게 눈앞의 상대에 집중했다.
‘죽여 놔야 나중에 후환이 없겠지.’
천사연이 충고한 내용도 물론 중요했지만, 하태헌이 마음을 다잡은 데에는 저 이유가 컸다. 애초에 그는 한이결이 납치되었었단 사실을 안 이후로 이들을 적당히 상대할 생각 따위 없었다.
하태헌이 상대를 가차 없이 죽이는 것을 지켜보던 인형이 입술을 비틀며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그으으….”
인형 옆에 서 있던 가면을 쓴 자들이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인형이 금발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고개를 까딱이자 지금까지 싸움에 끼어들지 않던 이들이 하태헌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는 하태헌의 볼 위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원거리 공격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급격한 기운 소모와 끊임없는 싸움으로 자잘한 부상이 점차 늘어났다.
달려드는 적의 가면 너머로 검을 꿰뚫어 넣은 천사연이 살짝 젖은 앞머리를 흐트러뜨리며 하태헌을 살폈다. 걱정과 달리 하태헌이 사람을 죽이는 데 있어서 머뭇거리지 않아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대로 제 쪽에서 먼저 정리하고 하태헌을 돕는다면 충분히….
거기까지 생각하던 천사연은 하태헌에게 조용히 다가서는 존재를 알아챘다.
검은 가면 아래로 드러난 목이 회색빛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놈들과 달리 움직임이 어딘가 뻣뻣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천사연의 시선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고 있는 인형에게로 향했다. 뒤늦게 그 의도를 알아챈 천사연이 하태헌에게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적에게 가로막혔다.
“하태헌!”
외침을 듣지 못한 하태헌이 제 뒤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검은 가면을 썼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목이 잘려 나간 상대에게서 뜨거운 기운과 강한 충격이 확 터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두 팔을 교차해서 얼굴을 가린 하태헌이 그대로 훅 밀려 땅바닥을 거칠게 굴렀다.
“큭…!”
한 명이 터지자 뒤쫓아 오던 다른 폭탄도 연이어 계속해서 터져 나갔다. 주변이 순식간에 비명과 폭발음으로 가득 차올랐다. 매캐한 연기와 비린 쇠 냄새를 느끼며 하태헌은 아주 잠깐 의식을 잃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채앵!
제 목을 노리고 내리치는 창을 아슬아슬하게 막아 낸 하태헌이 다리를 뻗어 상대의 정강이를 후려 차고 급히 일어섰다. 두 번이나 코앞에서 폭탄이 터진 데다 어디를 잘못 부딪쳤는지 뒷머리에서 두통이 느껴졌다.
“허억, 헉….”
검은 가면을 쓴 이들을 상대한 지 벌써 1시간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조금도 쉬지 않고 싸우며 기운을 계속 소모해 온 터라 SS급이라 하더라도 한계가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막아서는 이들을 베어 내고 겨우 하태헌에게 다가선 천사연이 급한 대로 피가 흐르는 손에 주먹을 쥐어 피를 더 빼냈다.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진 피에서 불꽃이 피어올라 적의 접근을 막았다.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있었나.’
그 여자에게 무언가 전해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과 달리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하태헌에게 일부러 공격을 집중한 것이다.
나란히 선 천사연과 하태헌의 정면으로 검은 가면을 쓴 적이 모여들었다. 숫자가 13명으로 줄었지만 불리한 것은 여전했다. 지금껏 뒤에서 구경하던 인형이 가볍게 낫을 돌리며 느긋하게 걸어왔다.
“시시하네.”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에 천사연이 눈가를 좁혔다.
다른 놈들은 어떻게든 이겨 낼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저 인형이었다. 카렌과 비슷할 정도로 공들여 만든 것을 보아 분명 SS급일 텐데.
천사연은 침착하게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했다.
‘하태헌에게 인형을 맡기고 내가 최대한 빨리 나머지를 처리하고 합류한다면….’
팔 하나 정도 잃을 위험은 있지만, 그 대가로 모두가 살아 나갈 수 있다면 꽤 괜찮았다. 어떻게든 목숨만 유지하면 힐러들이 가까이에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툭 떨어졌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천사연은 마음을 다잡았다.
“하태헌, 지금부터…….”
자신이 세운 계획을 설명하려던 천사연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기운을 느낀 천사연과 하태헌의 시선이 동시에 옆으로 향했다.
천사연과 하태헌의 사이.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그곳에 여름의 햇살을 떠올리는 청량하고 다정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괜찮아, 천사연.]
꿈결처럼 들려온 말과 함께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천사연과 하태헌을 응원하듯 휘감았다. 몇 번이고 느껴 온 익숙한 감각에 천사연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둘 다 다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어.]
바람이 집중하라는 듯 천사연과 하태헌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흔들림 없는 단단한 음성에 하태헌이 검을 재차 힘주어 잡았다. 천사연도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들어야 할 설명이 또 늘어났군.”
하태헌의 탄식에 천사연이 입꼬리 끝을 살짝 올려 미소 지었다.
방금까지 제 몸을 집어삼켜 가던 불행의 그림자가 어느새 사라졌다. 순식간에 달라진 둘의 분위기에 인형이 미간을 찌푸렸다.
[천사연, 하태헌 씨.]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원시원한 목소리만으로도 당당한 웃음을 짓는 그의 얼굴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가세요. 힘을 보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