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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환생은 원치 않아 (177)화 (177/394)

177화

45. 지원군

엘로힘의 뒤를 따라 서재로 들어선 나는 탑처럼 높이 쌓여 있는 붉은 책을 지나쳐 중앙으로 향했다. 눈을 감은 채로 공중에 떠 있는 엘라하의 앞에는 새하얀 책이 펼쳐져 있었고, 주변에는 불투명한 종이가 한가득 흩날렸다.

“갑자기 데려와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그보다 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설마 하태헌 씨가….”

“그래.”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는 내 모습에 엘로힘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뉴스를 봤으니 이해가 빠르겠지. 예고했던 대로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리의 하수인들 말이군요.”

“이대로라면 하태헌은 물론이고 천사연도 무사하지 못한다.”

“천사연이요?”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엘로힘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천사연이 왜… 게이트는 로헌이 가져갔잖아요.”

“그 아이도 들어갔단다. 자신이 가지 않으면 하태헌이 위험하다는 것을 아니까.”

“천사연이 함께 있는데도 위험하다는 겁니까?”

“그들이 이렇게 이른 시기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

혼란스러운 마음에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그런 내게 엘로힘이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반복되는 시간으로 세계가 약해진 탓에 생겨난 게이트라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는 알 수 없다. 그간 쌓인 수많은 경험으로 예측은 할 수 있지만, 그뿐이야.”

“그럼….”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난폭한 방법으로 접근해 오고 있어. 천사연이나 하태헌이 운 좋게 버텨 낸다고 하더라도 다른 인간들은 그러지 못하겠지.”

내 어깨를 강한 힘으로 붙잡은 엘로힘의 표정은 단호했다.

“세현아. 너도 알다시피 이대로 천사연이 죽으면 시간이 다시 돌아가거나 세계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수 있다.”

“…제 능력이 필요한 거군요.”

“그래. 우리는 칼리와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간섭이 불가능하단다.”

“하지만 전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릅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가 도울 테니.”

그가 내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나와 엘로힘이 가까이 다가서자 엘라하가 천천히 눈을 떴다.

“현재 벌어지는 모든 일이 책에 기록되고 있단다. 저것을 읽어야 한다. 네 몸까지는 갈 수 없더라도 의식은 충분히 넘어갈 수 있을 거야.”

책을 통로로 이용하라는 뜻이었다. 불안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책을 보려면 대가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대가는 나와 엘라하가 대신 치를 거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책이 엘라하 곁을 떠나 내 앞으로 날아왔다. 왼쪽 페이지 절반 정도 채워진 책은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만약 도착하고서도 능력을 쓸 수 없으면…….”

“넌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우리를 믿으렴.”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긴장으로 점차 가파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천천히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세현아, 부탁한다.”

엘로힘의 씁쓸한 말을 끝으로 책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터져 나온 새하얀 빛에 모든 시야가 먹혀들며, 딛고 서 있던 바닥이 사라져 아래로 추락하는 것만 같은 아찔한 감각이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허억….”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언제 감았는지 모르는 눈을 다시 뜨자, 모든 것이 새롭게 나타났다.

***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끝도 없이 밀려들던 와이번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길드원들은 시야에 보이는 와이번 숫자가 스무 마리 정도 남자, 드디어 끝이라는 생각에 남은 기운까지 끌어모아 악착같이 공격했다.

키에에엑!

마지막 남은 한 마리가 하태헌의 검에 날개가 잘려 추락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떨어진 와이번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어 마무리까지 해낸 하태헌의 모습에 모두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죽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치열한 전투를 끝낸 이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기운을 바닥까지 사용한 몇몇은 창백하게 질려서 식은땀을 흘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의 와이번 떼를 버텨 낸 클리어팀은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게이트 출구가 있음에도 한 걸음도 가지 못했다.

“쉬고 움직이도록 하자.”

그 누구 못지않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와이번을 죽여 낸 이주하도 지친 얼굴로 휴식을 외쳤다. 와이번과의 싸움이 끝났다는 보고를 전해 들은 힐러들이 건물 밖으로 달려 나와 부상자들을 살폈다.

“하…….”

능력을 풀어 검을 없앤 하태헌도 주변을 둘러보며 피곤이 담긴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입고 있던 재킷의 어깨 부근이 길게 찢어진 것을 알아챈 그는 미련 없이 그것을 벗었다.

어차피 이번 게이트에서 인벤토리에 넣어 온 SS급 코트를 새로 발견한 것처럼 꾸밀 계획이라 외투는 더 필요하지 않았다.

‘게이트 출구가 나타났으니 슬슬 마스터와 얘기해 둔 대로 움직여야겠군.’

그래 봐야 대단한 건 아니었다. 구석진 곳에서 미리 챙겨 온 상자에 코트를 넣어 들고 나온다. 그럼 이주하는 제일 처음 발견했다는 이유로 코트를 하태헌에게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조잡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차피 게이트는 이상 현상으로 이전과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이번 클리어팀은 이주하를 믿고 따르는 길드원이 대부분이라 걱정 없었다.

아이템이 있을 만한 장소를 물색하러 움직이려는 그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지쳐 보이는데.”

“…….”

하태헌은 지긋지긋하다는 시선으로 제게 다가오는 천사연을 노려봤다.

다른 길드원보다 천사연이 제일 문제였다. 하태헌이 SS급 코트를 이미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데다 당최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어서 섣불리 경계를 풀 수 없었다.

대화를 듣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하태헌이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던 그 말, 무슨 뜻인지 아직 못 들었다.”

“이제 게이트 밖으로 나갈 건데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싶군.”

“쯧….”

능구렁이 같은 놈. 혀를 찬 하태헌은 다시는 천사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먼저 등을 돌렸다.

“어디 가지?”

“따라오지….”

당연하다는 듯이 뒤를 쫓아오는 천사연에게 한 소리 하려던 하태헌의 시선에 이상한 것이 잡혔다. 검은 두건을 둘러맨 남자가 비척거리며 힐러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엇, 어디 아프세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불안한 걸음걸이에 부상자라고 생각한 힐러가 말을 걸었다. 그 광경에 하태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는 게이트 내부로 들어온 사람이라면 응당 있어야 하는 기운의 흐름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무생물 같았다.

두건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 어느 쪽 소속인지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불쑥 치솟는 불안한 감정에 하태헌이 둘 사이에 끼어들려는 찰나, 뒤늦게 하태헌과 같은 것을 본 천사연이 거친 음성으로 외쳤다.

“하태헌!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막…!”

쿠우웅―!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건 속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더니, 곧 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이성적인 판단 이전에 본능적으로 힐러에게 달려가던 하태헌과 그 뒤에 서 있던 천사연을 비롯해 근처에 있는 모든 이들이 충격에 휩쓸려 뒤로 날아갔다.

“무, 무슨…!”

“사… 사람이 터졌….”

벽에 부딪혀 돌바닥에 쓰러진 하태헌이 겨우 상체를 일으켜 머리를 흔들었다. 폭발을 직격으로 맞은 터라 삐이, 하는 시끄러운 이명과 함께 모든 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젠장, 힐러들을 지켜!”

“…조심… 피해!”

“끄아악!”

폭발음이 여기저기에서 쉬지 않고 들려왔다. 뿌연 연기가 치솟고 부서진 돌 파편이 후드득 떨어졌다. 폭발을 뚫고 하태헌에게 다가온 이가 강한 힘으로 팔을 끌어당겨 강제로 일으켰다.

“정신 똑바로 차려, 하태헌.”

하태헌과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천사연이었다. 덕분에 겨우 폭발의 충격에서 벗어난 하태헌이 능력으로 검을 만들어 쥐며 상황을 확인했다.

“마스터!”

연기를 헤치고 팀원들에게로 뛰어간 하태헌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주하를 보고 급히 달려가 상태를 확인했다. 오른쪽 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고 어깨에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다행히 숨은 제대로 쉬고 있었다.

“제, 제가 멍청하게 넘어져서 마스터가 대신…….”

창백하게 질린 채로 이주하 곁을 지키고 있던 힐러가 하태헌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하태헌 부마스터! 괜찮으세요?”

“하태헌 씨! 마스터!”

운 좋게 폭발에 휩쓸리지 않았는지 그나마 멀쩡한 민아린과 도하석이 달려왔다. 그들에게 이주하와 힐러를 맡긴 하태헌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천사연의 곁으로 향했다.

싸늘한 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지는 연기 너머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검은 가면을 쓴 자들이 보였다. 그것을 본 하태헌은 중국 출장을 끝내고 돌아와 한이결을 만났을 때 들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이주하 마스터는?”

“…힐러에게 맡겼다.”

별다른 설명 없이 한마디로 대답을 끝낸 하태헌이 복잡한 얼굴로 눈가를 좁혔다.

‘방향을 보니 게이트 입구를 통해 이곳으로 들어왔군.’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됐을지 걱정이 드는 것과 동시에,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치솟았다.

‘한이결을 노리는 것 아니었나?’

지금 이 상황은 우발적인 테러가 아닌 철저한 계획으로 벌어진 습격이 확실했다. 하태헌은 새삼 자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느꼈다.

“집중해, 하태헌.”

옆에 서 있던 천사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상념에 잠겨 있던 그를 깨웠다. 그러고 보니 천사연은 와이번을 모두 소탕한 후에도 검을 든 채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일을 꾸미고 있는 건 내가 아니야.

처음 게이트에 들어와서 천사연과 나눴던 대화를 상기한 하태헌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런 뜻이었나.

그가 얼버무린다고 대충 넘기면 안 됐는데. 이번 일이 해결되면 그때는 멱살을 잡아서라도 캐내야겠다고 다짐하며 하태헌은 인벤토리에서 SS급 코트를 꺼내 착용했다.

어차피 이런 상황에서 아이템 운운할 정신은 없었다. 천사연과 하태헌이 전투 준비를 끝내자 검은 가면을 쓴 자들도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둘을 발견하고 무기를 들어 올렸다.

천사연은 서른에 달하는 집단의 가장 끝, 이질적으로 생긴 금발의 여자를 응시한 채로 손바닥을 천천히 그었다. 바람결에 흩어지는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얼굴에는 짙은 음울함이 비쳤다.

폭탄 인형을 이런 식으로 써먹을 줄이야. 고된 싸움으로 모두가 지치고 방심한 틈을 제대로 노린 급습이었다.

이주하 마스터는 쓰러졌고, 클리어팀 대부분이 크게 다치거나 죽었다. 자신과 하태헌 둘이서 서른의 능력자를 막아 내야 했다.

그간 질리도록 느낀 불행의 그림자가 또다시 제 몸을 집어삼켜 오기 시작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천사연은 결코 검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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